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Russian Revolution〔2월혁명〕
☉ 2월의 혁명이 자생적으로 터지다.
☉ 정부편의 반응이 없는 데에 고무되어 파업과 시위가 확대되었다.
☉ 2월 20일 결정적인 날
☉ 3월 2일의 타협
☉ 한 세계의 종말
☉ 2월의 혁명이 자생적으로 터지다.
☉ 정부편의 반응이 없는 데에 고무되어 파업과 시위가 확대되었다.
☉ 2월 20일 결정적인 날
☉ 3월 2일의 타협
☉ 한 세계의 종말
본문내용
은 경찰을 쫓아 린치를 가하였다. 다른 상점들도 파괴하였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동상으로부터 잘라 내린 알렉산드르 2세의 돌로 된 거대한 머리 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서민들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차르에게 붙인 ‘하마’라는 별명을 누군가가 알렉산드르 3세의 기마상 받침돌 위에 써놓았다.
혁명의 대지도자 중 누구도 ‘영광의 5일’ 동안 페트로그라드에 있지 않았다. 모두가 망명중이었다. 그러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도자들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하는 감당하기 힘겨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05년 혁명이 유일한 선례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지표였으므로 사람들은 1905년에 그랬던 것처럼, 우선 연방 지도자 조직인 ‘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2월 27일 오후에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볼셰비키, 노동당 등을 아우르는 여러 혁명적 당파의 투사 50여 명은 두마의 의사당으로 사용되던토리드궁의 12번 회의실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임시위원회가 최우선으로 선결해야 할 문제는 질서 회복, 특히 반란병들을 그들의 막사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소비에트와 협상을 해야만 했다. 협상의 결과 기본법안이 나왔는데, 이 법안은 1917년 한 해동안 군대의 규율을 침식시키게 된다. ‘군인의 권리 헌장’이라 할 수 있는 ‘명령 제1호’는 구체제의 가장 가혹한 군사적 규칙들을 폐지하고 시민으로서의 군인인 ‘ 병사위원회’로 조직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장교들과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을 격화시켰다.
페트로그
라드의 소비에트(왼)는 의회보다 토론회 에 더 자주 참석하였다. 그곳에는 의사일정도, 속기록도, 그 어떤 절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마의 의장인 로드쟌코가 군중에게 연설하고 있다(오른)
3월 2일의 타협
소란이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두마의 위원회와 권력의 집행을 요구하지 않는 소비에트 사이에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긴 거래 끝에 3월 2일 아침에 양측은 마침내 합의
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는 ‘헌법 제정위원회’의 소집을 기대하였어도, 한편으로는 구성원 대부분이 자유주의자로 이루어지며 입헌민주당의 대표들이 지배하는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에트의 인정은 조건적인 것이었다. 소비에트가 정부를 인정하는 조건은, 정부가 기본적 자유와 보통선거를 표방한 민주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계급,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며 경찰을 폐지하여 민병으로 대치하고 시민으로서의 병사의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사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1917년의 정치적 투쟁의 목적과 전쟁의 평화의 선택문제 그리고 영토의 문제였다.
임시정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 두 개의 권력
1917년 3월 2일의 타협은 ‘두 개의 권력’, 즉 정당성과 러시아 사회의 미래라는 분쟁으로 가득 찬 두 개의 다른 개념 사이의 공존을 탄생시켰다. 한편으로 임시정부의 세력은 질서를 추구하는 정권으로서, 그 논리는 의회주의였으며 그 목표는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자본주의적 러시아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세력은 그들이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더욱 직선적이고 ‘혁명적’인 권력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 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탈중심적이고 단초적인 자기 자신의 구조의 친화에 따라, 그리고 변덕스러운 여론의 변화에 따라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역동적인 세력이었다.
3월2일 형성된 첫 번째 임시정부는 게오르기 리보프 공이 그 수반이 되었으며 입헌민주당 다수의 유력한 대표들에게 둘러싸였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간에 타협을 이끌어 낸 주요 장본인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중요 대표 중 유일하게 각료 자리를 수락하여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연사로서의 재능과 정치적 각축장에서 그가 취하고 있는 좌파의 위치로 인하여 이미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과 탈중심화와 지방정부의 이점에 대한 깊은 신뢰라는 두 가지 생각 위에 자신의 민주적 신념을 건설했다. 친프랑스적이었던 그는 명함을 프랑스어로 작성했다. ‘러시아 정부 수반 게오르기 리보프 공’ (왼)
한 세계의 종말
3월 2일의 타협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수뇌부의 태도의 불확실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깊이 낙담하고 힘이 빠진 니콜라이 2세는 거듭하여 서로 모순되는 명령들을 내리고 있었다.
2월 27일 반란이 수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그는 페트로그라드 군사 관할 지역의 사령관인 카발로프를 사직시키고 이바노프로 대체하였다. 차르는 이바노프에게 “반란을 종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차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차르스코예 셀로의 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철도원은 황실 기차의 방향을 프스코프로 돌렸다. 차르는 3월1일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그곳에 도착한 후, 반란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제 수뇌부의 태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알렉세예브 장군은 소비에트가 아닌 두마가 지배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자, 최고 사령부 전체의 지지를 받아 니콜라이 2세에게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왕조를 구하기 위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였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차르의 아들 알렉시우스는 오래 살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차르는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하였다.
왕권을 또 다른 로마노프 왕가 사람에게 양위하였다는 소식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센 반대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병사와 노동자의 시위대 무리는 즉시 토리드궁으로 달려가 “공화국 만세!”,“로마노프 왕조는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임시정부의 각료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여 미하일 대공이 왕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7년 3월 3일 18시 대공은 양위증서에 서명을 하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소식에 나라의 모든 도시에서는 환희에 찬 시위
혁명의 대지도자 중 누구도 ‘영광의 5일’ 동안 페트로그라드에 있지 않았다. 모두가 망명중이었다. 그러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도자들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하는 감당하기 힘겨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05년 혁명이 유일한 선례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지표였으므로 사람들은 1905년에 그랬던 것처럼, 우선 연방 지도자 조직인 ‘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2월 27일 오후에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볼셰비키, 노동당 등을 아우르는 여러 혁명적 당파의 투사 50여 명은 두마의 의사당으로 사용되던토리드궁의 12번 회의실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임시위원회가 최우선으로 선결해야 할 문제는 질서 회복, 특히 반란병들을 그들의 막사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소비에트와 협상을 해야만 했다. 협상의 결과 기본법안이 나왔는데, 이 법안은 1917년 한 해동안 군대의 규율을 침식시키게 된다. ‘군인의 권리 헌장’이라 할 수 있는 ‘명령 제1호’는 구체제의 가장 가혹한 군사적 규칙들을 폐지하고 시민으로서의 군인인 ‘ 병사위원회’로 조직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장교들과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을 격화시켰다.
페트로그
라드의 소비에트(왼)는 의회보다 토론회 에 더 자주 참석하였다. 그곳에는 의사일정도, 속기록도, 그 어떤 절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마의 의장인 로드쟌코가 군중에게 연설하고 있다(오른)
3월 2일의 타협
소란이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두마의 위원회와 권력의 집행을 요구하지 않는 소비에트 사이에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긴 거래 끝에 3월 2일 아침에 양측은 마침내 합의
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는 ‘헌법 제정위원회’의 소집을 기대하였어도, 한편으로는 구성원 대부분이 자유주의자로 이루어지며 입헌민주당의 대표들이 지배하는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에트의 인정은 조건적인 것이었다. 소비에트가 정부를 인정하는 조건은, 정부가 기본적 자유와 보통선거를 표방한 민주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계급,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며 경찰을 폐지하여 민병으로 대치하고 시민으로서의 병사의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사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1917년의 정치적 투쟁의 목적과 전쟁의 평화의 선택문제 그리고 영토의 문제였다.
임시정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 두 개의 권력
1917년 3월 2일의 타협은 ‘두 개의 권력’, 즉 정당성과 러시아 사회의 미래라는 분쟁으로 가득 찬 두 개의 다른 개념 사이의 공존을 탄생시켰다. 한편으로 임시정부의 세력은 질서를 추구하는 정권으로서, 그 논리는 의회주의였으며 그 목표는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자본주의적 러시아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세력은 그들이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더욱 직선적이고 ‘혁명적’인 권력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 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탈중심적이고 단초적인 자기 자신의 구조의 친화에 따라, 그리고 변덕스러운 여론의 변화에 따라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역동적인 세력이었다.
3월2일 형성된 첫 번째 임시정부는 게오르기 리보프 공이 그 수반이 되었으며 입헌민주당 다수의 유력한 대표들에게 둘러싸였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간에 타협을 이끌어 낸 주요 장본인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중요 대표 중 유일하게 각료 자리를 수락하여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연사로서의 재능과 정치적 각축장에서 그가 취하고 있는 좌파의 위치로 인하여 이미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과 탈중심화와 지방정부의 이점에 대한 깊은 신뢰라는 두 가지 생각 위에 자신의 민주적 신념을 건설했다. 친프랑스적이었던 그는 명함을 프랑스어로 작성했다. ‘러시아 정부 수반 게오르기 리보프 공’ (왼)
한 세계의 종말
3월 2일의 타협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수뇌부의 태도의 불확실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깊이 낙담하고 힘이 빠진 니콜라이 2세는 거듭하여 서로 모순되는 명령들을 내리고 있었다.
2월 27일 반란이 수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그는 페트로그라드 군사 관할 지역의 사령관인 카발로프를 사직시키고 이바노프로 대체하였다. 차르는 이바노프에게 “반란을 종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차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차르스코예 셀로의 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철도원은 황실 기차의 방향을 프스코프로 돌렸다. 차르는 3월1일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그곳에 도착한 후, 반란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제 수뇌부의 태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알렉세예브 장군은 소비에트가 아닌 두마가 지배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자, 최고 사령부 전체의 지지를 받아 니콜라이 2세에게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왕조를 구하기 위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였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차르의 아들 알렉시우스는 오래 살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차르는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하였다.
왕권을 또 다른 로마노프 왕가 사람에게 양위하였다는 소식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센 반대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병사와 노동자의 시위대 무리는 즉시 토리드궁으로 달려가 “공화국 만세!”,“로마노프 왕조는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임시정부의 각료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여 미하일 대공이 왕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7년 3월 3일 18시 대공은 양위증서에 서명을 하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소식에 나라의 모든 도시에서는 환희에 찬 시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