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본 론
1) 개화사상의 출현 배경
2) 개화사상의 시대구분
3) 개화사상의
(1) 실학에서 개화로의 전환
3) 개화사상의 전개
(1) 초기 개화파의 형성
(2)개화파의 분화
(3) 동도서기론의 대두
(4)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5)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4) 개화사상의 한계성
3. 결 론
2. 본 론
1) 개화사상의 출현 배경
2) 개화사상의 시대구분
3) 개화사상의
(1) 실학에서 개화로의 전환
3) 개화사상의 전개
(1) 초기 개화파의 형성
(2)개화파의 분화
(3) 동도서기론의 대두
(4)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5)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4) 개화사상의 한계성
3. 결 론
본문내용
< [개화사상] 개화사상에 관하여 >
1. 서 론
1860년 영국과 프랑스 동양함대가 연합하여 중국을 또 공격했는데, 1개월 만에 중국은 수도 북경을 점령당해 버리고 청국황제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으로 도망하여 열하에 피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동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중국의 서양의 무력 앞에서 힘없이 굴복하여 수도까지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조만간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와 공격을 시작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선각적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인식되었다. 그것은 만일 한국민족이 서양세력의 도전에 조선이 적절하게 응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에는 열강의 강대한 침략의 힘에 의해서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는 ‘민족적 위기’로 조선지식인들에게 인식된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조선 선각적 지식인들은 서양세력의 이 새로운 도전을 적절히 극복하고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면 종래와 같은 전근대적 응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응전의 방안을 고안해 내서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양열강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사상으로는 19세기 중엽에 조선민족의 지식인들이 만든 새로운 사상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개화사상ㆍ동학사상ㆍ위정척사사상 등이었다. 본고에서는 그중 개화사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본 론
1) 개화사상의 출현 배경
신미양요를 겪은 뒤인 1870년대 전반기 조선사회에는 개화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사상은 영조(1725~76), 정조(1777~1800) 시대에 전성을 이루었던 실학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났지만, 그러나 실학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실학은 실증ㆍ실용 등을 연구의 방법과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유학안에서의 새 경향에 지나지 않고, 또 사상적인 면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반해 개화사상은 현실을 중시하고 유학에서 벗어나 있었다. 실학이 근대지향적인 것이라 하면 개화사상은 바로 근대사상이었다. 어떻게 해서 개화사상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우선 국제정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작용하였다. 정조 말년(18세기말)에서부터 이양선ㆍ황당선이 빈번히 우리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에서는 한결같이 쇄국을 고집하고 거절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력충돌이나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던 것이므로 양이에 대해 별반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1850~1863) 말년부터는 달라졌다. 외세의 충격이 직접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철종 11년(1860) 영불연합군이 청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함풍제가 만주 열하로 피난간 사건이 일어났다. 대국인 청국이 이처럼 무참히 양이로부터 침략을 당한다면 조선의 운명도 풍전의 등화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고종 3년(1866)에는 병인양요로 프랑스군과 무력충돌을, 고종 8년(1871)에는 신미양요로 미국군과 무력충돌을 하게 되면서, 양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무관심, 혹은 방관을 계속할 처지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대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양이의 정체를 파악해야 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중국에서 들어온 위원의《해국도지》 중국 청나라의 위원(魏源)이 1842년에 지은 세계 지리서. 세계 각국의 지세, 산업, 인구, 정치, 종교 따위의 다방면에 걸쳐 서술하였다. 1844년에 간행하였고, 1847년에 다시 60권으로 간행하였다가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을 하였다.
, 서계여의《영환지략》 중국 청나라의 서계여(徐繼)가 지은 세계 지리 책. 1848년에 완성하여 1850년에 간행하였다.
같은 책을 열심히 일게 되었다. 특히《海國圖志》에 들어있는 <籌海篇>이란 項目에 관심을 쏟았다. 海上에서 쳐들어오는 洋夷를 막기 위해서은 과감하게 洋夷의 長技를 채용해야 된다는 海防思想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두 번째로 開化思想이 나타날 수 있는 요인은 中人들의 활동 혹은 영향이었다. 朝鮮 後期에 있어서 海外事情에 가장 밝았던 사람은 中人들이었다. 中人 중에서도 특히 譯官들은 中國을 자주 여행할 수 있어서 새로운 文物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한편 洋夷와의 접촉으로 나타난 中國社會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儒學의 교리에만 빠져 있지 않았고, 또 現實을 重視하였던 것이므로 변화에 민감하였다. 그리하여 洋夷의 침투에 대해 朝鮮도 조만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譯官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吳慶錫이었다. 그는 漢語 譯官으로 전후 10차례나 中國을 왕래하였고. 특히 高宗 9년(1872) 朴珪壽가 進賀兼謝恩使로 中國에 갔을 때 首譯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본시 實學者 阮堂 金正喜의 弟子로서 金石學의 조예가 깊었으며, 中國에서 간행된 많은 新書를 구입하여 읽음으로써 海外事情에 밝았다.
그러나 그는 身分이 낮았던 관계로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자연히 兩班들과 접촉하여 계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말하자면 兩班들로 하여금 虛學化된 經學에서 눈을 돌려 時務에 관심을 갖게 하고 中華思想에서 벗어나 夷의 세계의 동향을 살피고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中人들이 뒤에서 활동하고 國際情勢에 대한 새로운 理解를 갖게 되면서 개화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컨대 개화사상은 외세의 挑戰에 대한 對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새 사상을 체득하게 된 사람들은 장차 정치의 正面에 나설
1. 서 론
1860년 영국과 프랑스 동양함대가 연합하여 중국을 또 공격했는데, 1개월 만에 중국은 수도 북경을 점령당해 버리고 청국황제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으로 도망하여 열하에 피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동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중국의 서양의 무력 앞에서 힘없이 굴복하여 수도까지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조만간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와 공격을 시작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선각적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인식되었다. 그것은 만일 한국민족이 서양세력의 도전에 조선이 적절하게 응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에는 열강의 강대한 침략의 힘에 의해서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는 ‘민족적 위기’로 조선지식인들에게 인식된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조선 선각적 지식인들은 서양세력의 이 새로운 도전을 적절히 극복하고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면 종래와 같은 전근대적 응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응전의 방안을 고안해 내서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양열강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사상으로는 19세기 중엽에 조선민족의 지식인들이 만든 새로운 사상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개화사상ㆍ동학사상ㆍ위정척사사상 등이었다. 본고에서는 그중 개화사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본 론
1) 개화사상의 출현 배경
신미양요를 겪은 뒤인 1870년대 전반기 조선사회에는 개화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사상은 영조(1725~76), 정조(1777~1800) 시대에 전성을 이루었던 실학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났지만, 그러나 실학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실학은 실증ㆍ실용 등을 연구의 방법과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유학안에서의 새 경향에 지나지 않고, 또 사상적인 면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반해 개화사상은 현실을 중시하고 유학에서 벗어나 있었다. 실학이 근대지향적인 것이라 하면 개화사상은 바로 근대사상이었다. 어떻게 해서 개화사상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우선 국제정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작용하였다. 정조 말년(18세기말)에서부터 이양선ㆍ황당선이 빈번히 우리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에서는 한결같이 쇄국을 고집하고 거절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력충돌이나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던 것이므로 양이에 대해 별반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1850~1863) 말년부터는 달라졌다. 외세의 충격이 직접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철종 11년(1860) 영불연합군이 청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함풍제가 만주 열하로 피난간 사건이 일어났다. 대국인 청국이 이처럼 무참히 양이로부터 침략을 당한다면 조선의 운명도 풍전의 등화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고종 3년(1866)에는 병인양요로 프랑스군과 무력충돌을, 고종 8년(1871)에는 신미양요로 미국군과 무력충돌을 하게 되면서, 양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무관심, 혹은 방관을 계속할 처지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대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양이의 정체를 파악해야 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중국에서 들어온 위원의《해국도지》 중국 청나라의 위원(魏源)이 1842년에 지은 세계 지리서. 세계 각국의 지세, 산업, 인구, 정치, 종교 따위의 다방면에 걸쳐 서술하였다. 1844년에 간행하였고, 1847년에 다시 60권으로 간행하였다가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을 하였다.
, 서계여의《영환지략》 중국 청나라의 서계여(徐繼)가 지은 세계 지리 책. 1848년에 완성하여 1850년에 간행하였다.
같은 책을 열심히 일게 되었다. 특히《海國圖志》에 들어있는 <籌海篇>이란 項目에 관심을 쏟았다. 海上에서 쳐들어오는 洋夷를 막기 위해서은 과감하게 洋夷의 長技를 채용해야 된다는 海防思想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두 번째로 開化思想이 나타날 수 있는 요인은 中人들의 활동 혹은 영향이었다. 朝鮮 後期에 있어서 海外事情에 가장 밝았던 사람은 中人들이었다. 中人 중에서도 특히 譯官들은 中國을 자주 여행할 수 있어서 새로운 文物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한편 洋夷와의 접촉으로 나타난 中國社會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儒學의 교리에만 빠져 있지 않았고, 또 現實을 重視하였던 것이므로 변화에 민감하였다. 그리하여 洋夷의 침투에 대해 朝鮮도 조만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譯官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吳慶錫이었다. 그는 漢語 譯官으로 전후 10차례나 中國을 왕래하였고. 특히 高宗 9년(1872) 朴珪壽가 進賀兼謝恩使로 中國에 갔을 때 首譯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본시 實學者 阮堂 金正喜의 弟子로서 金石學의 조예가 깊었으며, 中國에서 간행된 많은 新書를 구입하여 읽음으로써 海外事情에 밝았다.
그러나 그는 身分이 낮았던 관계로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자연히 兩班들과 접촉하여 계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말하자면 兩班들로 하여금 虛學化된 經學에서 눈을 돌려 時務에 관심을 갖게 하고 中華思想에서 벗어나 夷의 세계의 동향을 살피고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中人들이 뒤에서 활동하고 國際情勢에 대한 새로운 理解를 갖게 되면서 개화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컨대 개화사상은 외세의 挑戰에 대한 對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새 사상을 체득하게 된 사람들은 장차 정치의 正面에 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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