조선 시대 유배가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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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시대 유배가사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유배문학의 개념

2. 유배가사
2.1. 시대적 배경
2.2 유배가사 작품 개관

3. 닫는 말

본문내용

조선 시대 유배가사 연구
1. 유배문학의 개념
내 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山(산) 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殘月曉星(잔월 효성)이 아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과)도 허믈도 千萬(천만) 업소이다.
힛마리신뎌
읏븐뎌 아으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정서,「정과정곡(鄭瓜亭曲)」
위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유배문학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정서의「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지만 유배와 관련한 문학작품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이어진다. 특히 당쟁과 사화가 치열하였던 조선 시대의 유배문학은 곧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시대적 산물로서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유배생활은 시조나 가사를 막론하고 유배자에게 문학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하였다.
유배는 죄인을 먼 지방으로 쫓아 보내던 형벌의 뜻으로 사용되던 귀양에서 비롯된 말로 즉, 죄인을 귀양 보내는 것이 바로 유배(流配)이다. 유배생활은 대체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유배문학은 대체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고, 정적(政敵)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유교 사상에 입각한 사대부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애정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유배문학의 구체적인 개념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순필, 「李朝流配文學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69. 에서 인용
기본적으로 유배문학은 군왕에게 유배의 벌을 받아 생활조건이 험악한 벽지나 낙도에 유배된 유배자들이 배소에서 그들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유배의 체험과 그것을 소재로 한 모든 작품들을 꼽을 수 있을 텐데, 유배를 당한 사람이 유배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당한 사실적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물론, 자기 고향과 화려한 벼슬밖에 모르던 처지에서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한 곳으로 옮기어 인생과 자연을 접하며 다양한 심리와 정서가 가미되어 이루어진 작품들도 통틀어 유배문학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2. 유배가사
유배문학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가사 작품들이다. 길이가 한정되어 있는 시조나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 어려운 소설에 비하여 가사 작품들은 비교적 자유롭고 풍부하게 자신의 처지와 감정, 사상을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었기에 유배문학의 정조를 다른 어떤 장르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에 이번 보고서에서는 유배문학 가운데에서도 조선 시대의 가사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을 살펴보고, 그에 담긴 작가의 의식과 표현 양상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1. 시대적 배경
조선 전기는 건국 후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으며 대개 훈구파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정치적 파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의 자연은 사대부들의 현실 정치 세계와 크게 충돌하지 않는 조화로운 공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사대부들의 작품 역시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삼아 자연을 즐기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기풍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특히 연산군 7년(1501)부터 선조 연간의 사회 정세는 급격한 변동을 초래했던 시기이다. 연산군 때의 정치적 갈등은 여러 차례 사화(士禍)로 번졌고, 중종 때 대거 진출했던 조광조 계열의 신진 사림 세력은 결국 갑자사화로 인하여 커다란 화를 입고 지방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그 뿌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사림 세력은 결국 선조 이후 중앙 정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에 일어난 이들 간의 분열과 당쟁으로 인하여 당파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치열한 정치적 투쟁 과 당쟁의 폐해 속에 많은 지식인들이 중앙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었는데 이 유배생활 동안 오히려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주옥같은 작품들이 탄생했다는 점은 유배자의 개인적 불행과는 대비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2 유배가사 작품 개관
1) 만분가(萬憤歌)
조선시대 유배가사는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가 유배지인 전라도 순천에서 지은 「만분가(萬憤歌)」를 효시로 볼 수 있다. 조위는 수차에 걸쳐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떨쳐,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며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士林)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의 기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리자 그대로 편찬케 할 정도로 신념이 굳은 인물이었으나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의주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며 결국 유배지인 순천에서 죽었다.
天上 白玉京 / 十二樓 어듸매오 / 五色雲 깁픈 곳의 / 紫淸殿이 려시니
구만 리 먼 하늘을 / 꿈이라도 갈동말동 /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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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격1,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7.10.07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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