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청산별곡 알아가기
1. 시대 상황 고려하기
2. 청산별곡은 누가 지었나
3. 다시보자 청산별곡
1) 합성되었을까 바뀌었을까?
2) 청산은 이상세계가 아니다
3) 청산별곡은 민요인가
4. 꼬집어보자
5. 우리의 청산별곡
Ⅲ. 끝내는 말
Ⅱ. 청산별곡 알아가기
1. 시대 상황 고려하기
2. 청산별곡은 누가 지었나
3. 다시보자 청산별곡
1) 합성되었을까 바뀌었을까?
2) 청산은 이상세계가 아니다
3) 청산별곡은 민요인가
4. 꼬집어보자
5. 우리의 청산별곡
Ⅲ. 끝내는 말
본문내용
떨어져 몽고군의 침략을 받게 되자 변방 수비대는 속수무책이었고 몽고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개경을 포위했다. 그 후 15일 만에 권항사(勸降使)를 맞아 강화를 했지만 과다한 공물과 자신의 실권 상실을 염려한 최우는 고종을 강요하여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이후에 몽고의 부마국이 된 충렬왕 집권기에 왕을 비롯한 왕실들의 향락적 생활과 권신들의 발호, 불교의 타락 등은 민중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김기백,「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 개정판, 일조각, 1980, p. 169~192
김상기,「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 동국문화사, 1961, p. 514~530
고려시대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심했다. <사리화>등의 속가나 고려 지식인들의 한시 속에 그 실상이 잘 반영되어있다. 특히 고종 때는 몽고병이 침략해 오는 것을 도리어 좋아했으며 고려사 권24 고종 43년조. 여기에 ‘是月 以夢兵 停發六道宣旨使 用別監 時奉使者 剝民本橫斂 以固恩寵 民甚苦之 反喜夢兵之至’라 적혀있음.
, 더러는 몽고병이 고려 전토를 유린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어 주현을 쉽게 공략하게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도영, 농민천민의 난. 한국사론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83), p. 176 참조
이와 같은 형편이었으니 당연 난리(亂離)에 묻혀 농사를 지으면서 살려고 할 백성들이 없었으므로 유민이 속출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민 현상의 비참함은 고려 후기에 창작된 많은 한시문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 이곡의 「가정집(稼停集)」을 보면 이런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시 「淸明後出 城南望西山雪」에서 ‘농민들이 배가 고파 서로 잡아먹는다(民今食是何心)’고 읊고 있다.
농민이 경작하던 토지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경향은 12세기 초의 예종 때부터 이미 나타났다.
2. 청산별곡은 누가 지었나
<청산별곡>의 작가층에 대한 논란 또한 심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귀족 지식층 …… 이승명 이승명, 청산별곡 연구 「고려시대의 언어와 문학」, 형설출판사, 1975, p. 125~134
, 정병욱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99, p.127 참조
이승명은 외적의 침입 등 겹치는 내우외환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피폐해진 고려인들이 언젠가 훗날 좋은 때를 기다리며 청산과 바다로 피하면서 부른 노래라 하고 있으면서 작가층은 정치적 까닭으로 실의 낙향하였거나 현직에 있으면서도 신분을 감추고 있는 상당한 학식을 갖춘 귀족 계급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병욱은 이 작품이 고도의 상징성논리성을 일관하고 있고 긴밀한 구성을 가졌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민중 속에 굴러다니며 때가 묻은 속요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작품에 나타난 철학과 삶의 추구로 보아 작자는 지식층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고려 지식인들이 순간적 향락 추구의 한 표현으로 ‘술노래’ 를 부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② 삶의 터전을 잃은 유민(流民) …… 신동욱 신동욱, 청산별곡과 평민적 삶 의식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p.1-32~41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민중들의 슬픔을 다소간은 체념적으로 또는 자포자기의 태도로 혹은 자조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화자는 민중층의 남성일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한다.
③ 혁명에 가담한 반란민들 …… 김학성 김학성,「한국고전시가의 연구」, 원광대출판부, 1980, p.133~139
고려후기에 빈발했던 민란에 가담한 농민, 어민 등의 하나 또는 이들의 혼합 집단이 작자일 것이고 반란민들의 노래였기 때문에 조선조 왕실에 의해서 금기된 것이라 하였다. 남녀상열지사가 아닌데도 다른 각도에서 금기가 되어 조선 초에 <납씨가>의 가사로 대치시켜 궁중악으로 사용한 점을 전제로 삼아서, 이 노래가 평상적인 삶을 갈망하나 허용되지 않는 긴박한 상황에서 청산과 바다로 이동하고 쫓기는 처지의 사람이 지은 노래라고 하였다.
④ 몽고의 침입으로 산성과 해도로 피신한 피난민들 …… 박노준 박노준, 청산별곡의 재조명 「고려가요의 연구」, 새문사, 1990, p.95~117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이 작품이 몽고와의 전란 중 ‘又遣使諸道 徙民山城海島(우견사제도 사민산성해도)’ 의 명령이 내려진 고종 19년 6월 이후 산과 바다로 난리를 피하며 헤매던 피난민이 지은 노래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자인 피난민은 양반계층이 아닌 양민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작자층을 절박한 상황과 무관한 고려 남성의 하루 일과를 그린 노래로 보는 입장 윤강원, 「청산별곡의 새로운 이해」廣場 116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 1983, p.53
, 궁중에 잡혀온 관비, 관기의 노래라는 입장 성현경, 「청산별곡고」국어국문학 58~60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72, p.237~242
, 속세를 떠나 청산에 기거하던 작자가 고독함을 이기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상상해본 노래라는 입장 이동근, 「청산별곡의 재고」, 관악문학연구 제 9집, 서울대국어국문학과, 1984, p..259
, 고려 말에 몽고와 함께 일본을 공격할 시 동원되었던 배를 만들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지었다는 입장 김형기, 「청산별곡의 성격에 대하여」, 어문연구, 충남대, 1972, p.15~40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입장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우리는 작자층을 고려 후기 민중층의 남성으로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신동욱과 박노준의 의견과 비슷하나, 고려 후기의 민중들은 대부분이 방랑하는 유민, 피난민이었을 것을 감안하여 포괄적으로 민중층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다시보자 청산별곡
먼저 악장가사에 실린 <청산별곡>의 원문을 살펴보겠다.
살어리살어리랏다靑山애살어리랏다멀위랑래랑먹고청산애살어리랏다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우러라우러라새여자고니러우러라새여널라와시름한나도자고니러우러니와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가던새가던새본다물아래가던새본다잉무든장글란가지고믈아래가던새본다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이링공뎌링공야나즈란디대와숀뎌오리도가리도업슨바므란엇디호리라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어듸라더디던돌코누리라마치던돌코
이후에 몽고의 부마국이 된 충렬왕 집권기에 왕을 비롯한 왕실들의 향락적 생활과 권신들의 발호, 불교의 타락 등은 민중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김기백,「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 개정판, 일조각, 1980, p. 169~192
김상기,「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 동국문화사, 1961, p. 514~530
고려시대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심했다. <사리화>등의 속가나 고려 지식인들의 한시 속에 그 실상이 잘 반영되어있다. 특히 고종 때는 몽고병이 침략해 오는 것을 도리어 좋아했으며 고려사 권24 고종 43년조. 여기에 ‘是月 以夢兵 停發六道宣旨使 用別監 時奉使者 剝民本橫斂 以固恩寵 民甚苦之 反喜夢兵之至’라 적혀있음.
, 더러는 몽고병이 고려 전토를 유린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어 주현을 쉽게 공략하게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도영, 농민천민의 난. 한국사론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83), p. 176 참조
이와 같은 형편이었으니 당연 난리(亂離)에 묻혀 농사를 지으면서 살려고 할 백성들이 없었으므로 유민이 속출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민 현상의 비참함은 고려 후기에 창작된 많은 한시문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 이곡의 「가정집(稼停集)」을 보면 이런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시 「淸明後出 城南望西山雪」에서 ‘농민들이 배가 고파 서로 잡아먹는다(民今食是何心)’고 읊고 있다.
농민이 경작하던 토지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경향은 12세기 초의 예종 때부터 이미 나타났다.
2. 청산별곡은 누가 지었나
<청산별곡>의 작가층에 대한 논란 또한 심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귀족 지식층 …… 이승명 이승명, 청산별곡 연구 「고려시대의 언어와 문학」, 형설출판사, 1975, p. 125~134
, 정병욱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99, p.127 참조
이승명은 외적의 침입 등 겹치는 내우외환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피폐해진 고려인들이 언젠가 훗날 좋은 때를 기다리며 청산과 바다로 피하면서 부른 노래라 하고 있으면서 작가층은 정치적 까닭으로 실의 낙향하였거나 현직에 있으면서도 신분을 감추고 있는 상당한 학식을 갖춘 귀족 계급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병욱은 이 작품이 고도의 상징성논리성을 일관하고 있고 긴밀한 구성을 가졌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민중 속에 굴러다니며 때가 묻은 속요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작품에 나타난 철학과 삶의 추구로 보아 작자는 지식층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고려 지식인들이 순간적 향락 추구의 한 표현으로 ‘술노래’ 를 부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② 삶의 터전을 잃은 유민(流民) …… 신동욱 신동욱, 청산별곡과 평민적 삶 의식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p.1-32~41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민중들의 슬픔을 다소간은 체념적으로 또는 자포자기의 태도로 혹은 자조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화자는 민중층의 남성일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한다.
③ 혁명에 가담한 반란민들 …… 김학성 김학성,「한국고전시가의 연구」, 원광대출판부, 1980, p.133~139
고려후기에 빈발했던 민란에 가담한 농민, 어민 등의 하나 또는 이들의 혼합 집단이 작자일 것이고 반란민들의 노래였기 때문에 조선조 왕실에 의해서 금기된 것이라 하였다. 남녀상열지사가 아닌데도 다른 각도에서 금기가 되어 조선 초에 <납씨가>의 가사로 대치시켜 궁중악으로 사용한 점을 전제로 삼아서, 이 노래가 평상적인 삶을 갈망하나 허용되지 않는 긴박한 상황에서 청산과 바다로 이동하고 쫓기는 처지의 사람이 지은 노래라고 하였다.
④ 몽고의 침입으로 산성과 해도로 피신한 피난민들 …… 박노준 박노준, 청산별곡의 재조명 「고려가요의 연구」, 새문사, 1990, p.95~117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이 작품이 몽고와의 전란 중 ‘又遣使諸道 徙民山城海島(우견사제도 사민산성해도)’ 의 명령이 내려진 고종 19년 6월 이후 산과 바다로 난리를 피하며 헤매던 피난민이 지은 노래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자인 피난민은 양반계층이 아닌 양민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작자층을 절박한 상황과 무관한 고려 남성의 하루 일과를 그린 노래로 보는 입장 윤강원, 「청산별곡의 새로운 이해」廣場 116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 1983, p.53
, 궁중에 잡혀온 관비, 관기의 노래라는 입장 성현경, 「청산별곡고」국어국문학 58~60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72, p.237~242
, 속세를 떠나 청산에 기거하던 작자가 고독함을 이기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상상해본 노래라는 입장 이동근, 「청산별곡의 재고」, 관악문학연구 제 9집, 서울대국어국문학과, 1984, p..259
, 고려 말에 몽고와 함께 일본을 공격할 시 동원되었던 배를 만들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지었다는 입장 김형기, 「청산별곡의 성격에 대하여」, 어문연구, 충남대, 1972, p.15~40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입장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우리는 작자층을 고려 후기 민중층의 남성으로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신동욱과 박노준의 의견과 비슷하나, 고려 후기의 민중들은 대부분이 방랑하는 유민, 피난민이었을 것을 감안하여 포괄적으로 민중층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다시보자 청산별곡
먼저 악장가사에 실린 <청산별곡>의 원문을 살펴보겠다.
살어리살어리랏다靑山애살어리랏다멀위랑래랑먹고청산애살어리랏다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우러라우러라새여자고니러우러라새여널라와시름한나도자고니러우러니와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가던새가던새본다물아래가던새본다잉무든장글란가지고믈아래가던새본다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이링공뎌링공야나즈란디대와숀뎌오리도가리도업슨바므란엇디호리라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어듸라더디던돌코누리라마치던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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