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주제선정의 동기
2. 고대~현대까지의 이상적 군주상
2.1 유비중심의 군주상
2.2 조조중심의 군주상
3. 손권의 배경
3.1 동오의 창업자들
3.2 손권에게 미친 영향
4. 후흑론에서 본 손권
4.1 손권의 면후
4.2 손권의 심흑
5. 손권의 인사정책
5.1 신임의 일관성
5.2 권력의 위임성
5.3 파격적인 외부인사 영입
6. 요약 및 나의 생각
*참고문헌
2. 고대~현대까지의 이상적 군주상
2.1 유비중심의 군주상
2.2 조조중심의 군주상
3. 손권의 배경
3.1 동오의 창업자들
3.2 손권에게 미친 영향
4. 후흑론에서 본 손권
4.1 손권의 면후
4.2 손권의 심흑
5. 손권의 인사정책
5.1 신임의 일관성
5.2 권력의 위임성
5.3 파격적인 외부인사 영입
6. 요약 및 나의 생각
*참고문헌
본문내용
요소들이 모여 수성의 천재, 손권을 탄생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4. 후흑론은 청대 말에 태어나 중.일전쟁 막바지에 사망한 학자 리쭝우 의 이론으로, 난세의 처세술중 한 방법이다. 후는 ‘면후’ 즉 얼굴이 두껍다, 흑은 ‘심흑’ 즉 마음이 꺼멓다 는 뜻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영웅의 요건이 뻔뻔하고 마음이 음흉한 사람이라는 주장으로, 간단히 말해 위험할 때는 굽힐 줄 알고, 처세에 능하며, 마음속으로는 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다. 리쭝우는 삼국지 인물 중 가장 후흑을 잘 하는 인물을 사마의와 손권으로 뽑았다.
후흑론에서 본 손권
4.1 손권의 면후
손권의 외교 전략은 일견하면, 일관성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수성의 차원에서 보면 동오의 보전 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한 일관성 있는 행보였다.
처음에 손권은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를 상대하지만, 후에 형주를 돌려받기 위해 관우를 친다. 관우가 죽은 후, 유비는 격노하여 동오를 공격하고, 이때 오나라는 위기에 직면한다. 손권은 유비를 상대하기 위해선 위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 위의 신하임을 자청하고, 조비로부터 오왕 이라는 칙명을 받아들인다. 손권은 과거의 원한이나 체면에 구애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허리를 굽히는, 면후에 탁월했다. 이릉대전 이후에, 위를 상대하기 위해 촉과 다시 손을 잡은 것은 물론이다.
4.2 손권의 심흑
손권은 심흑에도 매우 능했다. 이것은 삼국지 3대 전투 중 2개인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의 승리로 잘 묘사된다. 삼국지 정사에서 보면, 손권은 ‘적의 적’과 손을 잡는 것, 다시 말해 조조를 상대로는 유비와 협력, 유비를 상대로는 조조와 협력하는 전략을 잘 발휘했고, 작은 일로는 적벽대전 직전 동오에서는 건안 13년(209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항복을 말했다.
항복론이 우세했는데, 손권은 회의가 있기 전에 이미 주유와 의견을 일치한 후,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쇼를 하며 책상을 칼로 내리치는 행위를 했다. 이는, 반대파의 입을 막기 위한 손권의 강력한 의지를 표출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알려져 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면 일반 신하와는 달리, 군주였던 손권은 암살되거나 평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손권이 처음부터 항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처럼, 손권은 계교에도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연의에서는 제갈양의 미화를 위해 제갈량이 오의 신하들을 논파하고, 주유를 설득하여 위에 대항하게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군주와 비교해 보자면 유비는 심흑이 부족하고, 조조는 면후가 부족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많다. 유비는 원래부터 배운 것이 얼마 없고 지략이 모자라 일을 그르친 적이 많으며, 조조는 장송이 익주를 바치려고 왔을 때, 장송이 그를 모욕하자, 장송을
4. 후흑론은 청대 말에 태어나 중.일전쟁 막바지에 사망한 학자 리쭝우 의 이론으로, 난세의 처세술중 한 방법이다. 후는 ‘면후’ 즉 얼굴이 두껍다, 흑은 ‘심흑’ 즉 마음이 꺼멓다 는 뜻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영웅의 요건이 뻔뻔하고 마음이 음흉한 사람이라는 주장으로, 간단히 말해 위험할 때는 굽힐 줄 알고, 처세에 능하며, 마음속으로는 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다. 리쭝우는 삼국지 인물 중 가장 후흑을 잘 하는 인물을 사마의와 손권으로 뽑았다.
후흑론에서 본 손권
4.1 손권의 면후
손권의 외교 전략은 일견하면, 일관성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수성의 차원에서 보면 동오의 보전 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한 일관성 있는 행보였다.
처음에 손권은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를 상대하지만, 후에 형주를 돌려받기 위해 관우를 친다. 관우가 죽은 후, 유비는 격노하여 동오를 공격하고, 이때 오나라는 위기에 직면한다. 손권은 유비를 상대하기 위해선 위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 위의 신하임을 자청하고, 조비로부터 오왕 이라는 칙명을 받아들인다. 손권은 과거의 원한이나 체면에 구애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허리를 굽히는, 면후에 탁월했다. 이릉대전 이후에, 위를 상대하기 위해 촉과 다시 손을 잡은 것은 물론이다.
4.2 손권의 심흑
손권은 심흑에도 매우 능했다. 이것은 삼국지 3대 전투 중 2개인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의 승리로 잘 묘사된다. 삼국지 정사에서 보면, 손권은 ‘적의 적’과 손을 잡는 것, 다시 말해 조조를 상대로는 유비와 협력, 유비를 상대로는 조조와 협력하는 전략을 잘 발휘했고, 작은 일로는 적벽대전 직전 동오에서는 건안 13년(209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항복을 말했다.
항복론이 우세했는데, 손권은 회의가 있기 전에 이미 주유와 의견을 일치한 후,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쇼를 하며 책상을 칼로 내리치는 행위를 했다. 이는, 반대파의 입을 막기 위한 손권의 강력한 의지를 표출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알려져 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면 일반 신하와는 달리, 군주였던 손권은 암살되거나 평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손권이 처음부터 항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처럼, 손권은 계교에도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연의에서는 제갈양의 미화를 위해 제갈량이 오의 신하들을 논파하고, 주유를 설득하여 위에 대항하게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군주와 비교해 보자면 유비는 심흑이 부족하고, 조조는 면후가 부족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많다. 유비는 원래부터 배운 것이 얼마 없고 지략이 모자라 일을 그르친 적이 많으며, 조조는 장송이 익주를 바치려고 왔을 때, 장송이 그를 모욕하자, 장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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