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 론
1.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2.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예술표현 '암각화'
3. 암각화의 종류
▣ 본 론
1.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2. 사진으로 분석한 대곡리 암각화
3. 암각화에 담긴 당시의 생활모습
4. 대곡리 암각화 답사현장 사진
▣ 결 론
1.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2.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예술표현 '암각화'
3. 암각화의 종류
▣ 본 론
1.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2. 사진으로 분석한 대곡리 암각화
3. 암각화에 담긴 당시의 생활모습
4. 대곡리 암각화 답사현장 사진
▣ 결 론
본문내용
수있다.
(6) 선박으로 추정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사진설명 - 해상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이다. 20명 까지 탈 수 있는 고래를 잡는 선박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선사시대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달정도를 보여주고 있고, 또 동해의 해류상황으로 추정한 고대의 해상루트는 선사시대 우산국에 거주한 정착민의 유래와 당시의 해상활동을 충분히 짐직 하게 한다.
3. 암각화에 담긴 당시의 생활모습
반구대 암각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표현기법의 변화와 그 내용으로 해양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우선 면각화에는 바다동물이 많다. 육지동물이 55마리인데, 바다동물은 68마리이다. 이에비해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는 바다동물이 21마리인데 반해 육지동물이 68마리나 된다. 바다동물이 현격하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면각화가 해양문화, 선각화가 내륙문화 혹은 농경문화에 상당히 근접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고래잡이를 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농사와 수렵생활로 옮겨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즉, 퇴적물이 쌓여감에 따라 바닷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고래의 수확량이 줄고 반구대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의 여느 지역처럼 농사를 중시하게 된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 새롭게 등장하는 그림들로 알 수 있는데, 울타리 안에 그려진 돼지나 소같은 가축의 등장은 농경사회의 발달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수렵생활도 병행했다는 것도 암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새겨진 면각화에서 집단사냥, 직접 칼을 들이대며 동물과 맞서는 그림이 보이는 반면,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서는 틀, 덫, 그물같은 도구들을 사용하는 모습 등이 보인다. 특히 울타리안에 돼지가 있고 그 앞에 사슴이 매여있는 주변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미끼를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직접 위험에 처하지 않고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유난히 고래그림이 많은 까닭은, 당시 반구대를 돌아나가는 태화강이 울산만에서 동해와 만나는데 이 곳이 바로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그 주변에 고래공원이 있을 정도이니 그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고기와 실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기름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이들에게는 농사보다 고래잡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동물그림 사이에 그려진 20여명의 사람들은 양손을 올려 춤을 추는 듯 한 모습, 나팔같은 악기를 부는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종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고래떼가 있는 부분에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제일 위쪽에는 두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약간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성기를 크게 과장한 인물이 보인다. 이렇듯 면각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물은 춤추는 모습에 성기를 과장하고 있다. 이 사람은 반구대 마을의 샤먼 혹은 선장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커다란 성기의 표현은 다산능력을 통한 종족번식의 기원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면각화에서는 제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춤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선각화에서는 제의용으로 보이는 가면만이 등장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의 상징물인 가면을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석기시대부터 수호신 성격으로 얼굴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위험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새끼를밴 동물들의 모습과 함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대곡리 암각화 답사현장 사진
자료조사를 위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답사하였다. 아래의 사진에 나타나듯이 현재 대곡리 암각화 앞쪽으로는 비교적 폭이 넓은 계곡이 흘러 실제 육안으로 확인하는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계곡 건너편에 간이 사무소를 두고 가이드를 배치해두어 답사객들이 오면 망원경으로 보이는 장면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었다.
▣ 결 론
암각화는 선사시대에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과 자신들의 삶을 바위위에 조용하게 남겨놓은 하나의 조형작품으로 암각화를 새긴 사람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암각화는 중국, 몽골, 시베리아의 암각화와 다른 느낌과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울주군 언양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3000여년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덫과 같은 도구로써 맹수를 잡고 고래사냥을 하며,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하면서 나름대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수천년전 이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른 주거지터나 고인돌 같은 고분에서 나오는 유물을 통해서도 그려볼 수 있지만,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당시의 삶을 그려놓고 있어 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 하류에 건설된 사연댐으로 인해 하절기 담수시 가장높은 경우 해발 55.2m를 넘어서서 연중 8개월 정도가 물 속에 잠겨있고, 약 4개월 정도만 물 밖으로 드러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현장 답사시에도 실제 육안으로는 확인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환경변화는 암각화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표면이 박리되고 탈락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사연댐의 담수량을 최소화하거나 유로를 변경하는 등의 방법으로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우리는 수천년동안 남아온 암각화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수 있도록 그 보존과 관리에 있어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임세권,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1999
울산대학교 박물관, 『울산 반구대 암각화』, 2000
김원용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시공사, 2003
남궁일, 『암각화에 나타나는 조형성에 관한연구
- 반구대천전리 암각화를 중심으로』,2001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사진 자료실
(6) 선박으로 추정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사진설명 - 해상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이다. 20명 까지 탈 수 있는 고래를 잡는 선박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선사시대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달정도를 보여주고 있고, 또 동해의 해류상황으로 추정한 고대의 해상루트는 선사시대 우산국에 거주한 정착민의 유래와 당시의 해상활동을 충분히 짐직 하게 한다.
3. 암각화에 담긴 당시의 생활모습
반구대 암각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표현기법의 변화와 그 내용으로 해양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우선 면각화에는 바다동물이 많다. 육지동물이 55마리인데, 바다동물은 68마리이다. 이에비해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는 바다동물이 21마리인데 반해 육지동물이 68마리나 된다. 바다동물이 현격하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면각화가 해양문화, 선각화가 내륙문화 혹은 농경문화에 상당히 근접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고래잡이를 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농사와 수렵생활로 옮겨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즉, 퇴적물이 쌓여감에 따라 바닷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고래의 수확량이 줄고 반구대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의 여느 지역처럼 농사를 중시하게 된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 새롭게 등장하는 그림들로 알 수 있는데, 울타리 안에 그려진 돼지나 소같은 가축의 등장은 농경사회의 발달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수렵생활도 병행했다는 것도 암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새겨진 면각화에서 집단사냥, 직접 칼을 들이대며 동물과 맞서는 그림이 보이는 반면, 나중에 새겨진 선각화에서는 틀, 덫, 그물같은 도구들을 사용하는 모습 등이 보인다. 특히 울타리안에 돼지가 있고 그 앞에 사슴이 매여있는 주변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미끼를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직접 위험에 처하지 않고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유난히 고래그림이 많은 까닭은, 당시 반구대를 돌아나가는 태화강이 울산만에서 동해와 만나는데 이 곳이 바로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그 주변에 고래공원이 있을 정도이니 그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고기와 실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기름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이들에게는 농사보다 고래잡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동물그림 사이에 그려진 20여명의 사람들은 양손을 올려 춤을 추는 듯 한 모습, 나팔같은 악기를 부는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종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고래떼가 있는 부분에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제일 위쪽에는 두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약간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성기를 크게 과장한 인물이 보인다. 이렇듯 면각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물은 춤추는 모습에 성기를 과장하고 있다. 이 사람은 반구대 마을의 샤먼 혹은 선장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커다란 성기의 표현은 다산능력을 통한 종족번식의 기원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면각화에서는 제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춤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선각화에서는 제의용으로 보이는 가면만이 등장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의 상징물인 가면을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석기시대부터 수호신 성격으로 얼굴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위험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새끼를밴 동물들의 모습과 함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대곡리 암각화 답사현장 사진
자료조사를 위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답사하였다. 아래의 사진에 나타나듯이 현재 대곡리 암각화 앞쪽으로는 비교적 폭이 넓은 계곡이 흘러 실제 육안으로 확인하는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계곡 건너편에 간이 사무소를 두고 가이드를 배치해두어 답사객들이 오면 망원경으로 보이는 장면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었다.
▣ 결 론
암각화는 선사시대에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과 자신들의 삶을 바위위에 조용하게 남겨놓은 하나의 조형작품으로 암각화를 새긴 사람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암각화는 중국, 몽골, 시베리아의 암각화와 다른 느낌과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울주군 언양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3000여년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덫과 같은 도구로써 맹수를 잡고 고래사냥을 하며,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하면서 나름대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수천년전 이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른 주거지터나 고인돌 같은 고분에서 나오는 유물을 통해서도 그려볼 수 있지만,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당시의 삶을 그려놓고 있어 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 하류에 건설된 사연댐으로 인해 하절기 담수시 가장높은 경우 해발 55.2m를 넘어서서 연중 8개월 정도가 물 속에 잠겨있고, 약 4개월 정도만 물 밖으로 드러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현장 답사시에도 실제 육안으로는 확인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환경변화는 암각화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표면이 박리되고 탈락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사연댐의 담수량을 최소화하거나 유로를 변경하는 등의 방법으로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우리는 수천년동안 남아온 암각화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수 있도록 그 보존과 관리에 있어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임세권,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1999
울산대학교 박물관, 『울산 반구대 암각화』, 2000
김원용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시공사, 2003
남궁일, 『암각화에 나타나는 조형성에 관한연구
- 반구대천전리 암각화를 중심으로』,2001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사진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