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1) 민족 개념의 출현
2) 중국 지식인의 역사인식
3) 반종교 운동
4) 비밀결사
5) 봉건(封建)
6) 연성자치운동(聯省自治運動)
2. 일본 동양학의 구조
1) 동양학의 탄생
2) 일본 기원설의 형성
3) 유교의 정의와 중국의 분리
4) 일본역사의 우월성 증명
5) 동양학 담론의 발전
6) 실용적 동양학의 연구
Ⅲ. 결론.
Ⅱ. 본론.
1.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1) 민족 개념의 출현
2) 중국 지식인의 역사인식
3) 반종교 운동
4) 비밀결사
5) 봉건(封建)
6) 연성자치운동(聯省自治運動)
2. 일본 동양학의 구조
1) 동양학의 탄생
2) 일본 기원설의 형성
3) 유교의 정의와 중국의 분리
4) 일본역사의 우월성 증명
5) 동양학 담론의 발전
6) 실용적 동양학의 연구
Ⅲ. 결론.
본문내용
을 조직화하기 위해 아세아학회(亞細亞學會)를 탄생시켰다. 이를 통해서 그는 연구회의 개개인에게 연구를 조직적으로 세분화하여 주제를 할당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이고 동양사 연구에 있어 주류를 형성하는 하나의 계보를 구축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역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동양문고가 설립됨으로써 비로소 동양문제를 유럽과 대등한 수준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동양의 연구는 시라토리로 하여금 남만주의 경제적 관리와 한국의 효과적 보호를 위해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했는데 이때 포츠머스 조약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 러일전쟁의 발발로 열강들의 조정·강화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결국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렸다. 주요내용을 보면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의 승인, ② 여순·대련(大連)의 조차권 승인, 장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③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④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것 등이다.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으로 일본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게 되었고, 회사 설립 후 일년도 체 되지 않아 회사내에 조사부를 설립하여 ‘문화로 무장한 군사적 준비’ 정책에 필요한 객관적 지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만주를 경영하는데 있어 정책 결정의 근거로 삼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만철과 시라토리의 필요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작품으로 만철조사부를 통해 수집 연구된 지리적 자료들은 일본이 만선(滿鮮)을 이해하는데 좋은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개념과 이해는 일본의 대외정책에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된다. 학자들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에 만주와 조선에 대해 중립지대론에 의거하여 진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 했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타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역사연구는 근본적으로 정책의 세부 계획에는 쓰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큰 구도에 관하여 방향과 예측을 할 수 있을 뿐이므로 역사 연구가 만철조사부와 같이 개발지의 착취와 개발에 직접 도움이 되는 문제로 관심이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 연구이던 순수한 연구이던 양쪽 모두 민족과 국민국가의 구분에 의거했으며 그 안에서 동양문화의 중심지를 일본으로 보는 입장은 같았다. 최소한 일본을 식민지 열강과 같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관해서도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지도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의 동양학에 대한 비판은 근본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발전시켜 다음 단계에 도달하게 하는 목적을 띄고 진행된 비판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담론에서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로 구체화된 그들의 ‘지나’는 이제 일본에게는 필요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일본이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는 ‘지나’의 목소리는 배격 되었으며 오로지 일본이 요구하는 행로를 걷도록 중국은 요구 당하게 되었다.
Ⅲ. 결론
이상으로 중국과 일본의 근대 역사의 발전 모습을 주요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 계층은 모두 서구 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역사학과 사회진화론적 시각을 받아 들였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사를 이해했다. 특히 중국의 양계초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일이나, 일본의 학자들이 동남아시아나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일본사와 비교하는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시각은 결코 자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세계사를 정립하려는 노력은 근본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국민국가의 틀에 맞도록 중국의 많은 역사 발전의 표상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사라지거나 의미가 왜곡되었고 일본의 경우 서구적 시각에서 열등한 민족인 일본을 그들과 대등한 자리에 놓기 위해 오히려 서구의 인식에 기반한 역사학을 전개 했던 것에서 그 실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규정하느냐 규정되어지느냐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분명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은 이미 서양의 물질문명에 자신의 모습을 잃었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재조명 해보려는 힘든 싸움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전통적 개념들이 전유되거나 사라졌고, 일본은 조금씩 자국이 동양의 지도자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식민지 진행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식과, 비교적 성공적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열등국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국가적인 배경의 차이일 뿐 두 나라 모두 세계사 속에서 서구 역사에 대한 벽에 부딪히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가지 주제를 동시에 다루면서 주된 관점으로 삼은 것은 일본과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서구의 민족과 국민국가, 사회진화론,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개념들에 어떻게 자신을 위치 시켜가는 가였다. 중국은 다양한 역사발전의 양태와 요인을 고려하는데 실패했고 많은 전통적 표상들을 스스로 잃었다. 나름대로 많은 역사적 자료에 관한 고찰과 치밀한 연구를 한 일본의 경우도 처음 서구와 일본을 구분 지을 때는 역사의 다양한 발전 측면을 내세우는 것 같았으나, 이내 일본사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아시아의 타국들의 역사는 정체로 밖에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본의 역사도 발전이라는 틀 속에서 진보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모순이나 오류들은 두아라가 지적한 것과 같이 역사의 단선론적인 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프라센지트 두아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서울 : 삼인, 2004
스테판 다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서울 : 문학과 지성사, 2004
으로 일본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게 되었고, 회사 설립 후 일년도 체 되지 않아 회사내에 조사부를 설립하여 ‘문화로 무장한 군사적 준비’ 정책에 필요한 객관적 지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만주를 경영하는데 있어 정책 결정의 근거로 삼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만철과 시라토리의 필요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작품으로 만철조사부를 통해 수집 연구된 지리적 자료들은 일본이 만선(滿鮮)을 이해하는데 좋은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개념과 이해는 일본의 대외정책에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된다. 학자들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에 만주와 조선에 대해 중립지대론에 의거하여 진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 했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타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역사연구는 근본적으로 정책의 세부 계획에는 쓰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큰 구도에 관하여 방향과 예측을 할 수 있을 뿐이므로 역사 연구가 만철조사부와 같이 개발지의 착취와 개발에 직접 도움이 되는 문제로 관심이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 연구이던 순수한 연구이던 양쪽 모두 민족과 국민국가의 구분에 의거했으며 그 안에서 동양문화의 중심지를 일본으로 보는 입장은 같았다. 최소한 일본을 식민지 열강과 같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관해서도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지도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의 동양학에 대한 비판은 근본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발전시켜 다음 단계에 도달하게 하는 목적을 띄고 진행된 비판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담론에서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로 구체화된 그들의 ‘지나’는 이제 일본에게는 필요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일본이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는 ‘지나’의 목소리는 배격 되었으며 오로지 일본이 요구하는 행로를 걷도록 중국은 요구 당하게 되었다.
Ⅲ. 결론
이상으로 중국과 일본의 근대 역사의 발전 모습을 주요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 계층은 모두 서구 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역사학과 사회진화론적 시각을 받아 들였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사를 이해했다. 특히 중국의 양계초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일이나, 일본의 학자들이 동남아시아나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일본사와 비교하는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시각은 결코 자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세계사를 정립하려는 노력은 근본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국민국가의 틀에 맞도록 중국의 많은 역사 발전의 표상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사라지거나 의미가 왜곡되었고 일본의 경우 서구적 시각에서 열등한 민족인 일본을 그들과 대등한 자리에 놓기 위해 오히려 서구의 인식에 기반한 역사학을 전개 했던 것에서 그 실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규정하느냐 규정되어지느냐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분명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은 이미 서양의 물질문명에 자신의 모습을 잃었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재조명 해보려는 힘든 싸움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전통적 개념들이 전유되거나 사라졌고, 일본은 조금씩 자국이 동양의 지도자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식민지 진행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식과, 비교적 성공적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열등국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국가적인 배경의 차이일 뿐 두 나라 모두 세계사 속에서 서구 역사에 대한 벽에 부딪히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가지 주제를 동시에 다루면서 주된 관점으로 삼은 것은 일본과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서구의 민족과 국민국가, 사회진화론,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개념들에 어떻게 자신을 위치 시켜가는 가였다. 중국은 다양한 역사발전의 양태와 요인을 고려하는데 실패했고 많은 전통적 표상들을 스스로 잃었다. 나름대로 많은 역사적 자료에 관한 고찰과 치밀한 연구를 한 일본의 경우도 처음 서구와 일본을 구분 지을 때는 역사의 다양한 발전 측면을 내세우는 것 같았으나, 이내 일본사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아시아의 타국들의 역사는 정체로 밖에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본의 역사도 발전이라는 틀 속에서 진보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모순이나 오류들은 두아라가 지적한 것과 같이 역사의 단선론적인 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프라센지트 두아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서울 : 삼인, 2004
스테판 다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서울 : 문학과 지성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