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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붕당정치) 형성,배경, 붕당(붕당정치) 시조,실천, 붕당(붕당정치) 정의, 붕당(붕당정치)간 정치적 역학관계, 붕당(붕당정치) 전개과정, 탕평책, 조선 붕당(붕당정치)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붕당의 형성과 배경

Ⅱ. 붕당의 시조와 실천

Ⅲ. 붕당의 정의와 붕당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

Ⅳ.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

Ⅴ. 탕평책

Ⅵ. 조선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참고문헌

본문내용

것이다.
Ⅵ. 조선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붕당 정치란 조선 후기, 학연과 지연을 같이 하는 사림끼리 붕당을 조성하고 국왕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원래 ‘붕’이란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한 무리를 뜻하며, ‘당’이란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의미하였다. 즉, 붕당정치는 공론에 입각하여 몇 개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치 체제이다.
붕당은 처음에는 학문과 이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세력 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의 기능도 가졌다. 17세기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정책 대립을 펼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인과 남인은 인사권, 예송 논쟁 등을 둘러싸고 붕당끼리 대립하면서도 비판 세력의 공존을 허용함으로써 관료들의 정치 비판 기능이 커지게 되었고 개인의 의견보다는 집단 의사라 할 수 있는 공론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어 정치의 부패가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러한 점은 붕당 정치가 서양에서의 민주적 정치 운영에 입각한 정당 정치와 비슷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즉, 정치 활성화와 비판 견제의 기능, 의회의 역할을 하여 왕의 독재를 막은 것, 그리고 서원을 기반으로 하여 학문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이 조선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적 추구와 외척 세력의 개입으로 붕당 정치는 변질되어 갔고 경신환국 이후에는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가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다음 예는 붕당정치의 변질된 모습에 대한 예이다.
『경신환국(숙종 6, 1680)으로 집권한 서인이 윤휴, 허적 등 다수의 남인을 주살하였고, 이에 다시 기사환국(숙종 15, 1689)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서인의 송시열, 김수항 등을 제거하여 보복하였다. 이어서, 갑술환국(숙종 20, 1994)으로 다시 집권한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숙청하였다.』
다음은 이중환의 ‘택리지’의 일부분인데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변질된 모습과 부정적 측면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북의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4색이 동남 5도에 나누어 살고 있는데, 오직 경상도만은 모두 예안의 이황의 학문을 종주로 삼고 있었으며 유성룡은 그의 문인이었다. 남인의 명칭이 유성룡으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온 도내의 사대부가 모두 남인이 되어 의논이 통일되었고 타도는 4색이 고을마다 모여 살았다. 신축, 임인 이래로 조정에서 노론, 소론, 남인의 3색이 날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란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되어 하나의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색끼리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이 백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근래에 와서는 4색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오늘날의 붕당의 환난만큼 심한 것이 없었으니 이대로 나가고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다른 색과 친하게 지내면 절개를 잃었다느니 항복했다느니 하여 서로 배척하고, 일없이 노는 작자나 천한 종까지도 한번 아무 집안의 사람이라고 이름이 지어지면, 비록 다른 집안을 섬기려 하여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정권이 몇몇 벌열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그리고 양반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몰락하여 갔다.
따라서 국민 복리보다 당파 이익 우선하여 국가와 사회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 것, 이념보다는 학벌과 문벌, 지연 등과 연결 연결하여 실정을 거듭한 것이 붕당정치의 부정적 측면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1973], 조선왕조 오백년 (하)·쟁점으로 본 한국사·한국사 31·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 박광용[1997], 실패한 개혁의 역사, 역사비평사
* 이성무[2000], 조선시대 당쟁사, 동방미디어
* 이기남[1988], 광해조초기의 정치세력과 권력구조: 붕당정치 정착에 있어서 초기단계의 일양상, 국민대학교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1990], 사화와 붕당정치,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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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2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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