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화기
1.복식변천의 요인
2. 복식의 변화
2. 일제 강점기
1.복식변천의 요인
2. 복식의 변화
1.복식변천의 요인
2. 복식의 변화
2. 일제 강점기
1.복식변천의 요인
2. 복식의 변화
본문내용
러 들어온 습관이며 상투와 망건도 처음에는 신규이던 것이 세인이 하게 됨으로써 국가의 속제를 이루게 된 것이라 하였다. 또 단발하면 위생적이고 활동에 편리하며, 기르기에 힘들고 꾸미기에 불편한 것은 고사하더라도 개명한 오늘날에 이러한 구습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복색을 바꾸고 단발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여 유신하는 정치에 복종케 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때 단발에 맞취 모자와 신에 대하여 제안하였는데 관은 외국 것을 모방하되 재료는 국산을 사용하고, 의복도 모양은 외국 것이되 주(紬) 면(綿) 포(布) 저(苧)를 사용하고, 신은 구제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백정을 면천하여 칠립을 쓰는 것을 허락하였다.
⑤황제와 황후의 복장 변화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복장도 달라졌다. 즉 상복은 황색 곤룡포를 입고, 신하의 관도 1품은 5량에서 7량으로 고쳤다. 고종황제는 십이류면 십이장복으로, 황태자는 구류면 구장복, 친왕은 팔류면 칠장보기었으며, 백관의 제복은 관은 정 종1품은 7량, 7품 1량, 의는 흑색의 라(羅)로 하였다.
왕비의 예복도 고종이 황제위에 오름에 따라 황후 예복을 준용하였다. 황후의 대례복에는 구룡사봉관에 심청색 적의였으며, 소례복은 황색원삼에 보는 금사용봉문이었다. 왕비는 구휘이봉관에 청색 국의 만봉운문흉배, 친왕비의 원삼은 화봉금박이었다.
⑥여학생 교복 제정
신식 여학교가 생긴 후에도 여학생들이 입엇던 옷은 주로 저고리에 치마였다. 치마는 옆트임이 있는 자락치마였으며, 1900년대 전후 한복은 저고리 길이가 짧고 품과 소매통이 좁은 단소한 형이었다. 최초의 여학교 교복 제정은 이화학당에서 실시되었으며, 경제적이고 실정에 맞는 빛깔의 교복을 정하여 다홍색 긴치마에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처음으로 양장 교복을 입은 학교는 진명여학교로, 모자를 쓰고 양장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옷은 지금의 간호원복과 비슷한 것으로 자주색 서지 옷감으로 칼라를 세운 영국 귀족식 원피스 모양이었다. 모자는 보닛(bonnet)인데 겨울에는 분홍색 안을 댄 것을 쓰고, 여름에는 같은 형의 밀짚모자를 썼다.
⑦한복의 개량
여성의 근대 교육으로 가치관이 변화되고 내외법 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면서 여성 단체는 장옷 폐지와 의복 개량 운동을 추진하는 세력이 되었다. 신교육에 의하여 복식 개량의 필연성이 대두하면서 한복 개량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개량의 골자는 쓰개치마를 폐지하고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여자저고리는 길이가 겨드랑이를 가리기 어려운 정도로 짧았다.
한편 우리 옷의 결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양복으로 개량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제국신문은 전통적인 치마저고리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다 양복의 이점을 살리는 개량복을 제시하였다. 저고리나 적삼은 앞섶과 뒤섶을 조금 길게 하여 수구와 도련에는 선을 두르거나 양복 모양으로 무엇을 아로새겨 달고, 치마는 도랑치마로 하되 오른쪽으로 입고 바른쪽으로 입는 폐단이 없이 통치마로 만들어서 걸음을 걸을 때에 치맛자락이 벌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신발도 개량하게 하여 양반층 부녀자들이 착용하는 비경제적인 금단혜 대신에 양혜와 비슷한 모양의 피제반혜를 착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⑧쓰개와 장옷 벗기
여성의 사회진출로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게 되었다. 또한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게 되면서 저고리는 길어지고 치마는 짧아지면서 통치마가 등장하고 한복의 개량은 그 당시 신문의 언론계몽의 역할도 컸다. 사회에 진출한 또는 개화한 일부 고관부인들은 이때 이미 쓰개를 벗고 자유로이 행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신문은 사치스러운 양장이나 일본복을 입는 것을 경고하면서 한국 여성의 옷을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개량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1908년 이화학당에서 쓰개치마가 사라지게 되었고, 같은 해 연동여학교에서, 마지막으로 1911년 배화학당에서 쓰개치마가 금지되었다. 배화학당에서는 1914년부터 쓰개치마를 벗는 대신 우산을 하나씩 내주어 외출할 때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하였다.
1900년대가 되자 장옷 벗기는 매우 강하게 논의되었다. 여학생이나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을 위하여 의복을 개량하자는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장옷을 폐지하자고 하였다. 1910년 전후 양산은 장옷 폐지에 대한 대용물로서 보급이 크게 증대하였다. 1907년의 여자 차림은 남자 저고리에 머리는 서양 부인의 머리같이 쪽지고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우산만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우산이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될 때는 비나 해 가리개가 아닌 내외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양장이나 한복에도 신여성이나 여학생들 사이에 유행하여 개화한 여성 대부분은 양산을 들고 다녔다.
한편 모자는 이때까지도 여성이 이용하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없이 남성 것과 함께 제작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 서울에서 이홍래가 여모제조회사를 설립하였고,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⑨양복의 착용
1897년의 광무개혁은 신구 사상을 절충하여 근대화를 제도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하는 의도에서 단행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고 일반인에게도 양복 착용을 정식으로 인정함으로써 양복이 일반화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양복을 착용한 사람들은 관복을 입었던 관리들이다. 이들은 김옥균 · 서광범 · 유길준 · 홍영식 · 윤치호 등 개화파 정객들로, 1881년 신사유람단 또는 수신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온 사람들이다. 한편 1900년 양복화 이후 외국 대사로는 처음으로 1901년 주영 · 주벨기에 3등 서기관 이한응이 런던에서 부임할 때 양복을 입었으며 그의 인품과 양복 차림이 특출하여 외국 정부와 조선 왕실에서 젠틀맨 칭호를 처음 받은 사람이 되었다. 1904년 초빙대사가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으로 갈 때 수구파인 이지용 · 어윤적 등 수행원도 양복을 입었다. 6월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원들이, 10월에는 외무부의 직원 일동이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다. 학부의 직원과 학생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으며, 1906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단발과 양복 착용은 더욱 활발하게
⑤황제와 황후의 복장 변화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복장도 달라졌다. 즉 상복은 황색 곤룡포를 입고, 신하의 관도 1품은 5량에서 7량으로 고쳤다. 고종황제는 십이류면 십이장복으로, 황태자는 구류면 구장복, 친왕은 팔류면 칠장보기었으며, 백관의 제복은 관은 정 종1품은 7량, 7품 1량, 의는 흑색의 라(羅)로 하였다.
왕비의 예복도 고종이 황제위에 오름에 따라 황후 예복을 준용하였다. 황후의 대례복에는 구룡사봉관에 심청색 적의였으며, 소례복은 황색원삼에 보는 금사용봉문이었다. 왕비는 구휘이봉관에 청색 국의 만봉운문흉배, 친왕비의 원삼은 화봉금박이었다.
⑥여학생 교복 제정
신식 여학교가 생긴 후에도 여학생들이 입엇던 옷은 주로 저고리에 치마였다. 치마는 옆트임이 있는 자락치마였으며, 1900년대 전후 한복은 저고리 길이가 짧고 품과 소매통이 좁은 단소한 형이었다. 최초의 여학교 교복 제정은 이화학당에서 실시되었으며, 경제적이고 실정에 맞는 빛깔의 교복을 정하여 다홍색 긴치마에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처음으로 양장 교복을 입은 학교는 진명여학교로, 모자를 쓰고 양장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옷은 지금의 간호원복과 비슷한 것으로 자주색 서지 옷감으로 칼라를 세운 영국 귀족식 원피스 모양이었다. 모자는 보닛(bonnet)인데 겨울에는 분홍색 안을 댄 것을 쓰고, 여름에는 같은 형의 밀짚모자를 썼다.
⑦한복의 개량
여성의 근대 교육으로 가치관이 변화되고 내외법 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면서 여성 단체는 장옷 폐지와 의복 개량 운동을 추진하는 세력이 되었다. 신교육에 의하여 복식 개량의 필연성이 대두하면서 한복 개량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개량의 골자는 쓰개치마를 폐지하고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여자저고리는 길이가 겨드랑이를 가리기 어려운 정도로 짧았다.
한편 우리 옷의 결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양복으로 개량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제국신문은 전통적인 치마저고리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다 양복의 이점을 살리는 개량복을 제시하였다. 저고리나 적삼은 앞섶과 뒤섶을 조금 길게 하여 수구와 도련에는 선을 두르거나 양복 모양으로 무엇을 아로새겨 달고, 치마는 도랑치마로 하되 오른쪽으로 입고 바른쪽으로 입는 폐단이 없이 통치마로 만들어서 걸음을 걸을 때에 치맛자락이 벌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신발도 개량하게 하여 양반층 부녀자들이 착용하는 비경제적인 금단혜 대신에 양혜와 비슷한 모양의 피제반혜를 착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⑧쓰개와 장옷 벗기
여성의 사회진출로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게 되었다. 또한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게 되면서 저고리는 길어지고 치마는 짧아지면서 통치마가 등장하고 한복의 개량은 그 당시 신문의 언론계몽의 역할도 컸다. 사회에 진출한 또는 개화한 일부 고관부인들은 이때 이미 쓰개를 벗고 자유로이 행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신문은 사치스러운 양장이나 일본복을 입는 것을 경고하면서 한국 여성의 옷을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개량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1908년 이화학당에서 쓰개치마가 사라지게 되었고, 같은 해 연동여학교에서, 마지막으로 1911년 배화학당에서 쓰개치마가 금지되었다. 배화학당에서는 1914년부터 쓰개치마를 벗는 대신 우산을 하나씩 내주어 외출할 때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하였다.
1900년대가 되자 장옷 벗기는 매우 강하게 논의되었다. 여학생이나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을 위하여 의복을 개량하자는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장옷을 폐지하자고 하였다. 1910년 전후 양산은 장옷 폐지에 대한 대용물로서 보급이 크게 증대하였다. 1907년의 여자 차림은 남자 저고리에 머리는 서양 부인의 머리같이 쪽지고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우산만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우산이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될 때는 비나 해 가리개가 아닌 내외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양장이나 한복에도 신여성이나 여학생들 사이에 유행하여 개화한 여성 대부분은 양산을 들고 다녔다.
한편 모자는 이때까지도 여성이 이용하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없이 남성 것과 함께 제작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 서울에서 이홍래가 여모제조회사를 설립하였고,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⑨양복의 착용
1897년의 광무개혁은 신구 사상을 절충하여 근대화를 제도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하는 의도에서 단행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고 일반인에게도 양복 착용을 정식으로 인정함으로써 양복이 일반화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양복을 착용한 사람들은 관복을 입었던 관리들이다. 이들은 김옥균 · 서광범 · 유길준 · 홍영식 · 윤치호 등 개화파 정객들로, 1881년 신사유람단 또는 수신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온 사람들이다. 한편 1900년 양복화 이후 외국 대사로는 처음으로 1901년 주영 · 주벨기에 3등 서기관 이한응이 런던에서 부임할 때 양복을 입었으며 그의 인품과 양복 차림이 특출하여 외국 정부와 조선 왕실에서 젠틀맨 칭호를 처음 받은 사람이 되었다. 1904년 초빙대사가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으로 갈 때 수구파인 이지용 · 어윤적 등 수행원도 양복을 입었다. 6월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원들이, 10월에는 외무부의 직원 일동이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다. 학부의 직원과 학생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으며, 1906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단발과 양복 착용은 더욱 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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