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을 충족시키는 것이 곧 그분의 관심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그 예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저자는 많은 이방종교와 비교해서 결국 성경에서 예언자들에 대한 바른 생각을 독자에게 심어주고 있다.(상권의 예언자들이란?)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관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해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하나님이해는 이론적으로 연구해서 얻은 결론도 아니요 하나님의 존쟁와 속성에 관한 몇 가지 양자 택일의 안개 속에서 더듬어 움켜잡은 것도 아니다.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역 못할 실재였고, 당황하여 절절매게 하는 임재였다. 예언자들은 계시의 순간을 통하여, 혹은 주변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정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였다. 정념은 진행되는 도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됨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 관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나님의 정념을 꿰뚫어 보는 데 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행위를 보라고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역사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정념을, 자비든 분노든간에 하나님의 충동으로, 인간의 행실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질이나 성향의 특별한 기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불합리한 것도 아니며 불가항력적인 것도 아니다. 정념은 한 결단에서, 의지의 행위에서 나온다. 그것은 격정의 어둠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빚에서 파생한다. 서양 세계의 역사는 여러 세대들이 예언자들의 정신을 이해 또는 오해하고, 존경 또는 거부한 바에 따라 기록되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분노의 하나님을 주제로 한 설왕설래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뿌리깊은 적의 때문인지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인도 받는다. 하나님을 열렬하게 동정하는 순간,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예언자는 신성 속에 용해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정념에 자신을 감정적으로 일치시킬 따름이다. 그것은 뜻과 감정, 의식과 메시지의 하나됨이다. 예언자의 경험을 구성하는 자료는, 그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는 어떤 분이요, 사실이 아니라 행위이다. 예언 행위 그 자체가 초월하는 주체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는 객체가, 인간에게 기대하며 나타내고 지시하고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는 주체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예언은 막연하고 고요하며 신령스런 상에 의하여 일깨워진 갑작스럽고 자발적인 느낌에서가 아니라, 신성한 정념의 계시에 본원을 둔 영감을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
예언자의 심정을 지닌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다. 물론 우리에게 선택의 힘이 있는 것 아니지만 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의 순종은 생명을 담보로 싸워야 하는 치열한 전쟁터 일 것이다. 타협은 육신의 작은 안위를 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영혼을 병들어 더 이상의 선포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 예언자의 심정이 되리라 본다. 성도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는 목사의 사람이 아닌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 내는 수고의 몫은 우리의 사명이라 믿는다. 주체이신 하나님 손에 붙잡혀 그의 마음을 알아 사용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그 예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저자는 많은 이방종교와 비교해서 결국 성경에서 예언자들에 대한 바른 생각을 독자에게 심어주고 있다.(상권의 예언자들이란?)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관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해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하나님이해는 이론적으로 연구해서 얻은 결론도 아니요 하나님의 존쟁와 속성에 관한 몇 가지 양자 택일의 안개 속에서 더듬어 움켜잡은 것도 아니다.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역 못할 실재였고, 당황하여 절절매게 하는 임재였다. 예언자들은 계시의 순간을 통하여, 혹은 주변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정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였다. 정념은 진행되는 도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됨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 관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나님의 정념을 꿰뚫어 보는 데 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행위를 보라고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역사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정념을, 자비든 분노든간에 하나님의 충동으로, 인간의 행실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질이나 성향의 특별한 기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불합리한 것도 아니며 불가항력적인 것도 아니다. 정념은 한 결단에서, 의지의 행위에서 나온다. 그것은 격정의 어둠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빚에서 파생한다. 서양 세계의 역사는 여러 세대들이 예언자들의 정신을 이해 또는 오해하고, 존경 또는 거부한 바에 따라 기록되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분노의 하나님을 주제로 한 설왕설래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뿌리깊은 적의 때문인지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인도 받는다. 하나님을 열렬하게 동정하는 순간,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예언자는 신성 속에 용해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정념에 자신을 감정적으로 일치시킬 따름이다. 그것은 뜻과 감정, 의식과 메시지의 하나됨이다. 예언자의 경험을 구성하는 자료는, 그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는 어떤 분이요, 사실이 아니라 행위이다. 예언 행위 그 자체가 초월하는 주체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는 객체가, 인간에게 기대하며 나타내고 지시하고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는 주체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예언은 막연하고 고요하며 신령스런 상에 의하여 일깨워진 갑작스럽고 자발적인 느낌에서가 아니라, 신성한 정념의 계시에 본원을 둔 영감을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
예언자의 심정을 지닌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다. 물론 우리에게 선택의 힘이 있는 것 아니지만 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의 순종은 생명을 담보로 싸워야 하는 치열한 전쟁터 일 것이다. 타협은 육신의 작은 안위를 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영혼을 병들어 더 이상의 선포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 예언자의 심정이 되리라 본다. 성도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는 목사의 사람이 아닌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 내는 수고의 몫은 우리의 사명이라 믿는다. 주체이신 하나님 손에 붙잡혀 그의 마음을 알아 사용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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