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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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베리아에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시베리아에 대한 궁금증은 뭘까?
2. 시베리아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아시나요?
3. 문학작품에서의 시베리아의 모습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4. 역사속에서 시베리아는 어떤 곳이었을까?
5. 시베리아의 수수께끼를 알고 계시나요?
6. 시베리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7. 겨울의 심장이라 불리는 시베리아에는 어떠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본문내용

일부터 6월 30일까지 순록에 짐을 싣고 비르호얀스크 산맥을 넘어 야나 강 줄기까지 600km를 종단하였다. 1991년 7월 1일뷰토 9월 5일까지는 전나무 뎃목과 카누로 1,000km를 저어 북극해까지 종단하였다. 시베리아 종단에 성공한 이 마지막 날은 맑고 깨끗하지만 역시 몹시 추운 날이었다.
탐험대 당사자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진에 나타나는 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탐험을 동경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 우리나라에게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2000년 6월 15일의 남북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그리고 경의선 철도 복원 합의는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푸틴 대통령은 남북한 양측에 대해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였다. 남북한 철도 연결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TSR은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중요한 국책사업으로 1891년 착공하여 1916년에 오늘날의 모습과 같은 블라디보스톡-모스크바간 9,297km의 철도 노선이 완성되었다. 착공한지 12년만인 1903년에는 이미 7,500km가 건설되면서 러시아의 중심부에서 북만주를 통해 극동연해주를 연결하는 동철도를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까지 물자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TSR 건설의 실질적인 총책임을 맡았던 Vitte 재무장관은 TSR 건설사업을 19세기 세계적 규모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하면서 이 TSR건설을 통하여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는 명실공히 유럽과 아시아간의 문물이 통과하는 세계중심국이 될 것이며, TSR은 바로 동서양을 연결하는 대동맥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제정러시아가 단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막대한 재정지출을 강행하면서 TSR 건설을 추진한 것은 시베리아의 개발과 극동에 있어서의 군사력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TKR과 TSR이 연결되는 것은 남북한과 동서양간의 인원과 물자의 자유로운 와래를 통한 경제적인 이득의 차원을 훨씬 넘어 남 북한간의 평화공존과 교류 협력 그리고 궁극적인 평화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가령 TKR과 TSR을 통해 남 북한 사람들은 물론 동서양의 각국 사람들이 오가고 역마다 도시마다 이런 다국적 인파들이 자유롭게 방문하고 다국적 상품들과 문화예술품들이 교류된다면 이것은 북한간의 개방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런 상황이 되면 남북한간의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러시아는 수백 년 동안 숙원과제로 삼고 있는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도 꼭 성공시켜야할 사업이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길이를 나타내는 9288km 표시탑이 있다.
라. 당시 중세 유럽인들의 모피유행 때문에 동물들의 약탈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모피를 얻기 위해 덫을 놓아 잠승을 잡는 것이 19세기까지 주요 교역의 대상이었다. 초기에는 유럽 시장에 나오는 모피가 유럽에서 잡힌 짐승의 것이었으나, 점점 고갈이 되어 가면서 모피를 얻기위해 점령 지역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고, 특히 유럽인들이 동쪽으로는 러시아 시베리아로, 서쪽으로는 북아메리카까지 뻗어나갔다.
사실 모피 무역은 러시아의 유목 부족으로부터 모피를 구해 오던 로마 제국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유럽에서 시베리아나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하게 된 계기는 중세 유럽에서 모피가 보온용뿐만 아니라 신분의 상징으로 상류 사회 복식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상류 사회의 구성원들만이 모피를 입을 수 있었다. 1337년 영국 의회는 모피를 입을 권리를 왕족과 연간 수입이 100파운드가 넘는 귀족층에 한정했다.
가죽 하나를 만든다는 것은 짐승 한 마리를 죽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피의 질을 유지하려면 덫으로 잡아야만 했다. 중세 유럽에서 모피를 얻기 위해 잡은 동물은 다람쥐, 족제비, 담비, 검은 담비, 여우 등 대개 작은 것들이었다. 그때그때 그 동물이 얼마나 희귀했는지, 혹은 어떤 동물의 털이 유행했는지에 따라 모피의 가치가 변해 갔다. 처음에는 각 지역에서 모피를 가진 동물을 구할 수 있었으므로 교역의 범위도 좁았다. 하지만 동물의 수는 곧 줄어들어 사냥이 가능한 몇몇 곳으로 정해졌다. 영국의 상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부터 많이 사들였으며, 독일과 이탈리아 등 남부 요럽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 지역 내에서 가죽을 팔고 사는 것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남서스코틀랜드 덤프리스의 시장에서는 19세기까지도 한 해에 7만 마리의 토끼와 20만 마리의 들토끼와 20만 마리의 산토끼 가죽이 매매되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산간 지대가 점점 줄어둘고, 또한 지나친 사냥으로 동물들이 줄어들면서 교역의 중심지는 점점 사람이 살지 않는 북부의 삼림 지대로 이동해갔다. 특히 15세기에 검은 담비는 서쪽으로 핀란드에 이루기까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베리아에서만 볼 수있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자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동물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고는 시베리아뿐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의 모피 수요는 계속되어, 러시아 상인들은 이 광대한 미개의 땅에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중세 때 서부 러시아에서 그랫듯이, 곧 시베리아에서 모피가 주산물이 되었으며 화폐 구실까지 했다. 17세기 중만에 이르면 러시아 정부의 수입 중 3분의 1 이상이 모피 교역에서 나왔다.
초기에 시베리에 들어간 사냥꾼들은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어찌나 순진했는지 집까지 기어들어와서,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의 살육이 일어나 한 지역의 동물이 없어지면 사냥꾼들은 동물을 찾아 더 동쪽으로 들어갔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시베리아와 같이 광대한 지역에서조차 모피 동물은 거의 멸종되었고 러시아 상인들은 북태평양 군도의 해달에게 눈을 돌렸다. 1705년에서 1790년 사이에 25만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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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5
  • 저작시기2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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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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