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서 론
2.1 박영효의 성장 배경과 개화사상의 형성
3. 본 론
3.1 박영효의 초기 개혁정책
3.2 상황인식과 정변의 모색
3.3 갑신정변의 전개와 활동, 정변의 한계
4. 결 론
4.1 정변의 실패로 두 차례의 망명과 친일의 길로
4.2 민족개량주의의 중개역으로
4.3 근대화 개혁에 실패한 불행한 개혁가인가?
친일 매국자인가?
5. 참 고 문 헌
2. 서 론
2.1 박영효의 성장 배경과 개화사상의 형성
3. 본 론
3.1 박영효의 초기 개혁정책
3.2 상황인식과 정변의 모색
3.3 갑신정변의 전개와 활동, 정변의 한계
4. 결 론
4.1 정변의 실패로 두 차례의 망명과 친일의 길로
4.2 민족개량주의의 중개역으로
4.3 근대화 개혁에 실패한 불행한 개혁가인가?
친일 매국자인가?
5.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나 이러한 차관도입의 시도조차 일본에게 거절당하게 되자, 급진개화파는 세력이 급속히 약해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처지에서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정한론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민씨정권과 청군을 타도할 방침을 세웠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 일본공사를 통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박영효와 급진개화파의 초기 개화정책의 실패로 새로운 모색이 바로 갑신정변이었던 것이다.
“박영효의 초기 개화정책의 결과가 실패했던 원인과 사안에 대해 개인적으로 비평해보자면 당시 국내정세의 현실은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으며, 세도정치의 문란 속에서 민씨일족은 친청 노선으로 개화파와는 반대에 노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발전보다 개인의 야욕이 더 강하였기에 필요에 따라 친청, 친일, 친러를 넘나다는 철새 정치, 또한, 세계열강의 압박 속에 자유로운 개화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3.2 상황인식과 정변의 모색
박영효는 광주유수사에서 물러난 후 민씨들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측의 만류로 중단하였다. 김옥균이 1884년 5월 2일 차관교섭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한 상태로 돌아온 것도 개화당에는 큰 타격이었다. 이는 개화당이 필요로 하는 정치자금 획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손실을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이 친절사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에 개화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집권민씨측에 가담한 사실이었다. 민영익은 왕비 민씨의 신임이 매우 두터운 인물로서 원래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박영효의 수신사행에도 동행하였다. 그러던, 그가 1884년 5월 31일 귀국한 후 개화당과 관계를 멀리하더니 9월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절연하게 이르렀다.
민영익의 당혹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그가 민씨의 일원으로서 친족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이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그가 이후 제2차 한러밀약설을 폭로하고 원세개 및 김윤식과 더불어 대원군의 환국을 추진하였던 이유, 그리고 대원군의 환국 후 그가 추진한 국정개혁이 다른 민씨들의 견제로 좌절되었던 사정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민영익의 노선이 원래 개화당 보다 김윤식 등의 친청 개명관료들과 가까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임오군란 이후 초기 개화파는 일본모델의 개화당과 청모델의 선호하였던 김홍립, 어윤중, 김윤식 등의 개명관료 그룹으로 분화하였다. 민영익은 구미를 두루 시찰하면서 조선의 현실에서는 일본모델보다는 청모델이 보다 적합하다고 보았던 같다. 반면, 민비를 비롯한 다른 집권민씨들은 왕실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친청, 친일, 친러를 넘나들엇다. 박영효 등 개화당이 정변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자신들이 언제 반대당에 의해 제거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민영익이 좌영사에 임명되어, 전후 좌우영이 모두 친청인사들에 의해 장악되자 개화당 인사들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하였다. 예컨대 박영효는 1884년 11월 4일 주한일본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심경을 털어 놓았다.
<근래 제2당이 왕비의 비호에 의하여 더욱 권련을 얻게 되었음으로 우리들에게 죄명을 씌워 유형에 처하려는 악계를 꾸민 것이 새어나와 우리들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우리들은 평소 죽음을 각오하고 있지만 저들의 손에 의해 피살됨을 원치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도 계획을 갖고 있다>
박영는 주한미국공사관의 통역관 윤치호를 통하여 푸트 공사에게도 나라가 매우 위태로운 처치에 놓여 있다는 것과 거사 중임을 은연중에 암시함으로써 만일의 경우에도 우호적으로 대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푸트 공사는 정변을 눈치채고 개화당 인사들과 민영익을 만찬에 초대하여 중재를 시도해 보기도 하였지만, 이미 도저히 화합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진 상태였다.
청불 전쟁의 개전이라는 국제정세와 이에 다른 일본의 대한 정책 변화도 정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청국이 청불전쟁에 전념해야 하는 관계로 설사 일본이 개화당을 지원하여 정변을 일으켜도 청국이 간섭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오장경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파병되었던 3천명중 절반을 인솔하여 귀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인해 그간 개화당에 대해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던 다케조에 공사가 10월 30일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도리어 지나치게 청국과 집권 민씨파를 자극하는 언행을 일삼아 조만간 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11월 16일 문병차 개화당의 지도자인 유홍기를 찾아갔을 때 그도 조속히 거사할 것을 충고하였다. 즉 다케조에 공사가 귀임한 이래 세상이 소란하여 빨리 거사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일군이 청군에 비해 수적으로 적은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박영효 등은 개화당이 일본의 원조와 상관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해야 할 처지이다고 대답했다.
정변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개화당은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반대파를 초청하여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정변계획을 일본공사에 완전히 털어놓고 협의한 것은 정변 10일전인 11월 25일이었다. 당일 개화당은 내정개혁과 간신제거는 개화당이 그리고 군대를 움직여 이를 보호하는 일은 일본측이 분담하기로 하고 정변 후의 긴급 재정원조에 대해서도 합의하였다.
3.3 갑신정변의 전개와 활동, 정변의 한계
개화당이 거사일로 정한 1884년 12월 4일 예정대로 축하연이 홍영식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에서 열렸다. 초청받은 인사중 외교사절로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독일총영사 젬보쉬, 그리고 조선인사로 후영사 윤태준을 제외한 총 19명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거사의 신호탄으로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하였으나 별궁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우정국 옆 초가집에 불을 붙이기로 하였다. 불이 났다는 소리에 좌중이 소란해졌으며, 밖의 형세를 보러 나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우정국 안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연회는 파장이 되고 모두들 각자 흩어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 일본공사를 통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박영효와 급진개화파의 초기 개화정책의 실패로 새로운 모색이 바로 갑신정변이었던 것이다.
“박영효의 초기 개화정책의 결과가 실패했던 원인과 사안에 대해 개인적으로 비평해보자면 당시 국내정세의 현실은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으며, 세도정치의 문란 속에서 민씨일족은 친청 노선으로 개화파와는 반대에 노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발전보다 개인의 야욕이 더 강하였기에 필요에 따라 친청, 친일, 친러를 넘나다는 철새 정치, 또한, 세계열강의 압박 속에 자유로운 개화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3.2 상황인식과 정변의 모색
박영효는 광주유수사에서 물러난 후 민씨들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측의 만류로 중단하였다. 김옥균이 1884년 5월 2일 차관교섭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한 상태로 돌아온 것도 개화당에는 큰 타격이었다. 이는 개화당이 필요로 하는 정치자금 획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손실을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이 친절사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에 개화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집권민씨측에 가담한 사실이었다. 민영익은 왕비 민씨의 신임이 매우 두터운 인물로서 원래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박영효의 수신사행에도 동행하였다. 그러던, 그가 1884년 5월 31일 귀국한 후 개화당과 관계를 멀리하더니 9월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절연하게 이르렀다.
민영익의 당혹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그가 민씨의 일원으로서 친족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이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그가 이후 제2차 한러밀약설을 폭로하고 원세개 및 김윤식과 더불어 대원군의 환국을 추진하였던 이유, 그리고 대원군의 환국 후 그가 추진한 국정개혁이 다른 민씨들의 견제로 좌절되었던 사정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민영익의 노선이 원래 개화당 보다 김윤식 등의 친청 개명관료들과 가까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임오군란 이후 초기 개화파는 일본모델의 개화당과 청모델의 선호하였던 김홍립, 어윤중, 김윤식 등의 개명관료 그룹으로 분화하였다. 민영익은 구미를 두루 시찰하면서 조선의 현실에서는 일본모델보다는 청모델이 보다 적합하다고 보았던 같다. 반면, 민비를 비롯한 다른 집권민씨들은 왕실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친청, 친일, 친러를 넘나들엇다. 박영효 등 개화당이 정변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자신들이 언제 반대당에 의해 제거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민영익이 좌영사에 임명되어, 전후 좌우영이 모두 친청인사들에 의해 장악되자 개화당 인사들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하였다. 예컨대 박영효는 1884년 11월 4일 주한일본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심경을 털어 놓았다.
<근래 제2당이 왕비의 비호에 의하여 더욱 권련을 얻게 되었음으로 우리들에게 죄명을 씌워 유형에 처하려는 악계를 꾸민 것이 새어나와 우리들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우리들은 평소 죽음을 각오하고 있지만 저들의 손에 의해 피살됨을 원치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도 계획을 갖고 있다>
박영는 주한미국공사관의 통역관 윤치호를 통하여 푸트 공사에게도 나라가 매우 위태로운 처치에 놓여 있다는 것과 거사 중임을 은연중에 암시함으로써 만일의 경우에도 우호적으로 대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푸트 공사는 정변을 눈치채고 개화당 인사들과 민영익을 만찬에 초대하여 중재를 시도해 보기도 하였지만, 이미 도저히 화합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진 상태였다.
청불 전쟁의 개전이라는 국제정세와 이에 다른 일본의 대한 정책 변화도 정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청국이 청불전쟁에 전념해야 하는 관계로 설사 일본이 개화당을 지원하여 정변을 일으켜도 청국이 간섭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오장경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파병되었던 3천명중 절반을 인솔하여 귀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인해 그간 개화당에 대해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던 다케조에 공사가 10월 30일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도리어 지나치게 청국과 집권 민씨파를 자극하는 언행을 일삼아 조만간 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11월 16일 문병차 개화당의 지도자인 유홍기를 찾아갔을 때 그도 조속히 거사할 것을 충고하였다. 즉 다케조에 공사가 귀임한 이래 세상이 소란하여 빨리 거사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일군이 청군에 비해 수적으로 적은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박영효 등은 개화당이 일본의 원조와 상관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해야 할 처지이다고 대답했다.
정변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개화당은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반대파를 초청하여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정변계획을 일본공사에 완전히 털어놓고 협의한 것은 정변 10일전인 11월 25일이었다. 당일 개화당은 내정개혁과 간신제거는 개화당이 그리고 군대를 움직여 이를 보호하는 일은 일본측이 분담하기로 하고 정변 후의 긴급 재정원조에 대해서도 합의하였다.
3.3 갑신정변의 전개와 활동, 정변의 한계
개화당이 거사일로 정한 1884년 12월 4일 예정대로 축하연이 홍영식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에서 열렸다. 초청받은 인사중 외교사절로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독일총영사 젬보쉬, 그리고 조선인사로 후영사 윤태준을 제외한 총 19명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거사의 신호탄으로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하였으나 별궁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우정국 옆 초가집에 불을 붙이기로 하였다. 불이 났다는 소리에 좌중이 소란해졌으며, 밖의 형세를 보러 나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우정국 안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연회는 파장이 되고 모두들 각자 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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