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항(위항)인문학론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시대 여항(위항)인문학론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시대적 배경(여항 시인의 등장)

Ⅱ. 본론
1. 여항 문학의 정의
2. 여항 문학의 갈래
3. 여항 문학의 활동
1) 시사(모임)의 조직
2) 공동시집의 발간
3) 공동전기 발간
4. 여항 시조 시인
1) 남파 김천택
(1) 김천택 생애
(2) 김천택 작품 감상
(3) 김천택 시조의 특징
2) 자평 김수장
(1) 김수장 생애
(2) 김수장 작품감상
(3) 김수장 시조의 특징
3) 운애 박효관
(1) 박효관 생애
(2) 박효관 작품 감상
(3) 박효관 시조의 특징
4) 주옹 안민영
(1) 안민영 생애
(2) 안민영 작품감상 <매화사>
(3) 안민영 시조의 특징

Ⅲ. 결론 - 문학사적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欄)의 풍류재사(風流才士)나 야유사녀(冶遊士女)들도 그의 이름과 자를 부르지 않고 박선생이라 불렀다. 박효관은 가곡창(歌曲唱)의 대가시조의 작가풍류인(風流人)가곡원류의 공편자로서 문학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876년(고종 13)에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그때까지의 가곡을 30곡조로 나누어 연음표(連音標)를 붙여서 총정리하고, 또한 가인(歌人)의 귀감이 될 가론(歌論)을 확립하였다는 점이다.
(2) 박효관 작품감상
(원문) 님 그린 상사몽(想思夢)이 실솔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 볼까 하노라.
(해석) 임을 그리워하다 꿈에 실솔(귀뚜라미의 한자말)의 넋이 되어
길고 긴 가을 깊은 밤에 임의 방에 들어갔다가
날 잊고 깊이 잠든 임을 깨워 볼까 하노라
화자는 임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상사병까지 들게 될 정도처럼 느껴진다. 임을 생각하다가 지쳐 잠이 들고, 그 꿈에 귀뚜라미의 넋이 되어서 \'나\'를 잊고 편안 잠을 자고 있는 임의 방에 들어 임을 깨우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은 임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3) 박효관 시조의 특징
〈가곡원류〉에 남아 있는 그의 시조는 모두 평시조 15작품이다. 사설시조를 하나도 짓지 않은 것은 \'정음지향적 시가관\'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고종의 등극이나 장수(長壽)를 노래한 송축류(頌祝類), 효와 충의 윤리가 무너지는 세태에 대한 경계, 애정과 풍류, 인생무상, 별리의 슬픔 등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사랑과 이별의 노래들은 표현력이 아주 뛰어나다.
4) 주옹(周翁) 안민영
(1) 안민영 생애
안민영에 대한 자료가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대부가 아니었던 그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작품 금옥총부나 여기저기 자료를 통하여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금옥총부에 의하면 그는 1816년 순조 16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으며 고종 22년까지 그의 작품 활동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70세 이상까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광주 사람으로 대원군으로부터 구포동인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그리고 시조계 문학사상 개인가집 금옥총부를 남겨 근대 조선 최후의 시조계를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는 총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그가 태어나서 그의 스승 운애 박효관을 만나기 전까지의 시기 즉 24살까지의 시기이다. 그의 어린시절 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래서 어떠한 유년기를 보냈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 시대적 상황을 짐작해 봄으로써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측해볼 수는 있다. 그의 유년기는 많은 시련, 고난이었다. 그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는 곧 삼정의 물란을 가져와 농민들은 당연히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화전민이나 소작농으로 몰락하였으며 또는 수적이나 산적 등 도적이 되어 민심이 극도로 어지러웠다. 사회는 계속 불안하여 청주에서는 정부를 저주하는 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겹쳐 물난리로 많은 사람이 죽는가 하면 질병이 돌아 역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 심한 병충해가 돌기도 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천도교가 하층민을 중심으로 확산되다가 급기야는 천도교 박해 사건인 기해사옥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주옹은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자랐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그는 명문사대부가 아닌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에 대한 회의나 좌절감으로 인하여 그가 가객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기>는 24세부터 대원군이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의 나이 25~48세의 기간으로, 안민영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은 운애 박효관과 대원군을 들 수 있다. 박효관을 만나 그의 인생의 나침반을 정했다면 대원군은 그의 인생을 꽃피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호남기행을 시작하여 37세 때는 영남기행을 마치고 문경의 조령을 넘어오는 사이에는 다시 10년이 47세에는 강원도를 순방하였는데, 결국 그 시기에 안민영은 전국을 유랑하면서 여러 당대 가각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불분명한 점은 운애 박효관이 안민영의 유람에 함께 했다는 자료가 없어서 박효관은 서울에 있고 안민영만 전국을 유람했는지에 대한 의심이 간다. 그리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살았던 대원군과의 만남도 이때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3기>는 고종 즉위 원년부터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는 10년간의 시기로, 대원군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창작에 몰두한 때이다. 안민영의 작품은 50세 이후에 지어진 것이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여 진다. <매화사> 8수를 지었으며 대원군과 우석상서에게 자기의 회갑연을 성대히 받았고 또한 박효관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했으며 자기 시조집인 [금옥총부]의 원본을 수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부인과 이별하고 병인 난으로 인해 피난살이를 경험했으며 대원군의 축출과 함께 자기의 가객 인생도 생기를 잃어 쓸쓸함을 느끼고 동지들 또한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와중에서도 이 기간 중에 평안도를 유람하기도 했는데, 결국 안민영에게 있어 이 시기는 다사다난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4기>는 대원군이 하야하고 나서 그 이후로의 시기인데, 이 기간은 66세 이후의 노년기로써 다가오는 죽음과 지나간 삶에 대한 반성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도 소량이나마 작품을 썼고 금옥총부의 보완 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걸 보면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의 생의 정리를 했던 기간으로 보여 진다.
(2) 안민영 작품감상 매화사(梅花詞)
梅影(매영)이 부드친 窓예 玉人金(옥인금차) 비겨신져 [1]
二三(이삼) 白髮翁(백발옹)은 거문고와 노로다
이윽고 盞(잔) 잡아 勸(권)헐
  • 가격1,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03.24
  • 저작시기2008.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712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