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데카르트의 삶과 철학
2. 데카르트의 저작
3. 데카르트의 사상과 윤리관
4. 방법서설
5.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6.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지토 에르고 숨)
7.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8. 외적세계의 존재와 신에 대한 증명
9. 결론
10. 참고자료
2. 데카르트의 저작
3. 데카르트의 사상과 윤리관
4. 방법서설
5.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6.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지토 에르고 숨)
7.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8. 외적세계의 존재와 신에 대한 증명
9. 결론
10. 참고자료
본문내용
회의의 무지로 빠지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의 회의 도정 최후 지점을 "불가항력의 무지"가 에워싸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가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의 불확실성이 붕괴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회의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근원적 확실성을 산출해 낼 때까지 계속 회의에 오히려 메달리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나에게 표상이 되는 것, 내가 인식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 또한 의심될 수 있다. 비록 이 대상들에 대한 나의 관념이 존속하고 동시에 이 관념들을 지니고 있는 나 자신이 존속한다 할지라도, 회의 그 자체, 곧 회의만은 나에게 나의 현존을 증시한다. 왜냐하면 내가 회의하는 한, 회의하는 자인 나는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이러한 나 자신에 대한 가장 내적인 확실성을, 더욱이 신이 기만자일지라도 붕괴시킬 수는 없다. 즉, 신이 나를 속일지라도 기만당하는 자인 나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저 유명한 자신의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확실성의 발견과 자아의 본질 탐구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회의의 종국에 가면 인간 자신이 근본적으로 전도되어 현존하게되는 가능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그러한 상태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므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의 결정적 주제, 즉 모든 현실성의 근원에 대한 물음, 곧 신에 대한 물음으로 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근본적 전도는 창조사상이 지배적이라고 하더라도, 신이 기만자로서 사유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이 진리임을 반드시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근거짓기 위해서는 그전에 신이 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그 자신의 내면에 최상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미리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하게 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제 이러한 관념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즉 "신"과 "무"사이의 중간자는 최상의 완전한 관념을 자신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배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관념은 어디에서 인간에게 출현하는가? 그것은 그에게 최상의 완전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심어질 수 있다고 그는 대답한다. 이것만이 최상 관념의 창시자일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인간내의 신관념의 근원인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인간에게 역시 근본적으로 비진리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신은 결코 기만자가 아니라 순수 진리임이 틀림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되고 이제껏 그가 가져왔던 극단적인 회의들은 제거가 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의 진리성과 현존(외부세계)에 대한 확실성이 다시 얻어지듯이, 한 순간 자기 의식의 위태로운 고독을 통찰한 인간은 다시 은폐된 창조 질서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는 신존재 증명을, 인간이 최상의 완전한 관념을 자기 스스로에서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같은 유한한 존재는 당연히 무한의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어떠한 원인(신)에는 적어도 그 원인에 의해 야기된 만큼의 존재(외부세계 - 인간)가 부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데카르트가 자신의 신에 대한 증명을 실제로 자기 자신한테서 도출되는 그러한 원리에 기초했다면, 이러한 증명은 실제로 밑도 끝도 없는 순환논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해결을 위한 한계에까지 갈 것을 감행하기도 하고, 반대로 스스로를 숨기기도 하면서, 신에게 근거지어진 확실성에서 보여지는 가능성에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파괴된 형이상학을 새로 건립했으며, 창조자에 대한 상실된 지식을 재보존하는 데 정열적으로 노력했다. 동시에 근본적으로 자기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신의 확실성이 인간에게도 귀속된다는 신념을 얻게된 것이다.
9. 결론
데카르트가 죽은 뒤, 경건한 가톨릭교도였던 클레르슬리에가 유고를 입수하여 선별 간행함으로써 데카르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윤색작업은 교부 아드리앵 바예가 1691년 방대한 데카르트 전기를 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말 그리스도교 교리를 지지하는 데 주된 관심을 쏟은 로마 가톨릭교 옹호론자였는지, 아니면 결정론적·기계론적·유물론적 물리학을 확립하면서도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보호한 무신론자였는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클레르슬리에와 바예가 이용한 데카르트의 많은 원고들이 현재로선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667년 데카르트의 유골이 파리 주느비에브뒤몽 성당에 안치되던 바로 그날에 그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데카르트 생전에 줄곧 그를 예수회회원이자 교황예찬론자 즉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1930경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요관심이 형이상학적 종교에 있었다고 믿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가 태생이나 정치면에서 프랑스인이자 왕정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가톨릭교도였다고 믿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 참고자료
존 코팅엄, 데카르트, 궁리필로소피
데카르트, 방법서설 성찰 외, 삼성출판사
에드문트 후설 외, 데카르트적 성찰, 한길사
나에게 표상이 되는 것, 내가 인식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 또한 의심될 수 있다. 비록 이 대상들에 대한 나의 관념이 존속하고 동시에 이 관념들을 지니고 있는 나 자신이 존속한다 할지라도, 회의 그 자체, 곧 회의만은 나에게 나의 현존을 증시한다. 왜냐하면 내가 회의하는 한, 회의하는 자인 나는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이러한 나 자신에 대한 가장 내적인 확실성을, 더욱이 신이 기만자일지라도 붕괴시킬 수는 없다. 즉, 신이 나를 속일지라도 기만당하는 자인 나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저 유명한 자신의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확실성의 발견과 자아의 본질 탐구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회의의 종국에 가면 인간 자신이 근본적으로 전도되어 현존하게되는 가능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그러한 상태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므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의 결정적 주제, 즉 모든 현실성의 근원에 대한 물음, 곧 신에 대한 물음으로 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근본적 전도는 창조사상이 지배적이라고 하더라도, 신이 기만자로서 사유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이 진리임을 반드시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근거짓기 위해서는 그전에 신이 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그 자신의 내면에 최상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미리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하게 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제 이러한 관념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즉 "신"과 "무"사이의 중간자는 최상의 완전한 관념을 자신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배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관념은 어디에서 인간에게 출현하는가? 그것은 그에게 최상의 완전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심어질 수 있다고 그는 대답한다. 이것만이 최상 관념의 창시자일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인간내의 신관념의 근원인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인간에게 역시 근본적으로 비진리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신은 결코 기만자가 아니라 순수 진리임이 틀림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되고 이제껏 그가 가져왔던 극단적인 회의들은 제거가 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의 진리성과 현존(외부세계)에 대한 확실성이 다시 얻어지듯이, 한 순간 자기 의식의 위태로운 고독을 통찰한 인간은 다시 은폐된 창조 질서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는 신존재 증명을, 인간이 최상의 완전한 관념을 자기 스스로에서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같은 유한한 존재는 당연히 무한의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어떠한 원인(신)에는 적어도 그 원인에 의해 야기된 만큼의 존재(외부세계 - 인간)가 부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데카르트가 자신의 신에 대한 증명을 실제로 자기 자신한테서 도출되는 그러한 원리에 기초했다면, 이러한 증명은 실제로 밑도 끝도 없는 순환논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해결을 위한 한계에까지 갈 것을 감행하기도 하고, 반대로 스스로를 숨기기도 하면서, 신에게 근거지어진 확실성에서 보여지는 가능성에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파괴된 형이상학을 새로 건립했으며, 창조자에 대한 상실된 지식을 재보존하는 데 정열적으로 노력했다. 동시에 근본적으로 자기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신의 확실성이 인간에게도 귀속된다는 신념을 얻게된 것이다.
9. 결론
데카르트가 죽은 뒤, 경건한 가톨릭교도였던 클레르슬리에가 유고를 입수하여 선별 간행함으로써 데카르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윤색작업은 교부 아드리앵 바예가 1691년 방대한 데카르트 전기를 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말 그리스도교 교리를 지지하는 데 주된 관심을 쏟은 로마 가톨릭교 옹호론자였는지, 아니면 결정론적·기계론적·유물론적 물리학을 확립하면서도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보호한 무신론자였는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클레르슬리에와 바예가 이용한 데카르트의 많은 원고들이 현재로선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667년 데카르트의 유골이 파리 주느비에브뒤몽 성당에 안치되던 바로 그날에 그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데카르트 생전에 줄곧 그를 예수회회원이자 교황예찬론자 즉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1930경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요관심이 형이상학적 종교에 있었다고 믿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가 태생이나 정치면에서 프랑스인이자 왕정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가톨릭교도였다고 믿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 참고자료
존 코팅엄, 데카르트, 궁리필로소피
데카르트, 방법서설 성찰 외, 삼성출판사
에드문트 후설 외, 데카르트적 성찰,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