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빠띠스따 혁명과 멕시코의 정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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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빠띠스따 혁명과 멕시코의 정치경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 신자유주의의 중남미 도입

2. 치아빠스 : 축복받은 땅과 저주받은 농민.

3. 부사령관 마르꼬스 : 혁명의 선봉자

4. 사빠띠스따의 전개 : 야 빠스따!(Ya Basta!, 이제 그만)

5. 멕시코 혁명과 사빠띠스따 : 비교 연구
(1) 멕시코 혁명
(2) 사빠띠스따
(3) 비교

6. 사빠띠스따의 특징
(1) 반(反 ) 신자유주의
(2) 인종 = 계급
(3) 사회혁명
(4) 많은 여성들의 참여
(5) 사이버스페이스의 활용과 풀뿌리 활동가들의 참여

7. 멕시코의 구조적 모순 : 봉기의 근본적 원인

8. 결론 ; 사빠띠스따가 끼친 영향과 현재의 멕시코

※ 참고 문헌

본문내용

17. 독재자 뽀르삐리오 디아스의 30년 독재에 항거에 일어남.
당시 남부 주를 대표하던 ‘에밀리아노 사빠따’라는 인물의 정신을 계승해서 만든 것이었다. 멕시코 혁명 당시 사망한 사빠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마르꼬스가 부사령관의 지위를 맡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스는 2001년의 평화대행진에서 사빠따를 최고 사령관으로 예우하는 한 통의 편지를 읽기도 했다. 이는 82년 전 사망한 사빠따가 보내온 편지였는데, “이 형제자매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려는 의지가 아주 높았습니다. 그들은 비천한 제게 경의를 표하면서, ‘사빠띠스따’라고 이름을 짓고 군대를 만들었답니다. (...)자유! 민주주의! 정의! 그것이 실현될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말입니다.” 송기도,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개마고원,2003, p.138)
라는 내용이었다.
EZLN이 봉기하기 전에 차이빠스에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무장 게릴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마르꼬스는 40대 초반의 나이로 북부 땁삐꼬의 한 가구상의 아들이며,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 지식인으로 알려진다. 그는 모택동주의 추종자들인 좌익세력 ‘인민정치운동’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983년 북부에서 파견된 여단의 일원으로 치아빠스에 왔으며 마야의 첼딸레스 족과 생활하면서 군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12명으로 구성된 이 여단은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스페인어와 무기사용법을 가르치고 다른 농민들과 연합하여 목장들의 폭력에 대항하면서 사빠띠스따 군대의 모체를 이룬다.
마르꼬스가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항상 스키마스크로 복면을 하고 다니며,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자신들의 활동과 목적에 대해 알리고 있는 반면,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투쟁이 전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말을 통해서 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혁명과 다른 모습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듯이 마르꼬스는 전쟁을 불이라고 표현 하고 그에 반대해 말을 표현함으로써『불과 말 : 요청할 때가 있고 촉구할 때가 있으며, 직접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르꼬스,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생각의 나무, 2004, pp.21~81)
라는 글과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Our word is our war)』 해냄출판사, 2002
라는 책도 쓴 바 있다.
마르꼬스는 EZLN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모르고 그에 따라 농민과 원주민들의 의견을 표출하기가 어려워 이들을 대신해서 많은 글들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로 인해 마르꼬스 자신과 EZLN에 대해 더욱 더 많은 관심을 전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끌 수 있는 요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4. 사빠띠스따의 전개 : 야 빠스따!(Ya Basta!, 이제 그만) NAFTA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멕시코 원주민들의 절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초라하며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노를 표현한 것.
사빠띠스따들은 “야 빠스따!”라는 말과 함께 1994년 봉기하였다. 이들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1월 1일: 새해 첫날에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Chiapas)에서 원주민들이 주축이 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 이하 사빠띠스따)이 봉기하였다. 사빠띠스따들은 새해 첫날에 치아빠스 주의 문화중심지인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를 비롯한 알따미라노(Altamirano) 라스 마르가리따스(Las Margaritas), 오꼬싱고(Ocosingo), 옥스축(Oxchuc), 우익스딴(Huixtan) 그리고 차날(Chanal) 등의 도시 및 500여 마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사빠띠스따들은 라깐도나 밀림 1차 선언문(la Declaracion de la Selva Lacandona), 이제 그만!(ya basta!)을 발표하며, 살라나스 고르따리 정부에 대하여 민주주의, 자유, 정의를 위한 모든 멕시코인들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후 연방군이 투입되면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를 비롯한 지역에서 연방군과 사빠띠스따들 사이에 총격전이 빈번해졌고, 연방군은 1월 5일부터 공중폭격을 감행하였다.
- 1월 6일: 살리나스 대통령은 봉기이후 처음으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여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것과 대화를 제의. 한편으로 사빠띠스따는 연방정부와의 대화 전제조건으로 사빠띠스타의 인정, 휴전, 연방군 퇴각, 무차별 공중폭격 중단, 국가중재위원회 구성을 제안하였다.
- 6월 12일: 사빠띠스따는 정부의 기존 제안에 거부를 하고, 대신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사빠띠스타는 2차선언문을 통해 평화로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민주주의 국민회의(la Convencion Nacional Democracia)를 구성할 것을 다양한 영역의 단체에 촉구하였다.
- 8월5-9일: 산 끄리스또발에서 처음으로 사빠띠스따가 소집한 민주주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에서 보인 약 7천명의 멕시코인, 수백명의 국제 감시단 및 언론인들이 모였다. 그리고 같은 달 21일에는 연방 및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제도혁명당의 후보가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이와 함께 점차 양자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 10월 8-12일: 산 끄리스또빨에서 두 번째 민주주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고, 사빠띠스따는 평화적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위한 정부의 무성의에 대하여 비판.
- 12월 1일: 에르네스또 세디요 대통령 취임
1995년
- 1월 1일: 사빠띠스따는 자유를 향한 국민운동을 촉구하는 제 3차 선언문 발표
- 2월 9일: 세디요 대통령은 사빠띠스따 지도부의 신원확인과 함께 검거를 명령하였다. 이에 멕시코 전역에서 사빠띠스따와 지지자들이 검거되었고, 연방군 및 농장주의 사병들은 사빠띠스따를 지원하는 라깐도나 밀림의 원주민 마을들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재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약 3만명의 원주민들이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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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06
  • 저작시기2008.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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