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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세를 냈습니다. 또 레위 자손을 부양하기 위하여 모세가 정한 십일조와 모든 소득의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고위 성직자들이 착복하여 치부하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도 냈는데, 이것 역시 종종 고위 성직자들이 착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세금 외에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나 조공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금에는 토지세, 로마의 세무원에게 직접 지불하는 개인세, 유대인 수납원을 통해 바치는 간접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팔레스틴 땅이 여러 징세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경계선마다 세무소 내지 세관이 있었습니다(마 9:9, 막 2:14 참조). 세리들의 사무실이 길과 다리와 국경 지역과 호숫가 등을 지키면서 각종 사용료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 세금은 권력층을 살찌웠습니다.
농민들 수입의 약 60 퍼센트가 세리와 채권자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자가 붙는 금전 대여는 유대교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었지만 세금에 허덕이던 납세자들은 고리대금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고리대금 업자들은 연리 24 퍼센트(월 2부)의 이자를 채무자들에게서 뜯어냈습니다. 채권자와 때로는 왕까지 변제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 부채가 청산될 때까지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리하여 중산층과 소자산층이 사라진 반면, 왕을 중심한 관료들과 성전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신이상이 된 자들(소위 마귀에 걸린 자들)과 병든 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집뿐만 아니라 의복마저 저당 잡고 마지막에는 자식들과 함께 고리대금 업자의 종이 되어 고엘(희생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말함)로도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과부들도 있었습니다. 부의 잉여는 모두 지배 계층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집결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가난한 대중의 경제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반발은 극도로 심화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반란이 거듭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반란자들을 생포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부인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아힘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계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A. (1) 사제들
B. (2) 레위인 및 종교 지도자층(바리새인, 랍비 등)
C. (3) 이스라엘인(순수한 혈통, 평신도)
D. (4) 사제들의 사생아
(5) 이방인 개종자들
(6) 성전 노예의 개종자들
E. (7) 사생아
(8)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들
(9) 미아들
(10) 인공으로 거세된 자들
F. (11) 자연적으로 거세된 자들
(12) 성 불구자들
(13) 양성(兩性) 소유자들
G. (14) 이방인, 세리들
참 이스라엘은 A∼C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D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속할 수는 있으나 종교적 지도층이 될 수 없었습니다. E항의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한 계층으로 A∼C의 계층과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F항의 사람들에게는 결혼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고, G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대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은 출생과 결혼을 통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빈민들은 억압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여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지주들이나 로마 제국에 의하여 파송된 자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으며, 주로 동굴에 은거하면서 다른 지역의 도적들과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적의 두목들은 “왕”으로 자처하였으며, 자기를 “메시야”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요세푸스, 유다전쟁사, 제1권 참조).
□ 예수 탄생 시
정치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 민족은 분열되고 무력했다. 고대세계의 대제국들(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시리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유대는 이미 바빌론 포로시대(BC 586~538)부터 정치적 독립을 잃었고, 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 초기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BC 3세기)하에, 그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BC 2세기)에, 마지막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AD 70).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유다 나라가 존재했다. 제사장 가족인 마카베오 가문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후 통치했다(BC 168~165).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내적 분열과 격렬한 왕권쟁탈로 끝나게 되었다.
□ 발표 내용에 대한 조의 주관적 결론
예수 탄생 시대에 통치 국가는 로마 제국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일개 통치 국가에 불과하였고 왕은 헤롯대왕이었고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 , 경제 , 사회적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의 기독교를 배척하거나 부패되어 있는 제도에 반발하여 각 종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하고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 전까지 나라와 영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 국에 흩어져 살면서 세계2차대전의 히틀러가 유대민족을 대학살한 사례처럼 너무나도 많은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유랑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는 역사적 사실에는 중점을 두지 않고 내린 결론은 유대인이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민족이 하나가 되어 서로 단합하지 않고 지배층이 서로의 이익만을 따진 결과 때문에 이렇게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사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현대 우리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인용 자료 출처
①서적 : 예수그리스도 바로 보기 (허도익 : 한들 출판사)
2천 년 동안의 정신3 (폴 존슨)
②인터넷
http://cafe.naver.com/dltkdi581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954 ( 네이버 까페 : 물댄 동산 교회)
http://blog.naver.com/kws6943?Redirect=Log&logNo=50013281934
(글쓴이: 김균진 교수 정리편: 문흥일 목사)
농민들 수입의 약 60 퍼센트가 세리와 채권자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자가 붙는 금전 대여는 유대교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었지만 세금에 허덕이던 납세자들은 고리대금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고리대금 업자들은 연리 24 퍼센트(월 2부)의 이자를 채무자들에게서 뜯어냈습니다. 채권자와 때로는 왕까지 변제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 부채가 청산될 때까지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리하여 중산층과 소자산층이 사라진 반면, 왕을 중심한 관료들과 성전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신이상이 된 자들(소위 마귀에 걸린 자들)과 병든 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집뿐만 아니라 의복마저 저당 잡고 마지막에는 자식들과 함께 고리대금 업자의 종이 되어 고엘(희생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말함)로도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과부들도 있었습니다. 부의 잉여는 모두 지배 계층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집결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가난한 대중의 경제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반발은 극도로 심화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반란이 거듭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반란자들을 생포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부인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아힘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계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A. (1) 사제들
B. (2) 레위인 및 종교 지도자층(바리새인, 랍비 등)
C. (3) 이스라엘인(순수한 혈통, 평신도)
D. (4) 사제들의 사생아
(5) 이방인 개종자들
(6) 성전 노예의 개종자들
E. (7) 사생아
(8)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들
(9) 미아들
(10) 인공으로 거세된 자들
F. (11) 자연적으로 거세된 자들
(12) 성 불구자들
(13) 양성(兩性) 소유자들
G. (14) 이방인, 세리들
참 이스라엘은 A∼C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D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속할 수는 있으나 종교적 지도층이 될 수 없었습니다. E항의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한 계층으로 A∼C의 계층과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F항의 사람들에게는 결혼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고, G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대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은 출생과 결혼을 통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빈민들은 억압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여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지주들이나 로마 제국에 의하여 파송된 자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으며, 주로 동굴에 은거하면서 다른 지역의 도적들과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적의 두목들은 “왕”으로 자처하였으며, 자기를 “메시야”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요세푸스, 유다전쟁사, 제1권 참조).
□ 예수 탄생 시
정치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 민족은 분열되고 무력했다. 고대세계의 대제국들(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시리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유대는 이미 바빌론 포로시대(BC 586~538)부터 정치적 독립을 잃었고, 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 초기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BC 3세기)하에, 그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BC 2세기)에, 마지막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AD 70).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유다 나라가 존재했다. 제사장 가족인 마카베오 가문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후 통치했다(BC 168~165).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내적 분열과 격렬한 왕권쟁탈로 끝나게 되었다.
□ 발표 내용에 대한 조의 주관적 결론
예수 탄생 시대에 통치 국가는 로마 제국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일개 통치 국가에 불과하였고 왕은 헤롯대왕이었고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 , 경제 , 사회적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의 기독교를 배척하거나 부패되어 있는 제도에 반발하여 각 종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하고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 전까지 나라와 영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 국에 흩어져 살면서 세계2차대전의 히틀러가 유대민족을 대학살한 사례처럼 너무나도 많은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유랑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는 역사적 사실에는 중점을 두지 않고 내린 결론은 유대인이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민족이 하나가 되어 서로 단합하지 않고 지배층이 서로의 이익만을 따진 결과 때문에 이렇게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사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현대 우리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인용 자료 출처
①서적 : 예수그리스도 바로 보기 (허도익 : 한들 출판사)
2천 년 동안의 정신3 (폴 존슨)
②인터넷
http://cafe.naver.com/dltkdi581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954 ( 네이버 까페 : 물댄 동산 교회)
http://blog.naver.com/kws6943?Redirect=Log&logNo=50013281934
(글쓴이: 김균진 교수 정리편: 문흥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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