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서 론
II.본 론
1. 마르코 폴로의 생애
2. ‘동방견문록‘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1)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동방 여행기였나?
(2) ‘동방견문록’의 인기를 말한다. 필사본만 무려 140여종.
(3) ‘동방견문록’의 서술자는 두 명?
3. ‘동방견문록’ 이 움직인 세계사- 지리상의 대 발견.
(1). 인도 찾아 떠났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다.
(2) “우리는 향료를 찾으러 떠난다!”
(3) 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4. ‘동방견문록’의 오해와 진실
(1) 쿠빌라이 원정대는 살아 있었다?
(2) 폴로 형제가 원나라에 투석기를 들여왔다고?
III.결 론
II.본 론
1. 마르코 폴로의 생애
2. ‘동방견문록‘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1)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동방 여행기였나?
(2) ‘동방견문록’의 인기를 말한다. 필사본만 무려 140여종.
(3) ‘동방견문록’의 서술자는 두 명?
3. ‘동방견문록’ 이 움직인 세계사- 지리상의 대 발견.
(1). 인도 찾아 떠났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다.
(2) “우리는 향료를 찾으러 떠난다!”
(3) 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4. ‘동방견문록’의 오해와 진실
(1) 쿠빌라이 원정대는 살아 있었다?
(2) 폴로 형제가 원나라에 투석기를 들여왔다고?
III.결 론
본문내용
개척한 최초의 포르투갈인 이었다.
(3) 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벤토 드 고에스>
바스코 다 가마보다 한 세기 정도 후에 포르투갈에서 또 한명의 탐험가가 역사의 한 줄을 채웠으니 바로 군인이었던 고에스였다. 그는 16세기 당시의 중국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카타이’가 같은 국가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페르시아 상인으로 가장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1602년 아그라에서 출발하여 1606년 쑤저우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베이징에 있던 마테오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회답으로 중국과 카타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0일 뒤에 그곳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고에스의 여행 기록을 리치가 편집하여 낸 여행기는 17세기 중아아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4. ‘동방견문록’의 오해와 진실
‘동방견문록‘은 13세기의 중국 사회에 대해 상당부분 정확하게 기술 하고 있으나 사실과 모두 일치 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두지도 않았으므로 신이 아닌 이상 기억에 착오도 있었을 것이며,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언어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역하거나, 종교적인 이유 또는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내용을 첨삭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이류로 책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것들이 종종 눈에 뛴다.
(1)쿠빌라이 원정대는 살아 있었다?
지팡구섬에 대한 이야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지팡구를 정복하기 위해 떠난 쿠빌라이의 원정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본문에서는 쿠빌라이가 원정대를 보낸 것이 1264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인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1274년과 1281년에 쿠빌라이의 대륙을 통일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동쪽의 섬나라 일본까지 정복할 생각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그러나 시기를 잘 맞추지 못했는지, 하늘의 뜻이었는지 두 차례의 원정 모두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설명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는 좀 다르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원정대 일부는 태풍을 만나 섬에서 잠깐 피신하고 있다가 미처 고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작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치러 왔을 때 숨어 있다가 물래 다른 통로를 통해 몰래 탈출하여 수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탈출하여 했으나 일본인들에게 잡혀 처형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쿠빌라이의 실패한 원정에 대해 중국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간 이야기를 마르코 폴로가 그대로 전해 듣고 이야기한 것인 듯하다.
(2) 폴로 형제가 원나라에 투석기를 들여왔다고?
“......당시 황제의 정원에 머물고 있던 니콜로와 마페오 형제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황제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서방의 기구를 제작할 것을 청했다. 그 기계는 112킬로그램의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었다.....”
쿠빌라이가 사얀푸를 정복하려 했지만 지리적 조건상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3) 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벤토 드 고에스>
바스코 다 가마보다 한 세기 정도 후에 포르투갈에서 또 한명의 탐험가가 역사의 한 줄을 채웠으니 바로 군인이었던 고에스였다. 그는 16세기 당시의 중국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카타이’가 같은 국가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페르시아 상인으로 가장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1602년 아그라에서 출발하여 1606년 쑤저우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베이징에 있던 마테오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회답으로 중국과 카타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0일 뒤에 그곳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고에스의 여행 기록을 리치가 편집하여 낸 여행기는 17세기 중아아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4. ‘동방견문록’의 오해와 진실
‘동방견문록‘은 13세기의 중국 사회에 대해 상당부분 정확하게 기술 하고 있으나 사실과 모두 일치 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두지도 않았으므로 신이 아닌 이상 기억에 착오도 있었을 것이며,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언어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역하거나, 종교적인 이유 또는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내용을 첨삭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이류로 책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것들이 종종 눈에 뛴다.
(1)쿠빌라이 원정대는 살아 있었다?
지팡구섬에 대한 이야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지팡구를 정복하기 위해 떠난 쿠빌라이의 원정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본문에서는 쿠빌라이가 원정대를 보낸 것이 1264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인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1274년과 1281년에 쿠빌라이의 대륙을 통일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동쪽의 섬나라 일본까지 정복할 생각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그러나 시기를 잘 맞추지 못했는지, 하늘의 뜻이었는지 두 차례의 원정 모두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설명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는 좀 다르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원정대 일부는 태풍을 만나 섬에서 잠깐 피신하고 있다가 미처 고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작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치러 왔을 때 숨어 있다가 물래 다른 통로를 통해 몰래 탈출하여 수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탈출하여 했으나 일본인들에게 잡혀 처형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쿠빌라이의 실패한 원정에 대해 중국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간 이야기를 마르코 폴로가 그대로 전해 듣고 이야기한 것인 듯하다.
(2) 폴로 형제가 원나라에 투석기를 들여왔다고?
“......당시 황제의 정원에 머물고 있던 니콜로와 마페오 형제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황제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서방의 기구를 제작할 것을 청했다. 그 기계는 112킬로그램의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었다.....”
쿠빌라이가 사얀푸를 정복하려 했지만 지리적 조건상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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