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987년 7ㆍ8월 노동운동
1. 서 론
2. 본 론
1980년대 이후 정치 ․ 경제적 상황
2. 노동운동의 양상
1987년 7~9월 노동운동의 주체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전개과정
1) 지역적 개시ㆍ확산기(7월 초 ~ 8월초)
2) 전국적 확산ㆍ고양기(8월 중순~하순)
3) 전국적 퇴조기
평가
성과
규모별 노동쟁의 발생 추이 ≪ 표 ≫
3) 한계 7ㆍ8월 투쟁은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역사적 한계점도 드러낸다.
Ⅲ 결론
1. 서 론
2. 본 론
1980년대 이후 정치 ․ 경제적 상황
2. 노동운동의 양상
1987년 7~9월 노동운동의 주체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전개과정
1) 지역적 개시ㆍ확산기(7월 초 ~ 8월초)
2) 전국적 확산ㆍ고양기(8월 중순~하순)
3) 전국적 퇴조기
평가
성과
규모별 노동쟁의 발생 추이 ≪ 표 ≫
3) 한계 7ㆍ8월 투쟁은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역사적 한계점도 드러낸다.
Ⅲ 결론
본문내용
등 각종 단위에서 새로운 횡적ㆍ종적 연대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역 단위 민주 노조들의 연합체나, 그룹 단위 연합체, 업종별 노조, 업종별 협의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같은 전국적 협의체 등이 속속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횡적ㆍ종적 연대의 시도들은 내외의 많은 장애들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1987년 7~9월의 노동투쟁에 대한 성과라면 기업 단위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노동조합 운동이 부활했다는 점과 노동조합 운동의 대중적 기초가 확립되었다는 점, 기업 수준에서의 노사 관계의 민주화가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노동조합 운동이 기업 단위 노조 운동에 고착되고, 고립되는 경향을 보인 점, 상급 노조의 민주화에 실패했다는 점, 노동조합 운동의 분화ㆍ분열 현상이 오히려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6월 항쟁의 성과물로 쟁취한 6ㆍ29선언의 주요내용은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확대, 정당활동보장 등 형식적 민주주의의 일정한 진보를 담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전민중의 생활상의 실질적 진보를 정치적ㆍ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것은 자유주의 부르조아 및 중산층의 정치적 지도라는 6월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6ㆍ29이후 군사권력과 그 배후의 제국주의세력은 새로운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신속히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노동자 계급은 6월 투쟁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참여하였던 일부의 노동자들과 함께 마침내 자신의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 광범위한 투쟁에 나서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억압의 완화라는 6월 투쟁의 성과를 딛고 실제로 전개된 노동자 계급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은 그 규모와 강도, 지속성 등 모든 측면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7~8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폭발된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운동으로서 국가권력과 자본가계급에 일대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로써 보수정치세력 일반에 대해 민주화의 내용으로서 노동자계급 고유의 요구를 관철하도록 강요하여 민주화의 역사적 실질적 내용을 심화ㆍ확대시킴과 동시에 이후의 민족ㆍ민주변혁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개과정
6ㆍ29 이후 9월 초순에까지 전개된 7ㆍ8월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전개범위, 양상에 따라 대체로 세 개의 시기를 나눌 수 있다. 즉 7월 초~8월 초까지 울산과 부산 및 창원ㆍ마산 등 경남ㆍ부산의 지역적 수준에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개시ㆍ확산되던 시기, 8월 중순~하순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이 전국ㆍ전산업에 걸쳐 고양되던 시기, 8월말 이후 9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냉각되던 시기이다.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기포트” 제3호 87년9월 특집호 p43~101 참고
1) 지역적 개시ㆍ확산기(7월 초 ~ 8월초)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은 6ㆍ29직후인 7월5일 울산 현대엔진 노조결성 투쟁의 성공으로 치솟았다. 계엄령 혹은 위수령까지도 각오하고 초경강탄압 정국이던 87년 4월부터 이미 노조결성을 준비해오다가 6ㆍ29이후 노조결성이 성공하자 울산의 여타 계열기업에서도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 사이에 급속히 노조결성이 시도되었다. 16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당황한 자본측이 노조설립 신고서류를 탈취하는 비열한 구시대적 탄압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이를 규탄하는 농성투쟁을 통해, 재벌의 구시대적 부당노동행위를 비난하는 언론ㆍ여론에 힘입어 노조를 인정받는 감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현대 그룹내 여타 계열기업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기업 노동자, 나아가 중소기업을 포함한 전국 노동자계급에게 보다 확고한 승림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본다.
전술을 바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서는 금속노련과 합작하여 먼저 어용노조를 결성하자 이에 대응하여 단위사업장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규모인 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이를 규탄하는 농성으로 민주노조 결성투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투쟁은 울산지역의 하청중소기업들과 온산공단으로 확대되어 재벌이 강고하게 지배하던 이 지역을 삽시간에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에 직면하여 거대 재벌ㆍ독점자본의 독재가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울산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의 불길은 부산으로 번졌다. 7월 23일 태광산업에 이어 대한조선공사, 세신정밀, 국제상사 등의 노동자들이 차례로 신규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을 통한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벌였다. 그 중 대한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지게차 등의 중장비들을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들어가 구사대와 경찰의 탄압에 맞서 무장한 자위대가 격렬하게 투쟁함으로써 요구조건의 일부를 관철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비해 국제상사에서는 대규모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연약하고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거의 패배했으나, 일부 노동자들이 회사 밖에 끈질기게 농성투쟁을 계속함으로써 부산지역 여타 기업노동자들의 각성과 투쟁의 확대에 기여했다.
7월말~8월초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창원ㆍ마산으로 곧 확대되었다. 대부분의 주요기업에서 방위산업체라는 족쇄로 노동자들은 철저히 결박하여 85년에 이으러 통일노조 등 몇 개의 노조만이 외로운 투쟁을 벌이다 그나마 어용노조로 변했던 창원공간에서 현대정공을 시발로 한국중공업, 효성중공업,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통일, 금성사, 삼성중공업, 삼미특수강 등 한국의 4대 재벌그룹 산하기업 노동자들과 여타 전국 유수의 거대기업 노동자들이 신규노조 결성투쟁을 대규모로 전개했다. 특히 통일의 노동자들은 85년의 수준 높은 투쟁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파업ㆍ농성으로 민주노조쟁취 시범업체로서 공단내 여타 기업 노동자들은 투쟁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금성사, 대림자동차 등의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지게차 등 중장비를 앞세워 벌인 가두시위는 노동자들의 힘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공단내 중소기업들에까지 투쟁을 확대시켜 공단의 생산은 거의 전면적으로 마비되었다.
창원공단에 이어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서도 80년 봄의 패배를 딛고 선 노동자들의 제국주의 자본과 매판적 권력의 지배를
따라서 1987년 7~9월의 노동투쟁에 대한 성과라면 기업 단위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노동조합 운동이 부활했다는 점과 노동조합 운동의 대중적 기초가 확립되었다는 점, 기업 수준에서의 노사 관계의 민주화가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노동조합 운동이 기업 단위 노조 운동에 고착되고, 고립되는 경향을 보인 점, 상급 노조의 민주화에 실패했다는 점, 노동조합 운동의 분화ㆍ분열 현상이 오히려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6월 항쟁의 성과물로 쟁취한 6ㆍ29선언의 주요내용은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확대, 정당활동보장 등 형식적 민주주의의 일정한 진보를 담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전민중의 생활상의 실질적 진보를 정치적ㆍ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것은 자유주의 부르조아 및 중산층의 정치적 지도라는 6월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6ㆍ29이후 군사권력과 그 배후의 제국주의세력은 새로운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신속히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노동자 계급은 6월 투쟁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참여하였던 일부의 노동자들과 함께 마침내 자신의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 광범위한 투쟁에 나서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억압의 완화라는 6월 투쟁의 성과를 딛고 실제로 전개된 노동자 계급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은 그 규모와 강도, 지속성 등 모든 측면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7~8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폭발된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운동으로서 국가권력과 자본가계급에 일대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로써 보수정치세력 일반에 대해 민주화의 내용으로서 노동자계급 고유의 요구를 관철하도록 강요하여 민주화의 역사적 실질적 내용을 심화ㆍ확대시킴과 동시에 이후의 민족ㆍ민주변혁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개과정
6ㆍ29 이후 9월 초순에까지 전개된 7ㆍ8월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전개범위, 양상에 따라 대체로 세 개의 시기를 나눌 수 있다. 즉 7월 초~8월 초까지 울산과 부산 및 창원ㆍ마산 등 경남ㆍ부산의 지역적 수준에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개시ㆍ확산되던 시기, 8월 중순~하순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이 전국ㆍ전산업에 걸쳐 고양되던 시기, 8월말 이후 9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냉각되던 시기이다.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기포트” 제3호 87년9월 특집호 p43~101 참고
1) 지역적 개시ㆍ확산기(7월 초 ~ 8월초)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은 6ㆍ29직후인 7월5일 울산 현대엔진 노조결성 투쟁의 성공으로 치솟았다. 계엄령 혹은 위수령까지도 각오하고 초경강탄압 정국이던 87년 4월부터 이미 노조결성을 준비해오다가 6ㆍ29이후 노조결성이 성공하자 울산의 여타 계열기업에서도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 사이에 급속히 노조결성이 시도되었다. 16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당황한 자본측이 노조설립 신고서류를 탈취하는 비열한 구시대적 탄압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이를 규탄하는 농성투쟁을 통해, 재벌의 구시대적 부당노동행위를 비난하는 언론ㆍ여론에 힘입어 노조를 인정받는 감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현대 그룹내 여타 계열기업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기업 노동자, 나아가 중소기업을 포함한 전국 노동자계급에게 보다 확고한 승림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본다.
전술을 바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서는 금속노련과 합작하여 먼저 어용노조를 결성하자 이에 대응하여 단위사업장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규모인 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이를 규탄하는 농성으로 민주노조 결성투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투쟁은 울산지역의 하청중소기업들과 온산공단으로 확대되어 재벌이 강고하게 지배하던 이 지역을 삽시간에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에 직면하여 거대 재벌ㆍ독점자본의 독재가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울산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의 불길은 부산으로 번졌다. 7월 23일 태광산업에 이어 대한조선공사, 세신정밀, 국제상사 등의 노동자들이 차례로 신규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을 통한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벌였다. 그 중 대한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지게차 등의 중장비들을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들어가 구사대와 경찰의 탄압에 맞서 무장한 자위대가 격렬하게 투쟁함으로써 요구조건의 일부를 관철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비해 국제상사에서는 대규모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연약하고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거의 패배했으나, 일부 노동자들이 회사 밖에 끈질기게 농성투쟁을 계속함으로써 부산지역 여타 기업노동자들의 각성과 투쟁의 확대에 기여했다.
7월말~8월초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창원ㆍ마산으로 곧 확대되었다. 대부분의 주요기업에서 방위산업체라는 족쇄로 노동자들은 철저히 결박하여 85년에 이으러 통일노조 등 몇 개의 노조만이 외로운 투쟁을 벌이다 그나마 어용노조로 변했던 창원공간에서 현대정공을 시발로 한국중공업, 효성중공업,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통일, 금성사, 삼성중공업, 삼미특수강 등 한국의 4대 재벌그룹 산하기업 노동자들과 여타 전국 유수의 거대기업 노동자들이 신규노조 결성투쟁을 대규모로 전개했다. 특히 통일의 노동자들은 85년의 수준 높은 투쟁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파업ㆍ농성으로 민주노조쟁취 시범업체로서 공단내 여타 기업 노동자들은 투쟁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금성사, 대림자동차 등의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지게차 등 중장비를 앞세워 벌인 가두시위는 노동자들의 힘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공단내 중소기업들에까지 투쟁을 확대시켜 공단의 생산은 거의 전면적으로 마비되었다.
창원공단에 이어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서도 80년 봄의 패배를 딛고 선 노동자들의 제국주의 자본과 매판적 권력의 지배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