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1949년 이전의 경제 발전
(2) 1950년대의 경제 발전
(3)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이후
(4) 1970년대와 모택동의 유산
(5) 1980년대 이후의 개혁, 개방
(2) 1950년대의 경제 발전
(3)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이후
(4) 1970년대와 모택동의 유산
(5) 1980년대 이후의 개혁, 개방
본문내용
결정적으로 파괴될 정도는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간접적 증거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평균적 연도라 할 수 있는 1923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이 당시 총수입의 50% 정도가 국내 수공업 제품과 잠재적인 경쟁적 관계에 있었으며, 이중의 60% 정도는 위에서 언급한 면제품이고, 나머지 품목 중에서 제일 큰 항목이 염색료 등 유사 화학제품인데, 이들이 실질적으로 국산품과 경쟁적 대체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큰 항목이 담배류인데, 이 시기 국내 담배생산은 일정의 성장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결국, 1930년대에 총수입은 GDP의 2~3%에 불과했고, 이 중에서 수입경쟁적인 품목의 비중은 면제품을 제외할 때 GDP의 0.5%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이 당시 수공업의 GDP 비중이 10%를 상회했음을 고려할 때 그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국내 근대적 부문의 크기와 분포로 볼 때, 비슷한 추론으로, 국내 근대적 부문이 국내 전통적 수공업에 미친 영향도 결정적으로 파괴적이지는 않았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위의 사실들에 기초하여, 전전 시기 중국의 전통부문이 꾸준히 지속, 성장해 왔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2) 1950년대의 경제 발전
일반적으로 1950년대는 중국의 전후 경제발전의 황금기로서 중국경제가 이전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환골탈태를 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시기 경제성장률이 여러 다른 연도의 가격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연평균 7%에 이르는 고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57년의 일인당 GDP는 1957년 가격으로 평가한 1933년 일인당 GDP의 20%가 겨우 증가한 수준이고, 이는 미국달러로 평가하면 60달러에서 70~80달러 수준으로의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민의 경제생활을 환골탈태할 정도로 바꿀 만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경제적 변화의 주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투자의 비약적 증대와 이에 따른 물적 및 인적 자본 축적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GDP 대비 투자율은 1952년 가격으로 평가할 때 1930년대 초반의 7.5%에서 1950년대 초반에는 24%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 시기의 투자의 중점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자본 형성이었다. 전후 복구기에 만주지역은 총 투자의 약 25%를 유치하며, 1952년에는 이미 일제치하의 생산수준을 초과하고, 중국 전체 공업생산의 약 40%를 담당하였다. 이 당시의 물적자본 형성에 있어서 소련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업투자의 약 반 정도가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기자재 이거나 소련설비의 공장시설을 지원하는 용도의 국내 프로젝트였다.
한편, 장기적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물적자본 형성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인적자본 형성이었다. 이 시기에 소위 중점대학과 연구소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며, 기술 및 직업훈련 학교들이 적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인적자본의 형성에 있어서도 소련의 역할은 지대했다. 경제를 운영해 나갈 숙련노동력이 소련의 경험을 지침으로 삼아 육성되었으며, 1950년과 1960년 사이에 약 38,000명의 과학자, 기술자 및 노동자가 소련에서 교육받았고, 약 11,000명의 소련인력이 중국에서 일했다.
소련의 역할의 또 다른 측면은 ‘발전모델’의 제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성공한 사회주의 공업화모델로서 소련의 존재는 중국으로 하여금 적절한 발전모델의 모색와 관련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중앙집권적 계획의 우수성으로 돌리는 것은 일면적 파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 계획이 일관되게 진전되었고 그 포괄범위가 확대되어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적 및 물적 자본형성을 위한 투자와 전문인력의 동원도 일관되게 진전되었으며, 경제성장의 보다 중요한 공헌자는 전자보다는 후자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시기 중국의 경제체제는 계획경제라기보다는 혼합경제였으며, 계획기구의 미완과 행정능력 부족으로 포괄적인 중앙집권적 계획의 수립과 집행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중앙집권적 계획은 선별된 소수의 대규모 프로젝트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경제의 나머지 부분은 중앙의 통제 밖에서 자유를 누렸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이 당시 소련인 및 소련에서 훈련받은 전문인력의 대규모 중요 프로젝트에의 집중배치, 그리고,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유연한 자율성 허용은 최적의 선택이었으며, 이것이 급속한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5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인적, 물적 자본의 형성과, 미래의 성장을 위한 건전한 기반 구축이라고 볼 수 있다. 성장기반 구축과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것은 바로 중국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건강과 교육수준의 향상이다. 이는 농촌의 집단화와 이를 이용한 지역자립적인 공공서비스 제도의 구축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이 체제의 구축으로, 1975년에 이르러서는 농촌인구의 85%에게 기본적인 의료보장이 제공되었으며, 1억 2,100만 아동에게 초등교육이 제공되었다.
(3)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이후
대약진운동은 극심한 갈등과 혼란기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과도하게 자원(특히 인적자원)을 공업에 집중함으로써 산업간 특히 농공간 균형을 파괴하고 농업생산기반을 와해시켰다. 물론, 이 시기 가뭄 등 자연재해도 있었으나 농업생산의 급감과 기근 등의 주원인은 아니었다. 이는 중앙의 정책 결정자들이 과도하게 스탈린식으로 단기간에 중공업 기반구축을 추구함과 아울러 1957년에 추진한 부적절한 지방분권화에도 그 원인이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고이윤셩의 공업과 저이윤의 농업이라는 농공 차별구도하에서 지방 경제행위에 대한 자율권 허용은 지방정부들로 하여금 경제적 자원을 농업으로부터 최대한 공업으로 돌리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즉, 분권화가 당시 중국경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불안정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농업생산격감과 기근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하여, 사천과 귀주에서는 1960년에 인구의 5%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 초반의 중국경제 기본 성격은 대
위의 사실들에 기초하여, 전전 시기 중국의 전통부문이 꾸준히 지속, 성장해 왔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2) 1950년대의 경제 발전
일반적으로 1950년대는 중국의 전후 경제발전의 황금기로서 중국경제가 이전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환골탈태를 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시기 경제성장률이 여러 다른 연도의 가격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연평균 7%에 이르는 고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57년의 일인당 GDP는 1957년 가격으로 평가한 1933년 일인당 GDP의 20%가 겨우 증가한 수준이고, 이는 미국달러로 평가하면 60달러에서 70~80달러 수준으로의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민의 경제생활을 환골탈태할 정도로 바꿀 만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경제적 변화의 주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투자의 비약적 증대와 이에 따른 물적 및 인적 자본 축적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GDP 대비 투자율은 1952년 가격으로 평가할 때 1930년대 초반의 7.5%에서 1950년대 초반에는 24%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 시기의 투자의 중점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자본 형성이었다. 전후 복구기에 만주지역은 총 투자의 약 25%를 유치하며, 1952년에는 이미 일제치하의 생산수준을 초과하고, 중국 전체 공업생산의 약 40%를 담당하였다. 이 당시의 물적자본 형성에 있어서 소련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업투자의 약 반 정도가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기자재 이거나 소련설비의 공장시설을 지원하는 용도의 국내 프로젝트였다.
한편, 장기적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물적자본 형성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인적자본 형성이었다. 이 시기에 소위 중점대학과 연구소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며, 기술 및 직업훈련 학교들이 적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인적자본의 형성에 있어서도 소련의 역할은 지대했다. 경제를 운영해 나갈 숙련노동력이 소련의 경험을 지침으로 삼아 육성되었으며, 1950년과 1960년 사이에 약 38,000명의 과학자, 기술자 및 노동자가 소련에서 교육받았고, 약 11,000명의 소련인력이 중국에서 일했다.
소련의 역할의 또 다른 측면은 ‘발전모델’의 제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성공한 사회주의 공업화모델로서 소련의 존재는 중국으로 하여금 적절한 발전모델의 모색와 관련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중앙집권적 계획의 우수성으로 돌리는 것은 일면적 파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 계획이 일관되게 진전되었고 그 포괄범위가 확대되어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적 및 물적 자본형성을 위한 투자와 전문인력의 동원도 일관되게 진전되었으며, 경제성장의 보다 중요한 공헌자는 전자보다는 후자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시기 중국의 경제체제는 계획경제라기보다는 혼합경제였으며, 계획기구의 미완과 행정능력 부족으로 포괄적인 중앙집권적 계획의 수립과 집행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중앙집권적 계획은 선별된 소수의 대규모 프로젝트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경제의 나머지 부분은 중앙의 통제 밖에서 자유를 누렸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이 당시 소련인 및 소련에서 훈련받은 전문인력의 대규모 중요 프로젝트에의 집중배치, 그리고,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유연한 자율성 허용은 최적의 선택이었으며, 이것이 급속한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5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인적, 물적 자본의 형성과, 미래의 성장을 위한 건전한 기반 구축이라고 볼 수 있다. 성장기반 구축과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것은 바로 중국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건강과 교육수준의 향상이다. 이는 농촌의 집단화와 이를 이용한 지역자립적인 공공서비스 제도의 구축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이 체제의 구축으로, 1975년에 이르러서는 농촌인구의 85%에게 기본적인 의료보장이 제공되었으며, 1억 2,100만 아동에게 초등교육이 제공되었다.
(3)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이후
대약진운동은 극심한 갈등과 혼란기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과도하게 자원(특히 인적자원)을 공업에 집중함으로써 산업간 특히 농공간 균형을 파괴하고 농업생산기반을 와해시켰다. 물론, 이 시기 가뭄 등 자연재해도 있었으나 농업생산의 급감과 기근 등의 주원인은 아니었다. 이는 중앙의 정책 결정자들이 과도하게 스탈린식으로 단기간에 중공업 기반구축을 추구함과 아울러 1957년에 추진한 부적절한 지방분권화에도 그 원인이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고이윤셩의 공업과 저이윤의 농업이라는 농공 차별구도하에서 지방 경제행위에 대한 자율권 허용은 지방정부들로 하여금 경제적 자원을 농업으로부터 최대한 공업으로 돌리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즉, 분권화가 당시 중국경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불안정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농업생산격감과 기근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하여, 사천과 귀주에서는 1960년에 인구의 5%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 초반의 중국경제 기본 성격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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