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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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리 말
2. 을미사변의 추이
(1) 을미사변의 배경
(2) 을미사변의 전개
3.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4. 맺 음 말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본다.
조선정부는 러시아의 국력이 일본의 국력보다 10배정도 크다고 여겨져, 러시아는 잔혹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우방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장차 가까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아 새롭게 개편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그리며,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어처를 옮긴 직후 김홍집 일파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주도하고 국모 시해를 방조한 김홍집, 정병하가 그날로 서민들에게 맞아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곧, 정권은 고종을 비롯한 동도서기파로 이양되었다. 고종이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김. 그 사이 황후의 국장(國葬)을 연기하며 자주와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대개 왕실의 국장은 3개월을 넘기지않는 것이 관례인데, 황후의 국장은 3년을 연기한 것이다. 이는 자주와 독립에 대한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 추진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로 파악된다.
4. 맺 음 말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러일의 대립 속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조선 침투를 전쟁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차단시키려는 선수조치였고, 아관파천은 러시아가 이 같은 일본의 도전에 직면해 역시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대응한 조치였다. 즉,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인 황후를 시해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자국의 권익을 수호하려 한 데 반해, 러시아는 주권자인 고종을 자국 공사관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일본의 도전에 대응하려 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미우라 공사가 주모하는 개인적 차원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는 면에서, 일본의 국익 수호를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로서 일본 정부의 개입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대내외적으로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황후의 개화정책이 가지는 모순성에 치중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황후가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내세운 민씨정권이 국내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황후의 개화정책을 국내 관료들과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국사편찬위원회 1999
-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 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지식산업사 2001
- 이종범 외 《한국근현대사입문》혜안 1995
-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효형출판 2001
  • 가격1,1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8.09.19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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