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序 論
Ⅱ. 本 論
1. 이황의 생애
2. 사상적 특징
3. 퇴계의 인간상
4. 퇴계의 학문방법과 경향
Ⅲ. 結 論
Ⅱ. 本 論
1. 이황의 생애
2. 사상적 특징
3. 퇴계의 인간상
4. 퇴계의 학문방법과 경향
Ⅲ. 結 論
본문내용
제를 두었다. 그 중 김씨 소생 중 하나가 어려서 죽었으므로 퇴계의 동기는 실상 7남매였던 셈이며 퇴계는 바로 재취 부인 박씨의 소생이다.
부친이 진사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그도 신분상으로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장래가 보장되는 양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가정 환경이 유복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태어난지 불과 7개월되던 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부친을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또 빈곤한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 가야 할 형편이었다.
퇴계 스스로 모친을 묘사하여 “뒤로 두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 영진(榮進)을 기뻐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였으며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그 의리(義理)를 가르쳐 주고 사정을 밝히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四君子)와 같았다” 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퇴계의 학문과 인격 형성에 모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선 퇴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퇴계의 관직은 그가 7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관직에서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그의 뜻과 어디까지나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한낱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된 것이 그의 노년기이다.
2. 사상적 특징
퇴계의 학문적 기본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道學)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修養論)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 조명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도학(道學)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居敬)<敬의 생활화>과 궁리(窮理)<진리의 탐구>라는 두 축으로 파악한다면, 이 둘운 하나의 도학을 이루는 양면으로서 ‘겉과 속’ 또는 ‘뿌리와 가지’의 유기적 일관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퇴게의 제자 정유일은 선생의 학문적 특징을 지적하여 “공경과 의리를 함께 지키고, 지식과 행위를 함께 나아가게 하며, 겉과 속이 한결같고, 뿌리와 가지를 함께 들어올리며, 큰 근원을 꿰뚫어 보고, 큰 근본을 일으켜 세운다.” 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퇴계의 학문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라는 道學의 두 축을 상호 연관시켜 포괄하면서 그 근원을 확립하고 있음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퇴계의 인간상
1) 관료로의 퇴계
퇴계는 40대 때부터 관직을 떠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노년에 모든 관직으로부터 멀어져 가려 하던 ‘고사불이’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욱 그 인상을 짙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도 집요하게 관직을 떠나려 하였을까? 우선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표면적인 이유로서 ‘사화’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45세 때 몸소 을사사화의 여파를 체험하였다. 그는 을사사화의 중핵에 말려들어 짖접 참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화의 주동 인물인 이기 등에 의하여 일단 삭직되었다가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이 역간하여 준 덕택으로 환직된 일이 있다. 그런데다 그의 형 좌윤공 해(瀣)가 이기의 모함에 빠져 장류되다가 도중에 숨지는 참극까지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정부조리에 정면으로 도전대결하는 유형의 성품이 아닌 그로서는 그 참극의 현장을 멀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 이면적인 이유로서 그의 학구욕이 지적될 수 있다. 퇴계는 그의 과거(科擧) 자체가 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곤궁 및 노모와 친구의 강권
부친이 진사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그도 신분상으로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장래가 보장되는 양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가정 환경이 유복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태어난지 불과 7개월되던 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부친을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또 빈곤한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 가야 할 형편이었다.
퇴계 스스로 모친을 묘사하여 “뒤로 두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 영진(榮進)을 기뻐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였으며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그 의리(義理)를 가르쳐 주고 사정을 밝히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四君子)와 같았다” 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퇴계의 학문과 인격 형성에 모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선 퇴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퇴계의 관직은 그가 7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관직에서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그의 뜻과 어디까지나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한낱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된 것이 그의 노년기이다.
2. 사상적 특징
퇴계의 학문적 기본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道學)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修養論)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 조명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도학(道學)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居敬)<敬의 생활화>과 궁리(窮理)<진리의 탐구>라는 두 축으로 파악한다면, 이 둘운 하나의 도학을 이루는 양면으로서 ‘겉과 속’ 또는 ‘뿌리와 가지’의 유기적 일관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퇴게의 제자 정유일은 선생의 학문적 특징을 지적하여 “공경과 의리를 함께 지키고, 지식과 행위를 함께 나아가게 하며, 겉과 속이 한결같고, 뿌리와 가지를 함께 들어올리며, 큰 근원을 꿰뚫어 보고, 큰 근본을 일으켜 세운다.” 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퇴계의 학문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라는 道學의 두 축을 상호 연관시켜 포괄하면서 그 근원을 확립하고 있음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퇴계의 인간상
1) 관료로의 퇴계
퇴계는 40대 때부터 관직을 떠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노년에 모든 관직으로부터 멀어져 가려 하던 ‘고사불이’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욱 그 인상을 짙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도 집요하게 관직을 떠나려 하였을까? 우선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표면적인 이유로서 ‘사화’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45세 때 몸소 을사사화의 여파를 체험하였다. 그는 을사사화의 중핵에 말려들어 짖접 참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화의 주동 인물인 이기 등에 의하여 일단 삭직되었다가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이 역간하여 준 덕택으로 환직된 일이 있다. 그런데다 그의 형 좌윤공 해(瀣)가 이기의 모함에 빠져 장류되다가 도중에 숨지는 참극까지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정부조리에 정면으로 도전대결하는 유형의 성품이 아닌 그로서는 그 참극의 현장을 멀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 이면적인 이유로서 그의 학구욕이 지적될 수 있다. 퇴계는 그의 과거(科擧) 자체가 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곤궁 및 노모와 친구의 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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