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緖論
Ⅱ. 本論
1. 春秋時代의 開幕
2. 春秋五覇
3. 戰國時代의 到來
(1) 春秋時代에서 戰國時代로의 移行
(2) 變法의 施行
(3) 戰國七雄의 角逐
4. 春秋戰國時代의 爭覇 樣相
Ⅲ. 結論
Ⅱ. 本論
1. 春秋時代의 開幕
2. 春秋五覇
3. 戰國時代의 到來
(1) 春秋時代에서 戰國時代로의 移行
(2) 變法의 施行
(3) 戰國七雄의 角逐
4. 春秋戰國時代의 爭覇 樣相
Ⅲ. 結論
본문내용
351년 조를 압박하여 맹약을 맺도록 했는데, 위가 동쪽을 경략하는 사이 진(秦)이 하서(河西)의 소량(小梁)과 하동(河東)의 안읍(安邑)을 공격해 점령했다. 위는 동쪽의 상황이 정리되자 진에게 반격을 가하여 실지를 수복하고 거꾸로 진을 압박하여 진 효공(孝公)으로 하여금 수호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이때가 위의 성세로 위는 기원전 344년에 소국의 국군을 모아 왕을 칭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42년 위가 한을 공격하자 한이 제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다시 제와 위 간의 대결이 벌어졌다. 위의 방연(龐涓)과 제의 손빈(孫賓) 손빈은 전국시대의 병가이며 일찍이 방연(龐涓)과 병법을 공부했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는데, 손빈의 재주를 시기해서 위나라로 그를 불러들여 빈형(刑 : 슬개골을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이로 인해 손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손빈은 후에 제나라 위왕(威王)의 군사(軍師 : 참모)가 되었는데, 위왕은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에서 위군(魏軍)을 차례로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손빈은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 중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했고, 전쟁중에 특히 사람의 주관적인 능동작용을 중시하여 \"천지간에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天地之間莫貴於人)고 했다. 단지 좋은 무기에만 의지하는 것으로 강대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갑옷의 견고함이 병사를 이롭게 하나,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甲堅利兵不得以爲强)라고 했다.
이 마릉(馬陵)에서 서로의 군사를 이끌고 크게 싸웠는데 이때 위군의 주력이 완전히 궤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때부터 위는 국력이 급격히 기울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와 진이 협공하여 태자가 포로로 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위는 제와 휴전하고 공동의 패자를 칭하고자 하였으나 진은 계속 위를 공격하여 황하의 천연의 험지인 하서와 상군(上郡)의 땅을 점령하여 그 위세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방의 초가 중원의 5개국이 (위, 한, 조, 연, 중산) 왕을 칭하자 위를 공격하여 위나라는 한층 쇠약해지게 되었다.
초기 위와 진의 대립구도에서 진이 승리함으로써 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중원 국가들 중 진과 정면으로 대적할 만한 국가가 없게 되자 진을 상대로 한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합종은 북방의 연에서부터 남방의 초까지 남북으로 연합해 공동으로 서쪽의 진을 방어하는 연합방어책이었다. 이에 대항해 진은 연횡의 계책을 선택했는데 연횡은, 산동의 1~2개국과 연합하여 합종의 동맹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합종연횡(合縱連橫)의 계책은 전국시대 중 후기에 칠국간의 항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대두되었으며 공손연(公孫衍) 소진(蔬秦) 중국 전국시대의 책사(策士)로 종횡가(縱橫家)의 한 사람. 자는 계자(季子). 장의(張儀)와 함께 제(齊)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웅변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진(秦)의 혜왕(惠王)에게 유세했으나 기용되지 않았다. 후에 연(燕)의 문후(文候)에게 기용되어 동방 6국을 설득하고 합종동맹(合從同盟)을 체결해 진에 대항했다. 공을 인정받아 조(趙)의 무안(武安: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있음)에 봉토를 받았으나, 곧 참소를 받아 망명했다. 제에서 암살당했다고 한다.
장의(張儀) 와 같은 종횡가(縱橫家)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위를 이어 중원의 중심국으로 떠오른 국가는 제였다. 제는 진이 서방으로 진출하여 파(巴) 촉(蜀)을 정벌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는 사이 동방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연과 충돌하여 기원전 314년 연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제가 연과 전쟁을 하고 있을 사이 진은 한 위 조를 각개 격파하여 초기에 형성되었던 진을 대상으로 한 합종을 버리고 진과 연횡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연횡을 격파하기 위해 제는 초와 회동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이를 감지한 진은 장의를 초에 파견하여 제과 동맹을 깨고 진과 연합한다면 상(商) 우(于)의 토지 600리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초는 제와 단교하고 토지를 요구하자 진은 태도를 바꾸어 600리의 토지를 6리의 토지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진은 제 의 연합을 깨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초가 진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한중(漢中)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초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진에게 복수하고자 했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한중을 수복하지 못하였고 본토에 대한 초의 위협을 제거한 진은 더욱 강성해 졌다. 한편 제는 맹상군(孟嘗君)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공족(公族).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며, 맹상군은 시호이다. 제 위왕(威王)의 막내 아들이며 선왕(宣王)의 이복동생 정곽군(靖郭君) 전영(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객 1,000여 명을 거느렸고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 4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곧 의심을 사게 되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의 식객 중에 좀도둑질[狗盜]을 잘하는 사람과 닭울음소리[鷄鳴]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는 고사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유명하다. 제와 위에서 잠시 재상을 지냈고, BC 284년 제의 민왕(王)이 죽은 후에 자립해 제후가 되었다.
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한 위와 합종한 다음 제를 배신한 바 있는 초를 격파하고 강화를 맺었다. 그 후 합종세력을 바탕으로 진을 공격하여 승리하여 합종으로써는 진에 대항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진과 함곡관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여 제 - 진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제가 진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조가 발전했다. 조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여세를 몰아 중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내란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에 빠졌는데 진이 이 틈을 타서 조의 내정에 간섭하게 된다. 이후 제와 진은 잠시 연합하여 서로 싸우지 않았는데 이 사이 제는 송을 진은 한 위를 공격하였다. 이 결과로 한 위는 날로 쇠약해지게 되고 진은 더욱 강성해
이 마릉(馬陵)에서 서로의 군사를 이끌고 크게 싸웠는데 이때 위군의 주력이 완전히 궤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때부터 위는 국력이 급격히 기울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와 진이 협공하여 태자가 포로로 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위는 제와 휴전하고 공동의 패자를 칭하고자 하였으나 진은 계속 위를 공격하여 황하의 천연의 험지인 하서와 상군(上郡)의 땅을 점령하여 그 위세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방의 초가 중원의 5개국이 (위, 한, 조, 연, 중산) 왕을 칭하자 위를 공격하여 위나라는 한층 쇠약해지게 되었다.
초기 위와 진의 대립구도에서 진이 승리함으로써 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중원 국가들 중 진과 정면으로 대적할 만한 국가가 없게 되자 진을 상대로 한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합종은 북방의 연에서부터 남방의 초까지 남북으로 연합해 공동으로 서쪽의 진을 방어하는 연합방어책이었다. 이에 대항해 진은 연횡의 계책을 선택했는데 연횡은, 산동의 1~2개국과 연합하여 합종의 동맹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합종연횡(合縱連橫)의 계책은 전국시대 중 후기에 칠국간의 항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대두되었으며 공손연(公孫衍) 소진(蔬秦) 중국 전국시대의 책사(策士)로 종횡가(縱橫家)의 한 사람. 자는 계자(季子). 장의(張儀)와 함께 제(齊)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웅변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진(秦)의 혜왕(惠王)에게 유세했으나 기용되지 않았다. 후에 연(燕)의 문후(文候)에게 기용되어 동방 6국을 설득하고 합종동맹(合從同盟)을 체결해 진에 대항했다. 공을 인정받아 조(趙)의 무안(武安: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있음)에 봉토를 받았으나, 곧 참소를 받아 망명했다. 제에서 암살당했다고 한다.
장의(張儀) 와 같은 종횡가(縱橫家)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위를 이어 중원의 중심국으로 떠오른 국가는 제였다. 제는 진이 서방으로 진출하여 파(巴) 촉(蜀)을 정벌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는 사이 동방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연과 충돌하여 기원전 314년 연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제가 연과 전쟁을 하고 있을 사이 진은 한 위 조를 각개 격파하여 초기에 형성되었던 진을 대상으로 한 합종을 버리고 진과 연횡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연횡을 격파하기 위해 제는 초와 회동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이를 감지한 진은 장의를 초에 파견하여 제과 동맹을 깨고 진과 연합한다면 상(商) 우(于)의 토지 600리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초는 제와 단교하고 토지를 요구하자 진은 태도를 바꾸어 600리의 토지를 6리의 토지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진은 제 의 연합을 깨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초가 진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한중(漢中)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초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진에게 복수하고자 했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한중을 수복하지 못하였고 본토에 대한 초의 위협을 제거한 진은 더욱 강성해 졌다. 한편 제는 맹상군(孟嘗君)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공족(公族).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며, 맹상군은 시호이다. 제 위왕(威王)의 막내 아들이며 선왕(宣王)의 이복동생 정곽군(靖郭君) 전영(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객 1,000여 명을 거느렸고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 4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곧 의심을 사게 되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의 식객 중에 좀도둑질[狗盜]을 잘하는 사람과 닭울음소리[鷄鳴]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는 고사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유명하다. 제와 위에서 잠시 재상을 지냈고, BC 284년 제의 민왕(王)이 죽은 후에 자립해 제후가 되었다.
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한 위와 합종한 다음 제를 배신한 바 있는 초를 격파하고 강화를 맺었다. 그 후 합종세력을 바탕으로 진을 공격하여 승리하여 합종으로써는 진에 대항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진과 함곡관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여 제 - 진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제가 진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조가 발전했다. 조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여세를 몰아 중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내란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에 빠졌는데 진이 이 틈을 타서 조의 내정에 간섭하게 된다. 이후 제와 진은 잠시 연합하여 서로 싸우지 않았는데 이 사이 제는 송을 진은 한 위를 공격하였다. 이 결과로 한 위는 날로 쇠약해지게 되고 진은 더욱 강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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