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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연구 목적
Ⅱ. 이론적 배경
1.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
1.1 작가의 삶
1.2 작가의 문학세계
2. 수직 상승 이미지의 표현
3. 부재한 공간의 의미 고찰
3.1 빈집, 빈방으로 대표되는 기형도의 詩
3.2 신 경숙의 「빈집」
4.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5. 절망과 죽음의 예감
6. 부조리한 시대의 절망
Ⅲ. 결론 및 제언
참 고 문헌
1. 연구 목적
Ⅱ. 이론적 배경
1.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
1.1 작가의 삶
1.2 작가의 문학세계
2. 수직 상승 이미지의 표현
3. 부재한 공간의 의미 고찰
3.1 빈집, 빈방으로 대표되는 기형도의 詩
3.2 신 경숙의 「빈집」
4.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5. 절망과 죽음의 예감
6. 부조리한 시대의 절망
Ⅲ. 결론 및 제언
참 고 문헌
본문내용
.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의 시가 화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한 자아가, 환상으로의 진입을 통하여 불화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좌절하는 모습을 극명히 드러낸 데 그의 시세계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방법으로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한 치열한 영혼의 방황을 굳이 글로써 표현하고픈 욕망을 느낀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곧, 환상과 현실의 극한에 위치하여 그것을 해체해버린 한 시인의 언어영상이란 삶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그 삶의 장애인 억압을 해소시킴으로써 온전한 자기해방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해방의 한 해결방식이 죽음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시인이,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죽은 구름」
라고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시작메모」
라는 비장한 자기확신에 젖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재의 그의 죽음에 덧입혀져 한갓된 낭만적 시인의 신화로 남기를 나는 거절한다. 고통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고, 자신의 몸을 누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일은 삶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지, 죽음을 통하여 삶을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존재의 한계에 직면해서 존재를 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한계에 직면해서 언어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자리에 우리는 프랑소아 비용, 보들레르를 놓아보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여 시인의 죽음을 시의 이해를 위한 손쉬운 입구로 생각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제사에 한 시인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올바른 시의 이해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요인이 많다.
지금까지 기형도 시에 대한 분석은, 그의 유년기의 가난, 아버지의 죽음, 청년기의 이별 등의 방향에서 상실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져 왔다. 김현, 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 시집해설.
거기에 그의 시적 이미지의 건조성의 문제, 낙원상실 모티브의 분석 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박철화, 집 없는 자의 길찾기, 혹은 죽음, 감각의 실존, 문학과 지성사, 1992
이러한 작업들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정신분석으로 환원하거나, 기형도 시의 특수성을 내용-형식의 종합화로 총괄하지 않는 일면적인 해명에 그쳤다고 생각된다. 거기에 시인의 죽음이란 감정적 프리미엄이 붙어 객관적 거리를 흔들어버린 경우도 발견되곤 한다.
이 글을 통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보충하고, 그의 시세계가 당대적 현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도 중요성을 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
물론 작은 그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전문
희망을 노래하는 기형도의 몇 안되는 시 중 하나인 이 시는 역설적이게도, 도저한 허무의 원형적 공간을 드러낸다. 그 공간을 되돌아봄 없이 들어가는 자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 환상이란,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숲으로 된 아름다운 성채로 들어가는 당나귀와 농부들은 되돌아 봄 없이 그저 유유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조용한 공기”나 “구름”인듯한 모습으로 신들의 상점에서 나오는 불빛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그들이 “골동품 상인”에게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골동품 상인이란 이미 인생을 알 만큼 알아버린 사람으로, 그는 더 이상 조용한 공기도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도 아닌 “죽은 구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몫이란 숲의 나무를 자르고, 쓰러진 나무를 볼 뿐, 도리없이 그 공터를 떠나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성채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삶을 뒤돌아보고 고통 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성채의 안의 세계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성채에 들어가기 위한 현재의 행위 과정 자체에 있다. 그는 그 길을 찾으려 방황하고 길을 걷는다. 이때, 우리가 성채가 상징하는 세계를 하나의 유토피아로 보고 나무를 잘라내고 들어가려 애쓰는(그러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를 현실로 갈라놓고 현실에서 유토피아로의 열망이 이 시인의 시적 동인이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희망을 위한 예비적 절망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위해 절망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신비로운 그 성 안에 농부와 당나귀가 평화롭게 살고 있으므로 자신도 그곳에 언젠가는 편입될 것이라는 꿈을 꾸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신비로운 성엔 결코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 그 신비로운 성마저도 허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절망의 이중성이 그를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신비한 성의 이미지가 유리담장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는 「전문가」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이사를 온다. 그는 그의 집 담장을 모두 빛나는 유리로 세운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다가 유리창을 박살내곤 하는데, 그는,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아이들이 이상스러워함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이 아이가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의 시가 화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한 자아가, 환상으로의 진입을 통하여 불화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좌절하는 모습을 극명히 드러낸 데 그의 시세계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방법으로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한 치열한 영혼의 방황을 굳이 글로써 표현하고픈 욕망을 느낀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곧, 환상과 현실의 극한에 위치하여 그것을 해체해버린 한 시인의 언어영상이란 삶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그 삶의 장애인 억압을 해소시킴으로써 온전한 자기해방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해방의 한 해결방식이 죽음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시인이,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죽은 구름」
라고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시작메모」
라는 비장한 자기확신에 젖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재의 그의 죽음에 덧입혀져 한갓된 낭만적 시인의 신화로 남기를 나는 거절한다. 고통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고, 자신의 몸을 누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일은 삶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지, 죽음을 통하여 삶을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존재의 한계에 직면해서 존재를 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한계에 직면해서 언어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자리에 우리는 프랑소아 비용, 보들레르를 놓아보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여 시인의 죽음을 시의 이해를 위한 손쉬운 입구로 생각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제사에 한 시인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올바른 시의 이해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요인이 많다.
지금까지 기형도 시에 대한 분석은, 그의 유년기의 가난, 아버지의 죽음, 청년기의 이별 등의 방향에서 상실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져 왔다. 김현, 영원히 닫힌 빈 방의 체험, 시집해설.
거기에 그의 시적 이미지의 건조성의 문제, 낙원상실 모티브의 분석 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박철화, 집 없는 자의 길찾기, 혹은 죽음, 감각의 실존, 문학과 지성사, 1992
이러한 작업들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정신분석으로 환원하거나, 기형도 시의 특수성을 내용-형식의 종합화로 총괄하지 않는 일면적인 해명에 그쳤다고 생각된다. 거기에 시인의 죽음이란 감정적 프리미엄이 붙어 객관적 거리를 흔들어버린 경우도 발견되곤 한다.
이 글을 통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보충하고, 그의 시세계가 당대적 현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도 중요성을 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
물론 작은 그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전문
희망을 노래하는 기형도의 몇 안되는 시 중 하나인 이 시는 역설적이게도, 도저한 허무의 원형적 공간을 드러낸다. 그 공간을 되돌아봄 없이 들어가는 자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 환상이란,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숲으로 된 아름다운 성채로 들어가는 당나귀와 농부들은 되돌아 봄 없이 그저 유유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조용한 공기”나 “구름”인듯한 모습으로 신들의 상점에서 나오는 불빛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그들이 “골동품 상인”에게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골동품 상인이란 이미 인생을 알 만큼 알아버린 사람으로, 그는 더 이상 조용한 공기도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도 아닌 “죽은 구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몫이란 숲의 나무를 자르고, 쓰러진 나무를 볼 뿐, 도리없이 그 공터를 떠나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성채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삶을 뒤돌아보고 고통 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성채의 안의 세계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성채에 들어가기 위한 현재의 행위 과정 자체에 있다. 그는 그 길을 찾으려 방황하고 길을 걷는다. 이때, 우리가 성채가 상징하는 세계를 하나의 유토피아로 보고 나무를 잘라내고 들어가려 애쓰는(그러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를 현실로 갈라놓고 현실에서 유토피아로의 열망이 이 시인의 시적 동인이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희망을 위한 예비적 절망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위해 절망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신비로운 그 성 안에 농부와 당나귀가 평화롭게 살고 있으므로 자신도 그곳에 언젠가는 편입될 것이라는 꿈을 꾸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신비로운 성엔 결코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 그 신비로운 성마저도 허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절망의 이중성이 그를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신비한 성의 이미지가 유리담장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는 「전문가」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이사를 온다. 그는 그의 집 담장을 모두 빛나는 유리로 세운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다가 유리창을 박살내곤 하는데, 그는,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아이들이 이상스러워함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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