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대일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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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대일외교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한일 외교관계사
1. 고대의 한일 외교
2. 조선시대 한일 외교
3. 탈냉전 이후의 한일 외교
4. 2001년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한일외교

III. 역대 정권의 대일 외교정책
1. 이승만 정권의 대일 정책
2. 장면 정권의 대 일본 정책
3. 박정희 정권의 대 일본 정책
4. 전두환 정권의 대 일본 정책
5. 노태우 정권의 대 일본 정책
6. 김영삼 정권의 대 일본 정책
7. 김대중 정권의 대 일본정책
8. 노무현 정권의 대 일본정책

IV. 한국의 대일 외교정책의 변수
1. 개인적 변수
2. 정치적 변수
3. 경제적 변수
4. 사회적 변수

V. 대일외교정책의 문제점
1. 대일외교정책의 현실
2. 대일외교의 평가
3. 대일외교의 과제

VI. 결론

參 考 資 料

본문내용

개방조치는 부정적 영향보다는 한국의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한국 영화와 공연이 일본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윤진표, 2003 : 116~117)
2000년 1월 1일에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는 새천년을 맞아 양국 국민에게 보내는 TV화상메시지를 교환하여 새천년의 양국간 우호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하였다. 2000년 5월 모리 총리가 방한하여 전임 오부치 총리 재임 기간 중 구축된 양국 간 우호협력관계를 심화시키는 일환으로 대북 정책 공조,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강화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2000년 9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실무방문하고 ‘한일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비즈니스 포럼’설치, ‘한일 정보기술 협력 이니셔티브’ 채택, ‘2002년 한일 교류의 해’를 계기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한일 국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는데 대해 합의함으로써 한일 공동이익 추구를 위한 실질 경제협력기반 및 한일간 문화 교류가 한층 확대되었다.(윤진표, 2003 : 117)
그런데 2000년 4월 일본 내 8개 출판사가 2002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문부과학성에 검정신청하면서 기존 7개 출판사의 검정신청본이 군대위안부, 일제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기존의 기술을 축소 또는 삭제하고, 특히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자체 제작한 역사교과서는 과거사를 크게 왜곡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 정권은 이에 대해 일본측이 올바른 역사인식이 양국 관계의 발전의 근간임을 강조하고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일본 측이 현명하고 신중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역사 왜곡 문제가 되고 있는 교과서를 137군데 수정시킨 뒤 2002년 4월 기존 7개 출판사의 교과서와 함께 검정 합격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는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 수정요구를 포함한 한국의 입장을 2001년 5월 일본정부에 전달하였다.(윤진표, 2003 : 117)
2002년 6월 한. 일 공동 월드켭 개최는 양국의 관계를 크게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2002년 월드컵의 공동개최를 계기로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와 교류가 증진되고 문화, 청소년, 스포츠, 지역교류, 산업, 관광, 학술 등 7개 분양에서 전면적인 교류가 추진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윤진표, 2003 : 117)
8. 노무현 정권의 대 일본정책
노무현 정권 초기 2년간에 있어서 한일관계는 주요한 정책과제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과거사 현안은 대일외교 상에서도 주요한 정책 아젠다가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 초기 2년의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 기조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상”이며, 일본을 이 구상의 실현을 위한 동반자로 보았다. 북핵 문제 해결에 관련되어서는 일본은 한. 미. 일 삼국 협력의 한 축을 구성하여, 북한의 핵무기는 용납하지 않지만 동시에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조대상 국가로서 일본을 보고 있었다.(김호섭, 2005 : 83)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국비니으로 방문하여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그 의미를 설명하는 청와대의 발표에 의하면, “이번 방문에서 가장 주력했던 것은 한. 일 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강화이며...이를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것이 방문의 목적이다.”고 하였다. 즉, 일본을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동반자로서 보고 있다.(김호섭, 2005 : 84)
그러나, 2005년 3월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 NSC 성명서,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 3월 22일 육군3사 졸업식 연설문에서 노무현 정권은 대일정책의 “정책전환”을 천명하였다.(김호섭, 2005 : 84)
1) 노무현 정권의 초기 2년간의 대일 외교
2003년 1월 당선자 시절부터 2005년 3월 우익교과서문제와 독도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약 2년 간 노무현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과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서 과거사 문제에 관하여 발언한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김호섭, 2005 : 84)
첫째, 한일간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강조하였다. 2003년 1월 16일 당선자 시절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을 접견한 자리에서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련하여서,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만나지 않는다든가 감정적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고이즈미 수상은 2001년 4월 취임 이래 야스쿠니 신사를 지속적으로 참배하였고, 한국 여론은 참배할 때마다 문제제기를 하였기 때문에, 이미 당선자는 그러한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당선자 시절의 유화적인 발언 내용과,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는 이전에 일본 지도자들이 한 반성과 사과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비난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이러한 상이함에 대해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참아왔다.”고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김호섭, 2005 : 85)
2003년 2월 10일 야마자키 다쿠 자민당 간사장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당선자는 “과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2003년 2월 25일 고이즈미 수상과 정상회담에서는 “(과거에) 발목 잡혀서는 안되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가는 동력으로 서로 역할하자.”고 발언하였다. 당선자 스스로도 “미래지향적 관계”를 언급하였으나,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일본 지도자들이 입버릇처럼 반복해서 말하는 바로 그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외교쟁점으로” 삼지 않았으나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하여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 측의 책임이라고 비난하였다.(김호섭, 2005 : 85)
2003년 6월 7일 한일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위해서 현충일에 대통령이 일본으로 출

키워드

한국,   일본,   외교,   정치,   관계,   한일,   역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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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03
  • 저작시기2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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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7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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