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적용되는 반강제적 규범이었다. 따라서 황석영의 소설을 구조적으로 깊이 있게 읽는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근대성의 본질적 성격을 탐색하는 일이며, 또 근대성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그의 소설을 분석적으로 구명하는 데 효율적인 잣대가 되는 셈이었다. 황석영의 창작 이력과 시도들은, 근대성의 논의들에 비추어 보면 곧 그것의 극복에 관한 소설적 발화법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을 동시대의 민족 모순에 대한 리얼리즘적 개선 방안의 개진인 동시에, 오랜 숙제로 우리 역사에 부하되어 있는 근대성 극복에 대한 통시적 의미망의 제시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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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과 5장,
저는 커피숍을 운영하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소유의 가게는 아니고, 아는 분의 부탁으로 점장역할을 맡아 내 일처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종류의 가게를 운영하게 되든 손님관리는 꼭 필요한 영업 전략입니다. 가게에 찾아와주시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 자주 찾아와주시는 단골손님들일 경우엔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 일반 손님들 보다 더 대우를 해드리곤 하는데, 그러다가 어느 교회의 집사님과 전도사님 몇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오후, 여느 때처럼 교인들 몇 분이 그렇게 찾아 오셔서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시는데 차를 가져다 드리다가 언뜻 그 분들의 말씀이 들려 귀를 기울였습니다. 요즘 한참 ‘종교문학의 접점이나 한국 근대 문학의 경계’등을 요약하고 서술하는 과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귓등을 스치는 그 분들의 화제는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중의 한 목사님이 기독교 관련 책을 한 권 출판하셨는데, 이야기는 거기에서부터 불거진 것 같았습니다. 한 집사님이 아이들이 읽기에도 쉽고 재미있어서 성경에 흥미를 붙일만한 책도 한 권 써주세요 누군가를 교화시키는 것이 참 문학 아닌가요, 하고 너스레를 떠셨고 다른 집사님은 성경이 그 자체로도 이미 문학이라며 자신은 매일 아침 저녁 성경을 한 구절씩 읽을 때마다 감동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뚜렷한 신앙은 없지만,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몇 번 나간 적도 있고 성당을 따라 다닌 적도 있는데 한 번은 교회에서 성가대가 합창하는 찬송가를 들으며 크게 감복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감동은 목사님이 읽어 주시는 어느 성경 구절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그 분들의 말씀을 듣고 그 경험이 떠올라,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를 펼쳐들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잠시 잊고 살았던 저는 ‘성경은 성경이고 문학은 문학이지’라고 생각하며 ‘종교와 문학의 접점’이란 말을 처음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T.S 엘리어트가 그의 저서 [종교와 문학]에서 이른바 처럼 가장 바람직한 종교와 문학의 관계는, 종교의 대의를 전파하는데 성심껏 노력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문학이 아닐까요.
또한 한국 문학과 근대의 경계에 선,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다른 노력은 그 경계문학을 잃지 않는 데 있을 것입니다. 기교만 앞세우고 새로운 형식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대다수 소설들은 시대 현실에 대한 소설적 각성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실험적 소설들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각성시키거나 반영해줄 수 있는 작품이 근래에 와선 더욱 보기 힘든 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너무나 재미있게 본 저는, 그 세대가 살았던 환경을 간접경험하면서 감동을 느낀 것처럼 우리 아래 세대가 지금의 문학을 통해 느낄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런 작품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춘천의 김유정문학관이나 현재 건립중인 양평의 황순원문학관, 그리고 앞으로도 계획 중에 있는 여러 문학 마을들, 그곳은 문학적 장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문화와 문학이 스며들 수 있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분단과 이산, 그것은 분명 둘로 갈라진 한반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남한과 북한의 다른 이념 말고도, 전 세계에 분포된 우리의 한민족, 또는 종교와 문학, 문학과 근대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를 어우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가장 바람직하고 평온한 사회, 그리고 문학 위에 놓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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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과 5장,
저는 커피숍을 운영하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소유의 가게는 아니고, 아는 분의 부탁으로 점장역할을 맡아 내 일처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종류의 가게를 운영하게 되든 손님관리는 꼭 필요한 영업 전략입니다. 가게에 찾아와주시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 자주 찾아와주시는 단골손님들일 경우엔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 일반 손님들 보다 더 대우를 해드리곤 하는데, 그러다가 어느 교회의 집사님과 전도사님 몇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오후, 여느 때처럼 교인들 몇 분이 그렇게 찾아 오셔서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시는데 차를 가져다 드리다가 언뜻 그 분들의 말씀이 들려 귀를 기울였습니다. 요즘 한참 ‘종교문학의 접점이나 한국 근대 문학의 경계’등을 요약하고 서술하는 과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귓등을 스치는 그 분들의 화제는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중의 한 목사님이 기독교 관련 책을 한 권 출판하셨는데, 이야기는 거기에서부터 불거진 것 같았습니다. 한 집사님이 아이들이 읽기에도 쉽고 재미있어서 성경에 흥미를 붙일만한 책도 한 권 써주세요 누군가를 교화시키는 것이 참 문학 아닌가요, 하고 너스레를 떠셨고 다른 집사님은 성경이 그 자체로도 이미 문학이라며 자신은 매일 아침 저녁 성경을 한 구절씩 읽을 때마다 감동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뚜렷한 신앙은 없지만,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몇 번 나간 적도 있고 성당을 따라 다닌 적도 있는데 한 번은 교회에서 성가대가 합창하는 찬송가를 들으며 크게 감복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감동은 목사님이 읽어 주시는 어느 성경 구절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그 분들의 말씀을 듣고 그 경험이 떠올라,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를 펼쳐들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잠시 잊고 살았던 저는 ‘성경은 성경이고 문학은 문학이지’라고 생각하며 ‘종교와 문학의 접점’이란 말을 처음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T.S 엘리어트가 그의 저서 [종교와 문학]에서 이른바 처럼 가장 바람직한 종교와 문학의 관계는, 종교의 대의를 전파하는데 성심껏 노력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문학이 아닐까요.
또한 한국 문학과 근대의 경계에 선,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다른 노력은 그 경계문학을 잃지 않는 데 있을 것입니다. 기교만 앞세우고 새로운 형식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대다수 소설들은 시대 현실에 대한 소설적 각성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실험적 소설들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각성시키거나 반영해줄 수 있는 작품이 근래에 와선 더욱 보기 힘든 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너무나 재미있게 본 저는, 그 세대가 살았던 환경을 간접경험하면서 감동을 느낀 것처럼 우리 아래 세대가 지금의 문학을 통해 느낄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런 작품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춘천의 김유정문학관이나 현재 건립중인 양평의 황순원문학관, 그리고 앞으로도 계획 중에 있는 여러 문학 마을들, 그곳은 문학적 장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문화와 문학이 스며들 수 있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분단과 이산, 그것은 분명 둘로 갈라진 한반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남한과 북한의 다른 이념 말고도, 전 세계에 분포된 우리의 한민족, 또는 종교와 문학, 문학과 근대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를 어우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가장 바람직하고 평온한 사회, 그리고 문학 위에 놓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