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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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의 비교
Ⅰ. 제주 4/3 항쟁과 여순 사건의 배경과 전개
1. 제주 4/3 항쟁의 배경과 전개
1)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과 제주도 상황
2) 제주 4/3 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여순 사건의 배경과 전개
1) 여순사건의 배경
2) 사건의 발발과 확산
3) 여순사건의 진압

Ⅱ. 제주4·3항쟁과 여순 사건의 성격과 해석
1. 제주4·3항쟁의 의미와 성격
2. 여순사건의 의미와 성격
-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의 국가폭력의 문제
1) 4·3항쟁과 양민학살
2) 여수군민항쟁

Ⅲ. 맺음말

본문내용

와 주변부의 대결이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지평에서의 한 비극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냉전시대에 냉전의 진앙과 중심부는 힘의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실제로는 충돌하지도 않고 피해도 적었지만, 격렬한 대립, 잔인한 공방전, 엄청난 살육전은 항상 이 두 세력의 이념과 체제를 담지한 변방 최전선으로부터 시작되고 타올랐다. 이 점에서 세계냉전의 변방 최전선으로서의 한국, 그리고 한국의 변방으로서의 제주에서의 비극은 극점에 달했던 것이다. 제주4·3은 그러한 냉전의 상징적 사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2. 여순사건의 의미와 성격
여순반란은 미군의 비호를 받는 이승만 정부를 파멸의 늪으로 몰아넣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첫째, 여순 봉기의 파급적 영향은 이승만 정부를 지탱해주는 보루로서의 억압적 군대내부에 광범위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둘째, 여순 봉기에 참가한 군장병들이 대거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2.7구국투쟁 이후 야산대의 형태로 펼쳐지던 무력항쟁과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의 불길을 당기었다. 이로써 여순 봉기는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무력 항쟁의 불길을 전 남한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여순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재조명 작업으로 제주도의 ‘4/3폭동’을 ‘4/3항쟁’으로 새롭게 평가하고, 거창이나 남원등에서 일어났던 국군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여순사건의 원인과 배경, 결과에 대한 연구는 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의 국가폭력의 문제
근대국가, 냉전 그리고 국가 폭력
정치체로서 국가의 형성은 근대적 현상이다. 이 근대국가는 과거 귀족이나 사회집단이 나누어 가졌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권력의 궁극적인 유형은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국제 관계의 형성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대외적 폭력행사-전쟁-와 자국민 보호, 폭력행사-징세는 근대국가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보편적인 현상이며, 상호결합되어있다. 결국 국민국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제 환경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국가는 폭력기구를 구비하고 있다. 단지 그러한 폭력이 사사로운 보복적인 감정에 기초하는가. 영토내의 주민이 국가에 저항할 때 그를 하나의 시민 혹은 인간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가, 혹은 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가 하는 점에서 근대 국가와 과거의 다른 형태의 정치체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절대국가 혹은 아시아 봉건국자에서는 사사로운 폭력의 행사가 어느 정도 억제는 되었지만, 있었다. (춘향전, 노비 살해) 이런 점에서 폭력의 국가독점과 법에 기초한 형벌, 인신적 처벌의 금지는 근대국가의 문명화된 측면이다. 이는 폭력의 소멸이라기보다는 폭력의 중앙집권화, 폭력의 행사에 있어서 동의의 절차 마련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적 근대를 경험한 나라에서 공적 폭력은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이전인 식민지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파시즘적 식민지 지배체제는 국가 폭력의 기원을 이룬다.
1,2차 세계 대전, 냉전기간 법의 지배보다는 내부의 적에 대한 폭력 행사가 노골화되었다. 냉전하에서 국가의 안보가 직접적으로 위협에 처하지 않았어도 주민에 대한 공적 폭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주권의 위협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안보는 냉전질서 하의 국가간 대결체제를 표현해주는 동시에 국가 내부의 사회관계를 설명해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안보는 \'내부의 적\'의 통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국가 간의 직접 대결이 일어나지 않아도 외적인 위협을 명분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방대한 군부조직을 육성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냉정은 국가가 사회의 제약에 구속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국가는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된다. 각국에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사상 및 신체의 통제를 일상화한다는 점에서 법이라기보다는 \'폭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이것은 힘으로써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안보를 목적으로 한 국가 보안법 제장과 초법적인 권력행사는, 국가적 동원에 의해 자본주의 공업화를 추진할 필요성에 따라 애초의 한시적인 성격을 뛰어넘어 지속적인 지배체제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안보국가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법을 대신하여 사회질서 유지의 전명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통치체계가 그랬듯, 안보를 명분으로 한 폭력 행사는 지배집단의 이념과 기반의 취약성을 반영하고 있다.
국가의 사회로부터의 유리는 곧 국가 중립성의 훼손을 의미한다. 국가가 공공의 이름으로 통제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곧 사회 내 특정 세력이나 대표자가 국가의 이름으로 다른 세력을 억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거꾸로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과 그 정당성의 기반의 허약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냉전질서 하의 국가의 폭력행사는 사회 내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의 세력관계, 특히 양자간의 취약한 합의의 기반을 드러내는 사회관계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1) 4·3항쟁과 양민학살
4·3항쟁은 제주도민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통일투쟁이었고, 또 도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특성 외에도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실체 희생자의 80%이상이 무고하게 또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양민학살이라는 특성을 띤다.
4·3항쟁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를 주도한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항쟁발발 초기부터 미국은 경비대장 김익렬에세 딘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인 CIC의 고급장교를 통하여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국제적으로 범죄시 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촉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김익렬,1994: 312-314). 이에 제주도 미군사령관을 강경파인 브라운으로 교체하고 또 경비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하여 한 달여 만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물론 직접적인 행동대는 이러한 미군정이 양육하고 또 그들의 철저한 앞?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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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0
  • 저작시기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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