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투기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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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시 투기의 발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원시투기의 발달
인류 최초의 투기
공격본능과 인류의 진화
맨손의 투기보다 앞선 무기 사용
맨손투기의 기원
이성에 대한 공격 행위
사회적 신분쟁취의 수단
잃어버린 무예
단군신전의 무예경기
중국과 일본에 전래된 한국무예

#삼국시대의 무예
고분벽화에 나타난 무예
백제의 무예
화랑과 무예

#고려의 무예
문무의 각축
문헌의 수박희
무관의 승진과 수박희
귀족의 유희
살이적 위력의 수박

#조선의 무예
정치.사회적 배경
전란과 무예의 발흥
조선의 수박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桶志)

#한국 무예사상의 변천
역사적.사회적 배경
택견의 정신과 사상
도(道)
공격본능의 억제와 해소
무예와 예(禮)

#결론

본문내용

지의 여부는 소홀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한편으로 1973년 문화재 관리국에 제출된 조사보고서에 불과 11가지 기본수 밖에는 채집되지 않았던 택견이 1982년 조사보고서에서 100여개가 훨씬 넘게 가 지수가 불어난 만큼 필연적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많은 변화를 가져 왔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두 기능보유자의 차이점이란 우대, 아랫대의 계보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는 전혀 다른 무예로 보일 수도 있는 송덕기, 신한승의 각각 다른 기법도 운동의 원리는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구한말의 택견꾼
오늘날까지 이름이 기억되고 있는 택견꾼은 많지 않다. 그리고 알려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입으로 전해오는 동안에 다소 과장되거나 왜곡된 점도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비교적 근거가 확실한 이들만 기록해 둔다.
사직골의 명인 임호(林虎)
우리마을로 불리운 사직골의 선비로서 송덕기보다 18세 위였다고 한다. 필운동에 살았으며 7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 힘이 장사여서 통뼈라고 했 다고 하며 상대를 한번 잡으면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만큼 팔힘이 좋았다. 장안 8장사로 꼽혔다. 택견을 배우는 소년들이 선생님으로 불렀는 데 얼굴이 잘 생기고 학문도 깊었거니와 항상 두루막을 입고다녀 자태가 예의바르고 점잖았다. 집안이 빈한하여 처가살이를 하는 처지였으나 자존 심이 대단하고 꼿꼿한 성품이었다. 택견의 기술을 표범과 같이 날쌘어서 숲속의 나무사이를 비호처럼 질주하기도 하고 짚단을 차거나 담장을 뛰어 넘는 단련을 했다고 한다. 택견시합을 할때는 몇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 기도 하여, 사방의 적을 양손으로 어르고 왼발, 오른발로 연거푸 처넘기는 기술이 마치 번개치듯 했다. 이처럼 뛰어난 택견을 하는 임호 선생이었으 나 자신이 배울 때는 정식으로 사사받은 선생이 따로 없었다. 여러 사람들 로부터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웠다. 임호의 밑에서 택견을 배운 사람이 많 다고 하는데 송덕기 선생의 기억으로는 김영덕, 이귀돌, 이태환, 신봉기 김성환, 하봉근, 고재덕, 유상태 등 10여 명이 있으며 이들 중에서 신봉기 는 키가 작아서 복장지르기 같은 기술은 잘되지 않았으나 대신 품밝기가 일품이었고, 고재덕은 나이도 가장 많고 체격도 제일 컸으며 실력이 대단 하여 임호 선생의 칭잔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누상동 장칼
임호 선생의 친구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성격이 지독하고 키가 7척이나 되는 거한이어서 장칼이라는 별호로 불리웠다고 한다. 5형제가 모두 택견을 잘하였는데 차남인 그는 다리가 길고 강하여 특히 발따귀의 명수였다.
구리개 박무경
구리팔개 혹은 박팔개라는 별호가 있었고 거한이며 힘이 장사여서 그가 택견판이나 씨름판에 나타나면 모두 슬금슬금 달아나 버린다고 한다. 조선 포병대 하사관으로 있을때 박격포를 메고 광화문의 해태상에 뛰어올라 주 위를 놀라게 하였다.
왕십리 강태진(姜泰鎭)
왕십리 역마다리 근처에 살았으며 한손으로 호도알을 쥐어 깰 만큼 아귀 힘이 세었는데 씨름에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박털백이라는 택 견꾼에게 사사받았다고 하며 차력에도 조예가 있었다.
천석꾼 신재영(辛在榮)
신한승의 종조부, 호걸과 교제하기를 좋아하는 풍류아였다. 오백석이 넘는 부자여서 활쏘기, 씨름, 택견을 잘하는 한량들이 그의 집 사랑채에 늘 10여 명씩 묵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에게 자주 택견판을 열게하여 즐겨 어울렸다. 직접 경기를 하지 않아 실력을 가늠할 수 없으나 유명한 택견꾼과 어울리며 상당한 기량을 습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리개 김흥식(金弘植)
여러 택견꾼에게 택견을 익혔는데 나중에 유도를 배워 해방직후 한국인 으로서는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고단자였다. 이대통령의 측근에서 경호를 맡기도 하고 경기도 보사국장과 전라남도 내무국장을 지냈고 유도회, 육상 연맹, 축구협회 등의 임원이 되어 체육계를 지도하였다. 만년에 고혈압으 로 건강이 좋지 못했으나 신한승에게 택견의 학습체계를 개량하도록 권유 하기도 하며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받는데 조언을 하였다. 1984년8월20일 93세로 타계했다.
살꼬지다리 이경천(李敬天)
왕십리 살꼬지다리 근처에서 전진영이라는 택견꾼의 뒤를 이었다. 1984 년 현재 81세로 성남시에 살고 있는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10여 세때 애기택견을 많이 했다고 하며 후에 만주에서 중국권법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일제때와 자유당 시절에 유명한 주먹들도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살꼬지다리 근처에는 마장동의 한량으로서 전선출(전 선출)이라는 택견꾼이 있었는데 택견이 워낙 세어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 다. 1953년에 73세로 작고했다.
인간문화재
정부에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기(技)와 예능을 보존, 육성하기 위하여 1962년 1월 10일 법률 제 961호로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하였다. 다른 예능 부문에서는 이미 여러 종목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무예로서는 택견이 처음이며 유일한 것이 될 것 같다. 택견의 기능보유자인 송덕기, 신한승이 무예부문의 인간문화재 재1호가 된 것이다.
구한말의 택견꾼 송덕기
송덕기(宋德基)는 1893년 1월19일(호적에는 1896년 1월 19일생)서울사 직공원옆 필운동 삼거리에서 잡화가게를 하는 송태희(宋泰熙)의 7남7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의 사직골에는 웬만한 남정네라면 거의 택견을 할 줄 알만큼 택견이 성했기 때문에 송덕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택견을 익힐 수 있었다. 13세부터 마을의 택견꾼이나 형들을 따라다니며 택견판에서 애기택견을 겨루기도 했다. 송덕기의 위로 여섯 형이 모두 택 견을 익혔는데 둘째형이며 26세 연상인 덕순(德淳)의 솜씨가 그중 제일 나았다고 하다. 송옹이 막상 택견을 제대로 배우기는 18세부터였는데 그 때 마침 이웃으로 임호 선생이 이사를 왔던 것이다. 송옹은 유명한 택견꾼 인 임호로부터 같은 또래의 소년 10여 명과 함께 인왕산밑 활터(황학정)오 른쪽 언덕에 있는 감투바위 부근의 공터에서 본격적인 지도를 받았다. 연 습은 보통 초저녁에 한시간 남짓 하는데 다음날 연습은 사정에 따라 그때 그때 시간을 정했다. 연습할 때의 복장은 고의적삼에 솜버선을 신거나 혹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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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1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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