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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주제 선정이유 3
Ⅱ. 이종격투기란? 3
1. 이종격투기의 정의 3
2. 이종격투기 대회의 종류 4
3. 이종격투기의 역사 6
4. 이종격투기의 마케팅 가치 25
5. 국내에서의 이종격투기 환경 26
Ⅲ. SWOT분석 26
Ⅳ. 4Ps 마케팅 30
1. Product 30
2. Price 38
3. Place 39
4. Promotion 40
Ⅴ. 스피릿MC의 문제점 41
Ⅵ. 스피릿MC가 나아가야할 방향 43
Ⅶ.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45
Ⅱ. 이종격투기란? 3
1. 이종격투기의 정의 3
2. 이종격투기 대회의 종류 4
3. 이종격투기의 역사 6
4. 이종격투기의 마케팅 가치 25
5. 국내에서의 이종격투기 환경 26
Ⅲ. SWOT분석 26
Ⅳ. 4Ps 마케팅 30
1. Product 30
2. Price 38
3. Place 39
4. Promotion 40
Ⅴ. 스피릿MC의 문제점 41
Ⅵ. 스피릿MC가 나아가야할 방향 43
Ⅶ.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45
본문내용
아니다. 광대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전용 경기장을 지어놓고 수백년간 흥행을 위해 격투시합을 지속했던 것이다. 누구를 위해? 로마의 관중들, 즉 격투기 팬들을 위해서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왜 로마인들은 검투사 경기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게 되었을까?
버트란트 러셀은‘로마의 문화는 그리스의 기생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로마는 그리스를 무력으로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거꾸로 정복당했다.’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로마 초기부터 그리스 문명에 대해 열렬한 구애를 보냈던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체육에 무관심 했을리가 없다. 즉, 로마의 검투시합은 그리스 이종격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리스 식의 건강한 심신과 육체의 미(美)를 중시하던 아마추어 격투 스포츠가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에투루리아의 풍습과 결합하여 좀더 흥미진진한 프로격투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에다 로마인들 특유의 합리성과 사고의 유연성, 타민족까지 포용하는 융통성이 글로벌한 프로 이종격투를 탄생시킨 것이다.
로마시대의 이종격투, 즉 검투사 경기가 활성화된 이유에는 로마초기부터 주변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포로와 노예등의 많은 다민족이 로마로 유입 된데도 그 원인이 있다. 로마는 소국가에서 출발하여 3차에 걸친 삼니테인과의 전쟁, 피로스 정복전쟁, 포에니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통한 군인의 희생 위에 건설된 제국으로써, 그 국가적 성향이 스파르타와 유사했다고 한다.
앞서‘그리스 시대의 이종격투’에서 판크라티움이라는 종합격투가 스파르타에서 발흥했다고 설명했듯이, 로마의 스파르타적인 상무정신과 그리스 격투의 유입, 거기다 장례식때 검투사 경기를 했던 에투루리안의 풍습과 맞물려 기원전 3백년전부터 공식적인 시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7백년간 검투사 경기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자 여가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로마인들을 가장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여흥거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투사 경기고 다른 하나는 전차경기다. 오늘날로 치면 격투시합‘K-1’과 자동차 경주‘F-1’이 영화나 TV, 야구나 축구보다 더 인기 있는 셈이다. 로마인들은 어찌나 검투사 경기에 심취하고 열광했는지, 닷새 동안 서른 번의 시합, 또는 나흘 동안 마흔 번의 시합이 열려 매번 시합장에 빈자리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로마의 도시 중 폼페이의 기록을 보면 4.5월에 일주일에 두번 꼴로 시합이 열렸고, 정기적인 축제나 신전의 제단 봉헌식, 공문서 보관소 준공식 같이 기념할만한 꺼리만 생기면 온통 검투시합의 연속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라도 되면 일하기도 어려워져, 모두들 경기장으로 달려가 포도주라도 마시면서 시합 관전을 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낙이었다. 관전뿐 아니라 태국의 무에타이 시합처럼 내기 도박도 했음은 물론이다.
검투경기는 대부분 무료였는데 빵까지 배급될 정도로 국가의 중요한 포퓰리즘 정책의 하나였다.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세금감면보다 검투경기를 열어라’라는 낙서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케 한다. 특히 새 황제의 취임이나 기념일, 승전식에는 장군이나 황제가 자비를 들여서라도 검투사 경기를 개최해야만 했고, 이것을 무시했다간 민중의 지지를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빚을 얻어 검투경기를 열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많은 정치가와 이익 단체들이 인기와 지지를 얻기 위해 검투사 흥행에 돈을 투자했고 흥행업자, 도박사, 매니저, 스폰서, 프로듀서등 검투시합에 관한 전문적인 직업군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다 검투사, 트레이너, 의사, 악사, 심판 등등.. 현대의 프로격투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직업이 이미 이때 형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중세시대처럼 해부에 대한 거부감이나 금지가 없었던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의 치료와 넘치는 시체들로 인해 의사들의 외과술이 그 어느 때보다 발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검투경기의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초기의 검투사들의 대우는 매우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검투사들이 대부분 갈리아, 게르만,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의 정복지에서 끌려온 노예나 포로였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넘치는 노예들이 넘쳐나는 탓에, 목숨 건 사투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노예들의 불만과 공포가 쌓여만 갔다. 마침내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라는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출신 검투사가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서 70명의 동료와 탈출한 것을 계기로, 이것이 로마 최대의 노예봉기로 이어졌다. 스파르타쿠스와 동료 검투사들은 평소 갈고 닦은 검투실력으로 잇따라 지중해 최강의 로마군을 격파했고, 이 승전 소식을 들은 각지의 노예들이 가세해 12만의 대 병력이 집결되기에 이른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고, 병력 2만의 로마군단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로 유명했던, 로마군 총사령관 크라수스와의 회전에서 패배. 약 6만명이 전사했고, 남은 포로 6천명은 전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으로 검투사들의 봉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로마시까지 이르는 이 십자가 행렬은 수십 킬로에 이어졌다고 하는데,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에 얼마나 로마가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도 무의미 하지는 않은 듯 하다. 노예봉기 뒤에 뭔가 깨닫는 점이 있었던 로마인들이 노예와 검투사들의 지위와 여건을 향상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에는 검투사들의 구성이 이민족과의 전쟁에서의 부산물인 노예나 포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이후 검투사들의 여건이 향상된데다, 검투사가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자 자유민까지 검투사에 지원하게 된다. 특히, 일류 검투사의 경우 막대한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어 로마 상류층까지 유명 검투사와 친분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일류 검투사는 스포츠 스타로서, 로마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라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건 여자건 부족함이 없었다.
(右.팔을 베이고 항복의사를 표하는 검투사.
심판이 시합종료를 선언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유민뿐 아니라, 강함에 대한 동경을
버트란트 러셀은‘로마의 문화는 그리스의 기생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로마는 그리스를 무력으로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거꾸로 정복당했다.’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로마 초기부터 그리스 문명에 대해 열렬한 구애를 보냈던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체육에 무관심 했을리가 없다. 즉, 로마의 검투시합은 그리스 이종격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리스 식의 건강한 심신과 육체의 미(美)를 중시하던 아마추어 격투 스포츠가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에투루리아의 풍습과 결합하여 좀더 흥미진진한 프로격투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에다 로마인들 특유의 합리성과 사고의 유연성, 타민족까지 포용하는 융통성이 글로벌한 프로 이종격투를 탄생시킨 것이다.
로마시대의 이종격투, 즉 검투사 경기가 활성화된 이유에는 로마초기부터 주변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포로와 노예등의 많은 다민족이 로마로 유입 된데도 그 원인이 있다. 로마는 소국가에서 출발하여 3차에 걸친 삼니테인과의 전쟁, 피로스 정복전쟁, 포에니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통한 군인의 희생 위에 건설된 제국으로써, 그 국가적 성향이 스파르타와 유사했다고 한다.
앞서‘그리스 시대의 이종격투’에서 판크라티움이라는 종합격투가 스파르타에서 발흥했다고 설명했듯이, 로마의 스파르타적인 상무정신과 그리스 격투의 유입, 거기다 장례식때 검투사 경기를 했던 에투루리안의 풍습과 맞물려 기원전 3백년전부터 공식적인 시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7백년간 검투사 경기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자 여가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로마인들을 가장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여흥거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투사 경기고 다른 하나는 전차경기다. 오늘날로 치면 격투시합‘K-1’과 자동차 경주‘F-1’이 영화나 TV, 야구나 축구보다 더 인기 있는 셈이다. 로마인들은 어찌나 검투사 경기에 심취하고 열광했는지, 닷새 동안 서른 번의 시합, 또는 나흘 동안 마흔 번의 시합이 열려 매번 시합장에 빈자리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로마의 도시 중 폼페이의 기록을 보면 4.5월에 일주일에 두번 꼴로 시합이 열렸고, 정기적인 축제나 신전의 제단 봉헌식, 공문서 보관소 준공식 같이 기념할만한 꺼리만 생기면 온통 검투시합의 연속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라도 되면 일하기도 어려워져, 모두들 경기장으로 달려가 포도주라도 마시면서 시합 관전을 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낙이었다. 관전뿐 아니라 태국의 무에타이 시합처럼 내기 도박도 했음은 물론이다.
검투경기는 대부분 무료였는데 빵까지 배급될 정도로 국가의 중요한 포퓰리즘 정책의 하나였다.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세금감면보다 검투경기를 열어라’라는 낙서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케 한다. 특히 새 황제의 취임이나 기념일, 승전식에는 장군이나 황제가 자비를 들여서라도 검투사 경기를 개최해야만 했고, 이것을 무시했다간 민중의 지지를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빚을 얻어 검투경기를 열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많은 정치가와 이익 단체들이 인기와 지지를 얻기 위해 검투사 흥행에 돈을 투자했고 흥행업자, 도박사, 매니저, 스폰서, 프로듀서등 검투시합에 관한 전문적인 직업군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다 검투사, 트레이너, 의사, 악사, 심판 등등.. 현대의 프로격투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직업이 이미 이때 형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중세시대처럼 해부에 대한 거부감이나 금지가 없었던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의 치료와 넘치는 시체들로 인해 의사들의 외과술이 그 어느 때보다 발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검투경기의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초기의 검투사들의 대우는 매우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검투사들이 대부분 갈리아, 게르만,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의 정복지에서 끌려온 노예나 포로였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넘치는 노예들이 넘쳐나는 탓에, 목숨 건 사투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노예들의 불만과 공포가 쌓여만 갔다. 마침내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라는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출신 검투사가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서 70명의 동료와 탈출한 것을 계기로, 이것이 로마 최대의 노예봉기로 이어졌다. 스파르타쿠스와 동료 검투사들은 평소 갈고 닦은 검투실력으로 잇따라 지중해 최강의 로마군을 격파했고, 이 승전 소식을 들은 각지의 노예들이 가세해 12만의 대 병력이 집결되기에 이른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고, 병력 2만의 로마군단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로 유명했던, 로마군 총사령관 크라수스와의 회전에서 패배. 약 6만명이 전사했고, 남은 포로 6천명은 전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으로 검투사들의 봉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로마시까지 이르는 이 십자가 행렬은 수십 킬로에 이어졌다고 하는데,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에 얼마나 로마가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도 무의미 하지는 않은 듯 하다. 노예봉기 뒤에 뭔가 깨닫는 점이 있었던 로마인들이 노예와 검투사들의 지위와 여건을 향상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에는 검투사들의 구성이 이민족과의 전쟁에서의 부산물인 노예나 포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이후 검투사들의 여건이 향상된데다, 검투사가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자 자유민까지 검투사에 지원하게 된다. 특히, 일류 검투사의 경우 막대한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어 로마 상류층까지 유명 검투사와 친분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일류 검투사는 스포츠 스타로서, 로마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라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건 여자건 부족함이 없었다.
(右.팔을 베이고 항복의사를 표하는 검투사.
심판이 시합종료를 선언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유민뿐 아니라, 강함에 대한 동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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