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이광수의 전기적 사실
2. 이광수의 문학사상
3. <무정>의 줄거리
4. <무정>의 구성
5. <무정>의 등장인물의 성격
6. <무정>의 문학사적 가치
2. 이광수의 문학사상
3. <무정>의 줄거리
4. <무정>의 구성
5. <무정>의 등장인물의 성격
6. <무정>의 문학사적 가치
본문내용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사랑>의 인세를 모두 부인에게 주어버리고 과감하게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비로소 일본에서 자신의 병상을 간호했던 허영숙과 열렬한 연애결혼을 하게 된다. 이런 애정 문제가 오늘날에는 별로 문제삼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선구자의 비애를 묵묵히 감수하면서도 자기의 이상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지표가 되어 근대로 접어들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따라서 이광수를 친일 문학가로서 여겨 그의 문학작품이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우리 문학의 공로자, 우리나라 여명기의 위대한 사상가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2. 이광수의 문학사상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의 첫 부분에서 그는 문학이 서양 사람들이 쓰는 Literature를 번역한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문학을 서양의 개념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수는 종래와는 다른 문학의 개념을 전제하여 과거의 문학과 결별을 선언하고, 문학을 논하는 근거를 서양 문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처럼 제목부터가 인식론적 물음으로 시작되고, 또 문학의 범위를 집요하게 좁혀 가는 방식으로 문학개론을 쓰고 있다. 그는 먼저 문학을 과학과 구별하겨고 했다. 그가 문예를 학문인 문학과 구별한 것이다, 과학과 구별하여 정의 만족을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을 편 것도 모두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그의 문학관은 서구 문예학의 가설에 접근해 있다.
다음으로 이광수는 문학 형식에서는 기록문학이란 조건을 내세워 구비전설을 문학의 범주에서 떼어 내고 양식에서는 시소설극평론만을 내세워 나머지 기록물을 문학의 범주에서 떼어 냈다. 게다가 내용상 조건으로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기록해야 한다고 하여 역사와 윤리와 관련하는 기록을 모두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점들은 이광수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재래로 사용하던 문학과는 상이하며 옛 것을 버리고 밖으로부터 새 것을 받아들인 문학관이었다. 그는 서양 문학의 수용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의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알고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광수는 서양 문학을 문학의 이상으로 보고 우리나라의 문학은 서양 문학을 배워 진화해야 할 뒤떨어진 문학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 근대문학 개념이 좁은 의미의 문예로 축소되고, 자기 것을 천히 여기는 잘못된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이론에 한세기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광수가 정의 만족을 문학의 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문학사상의 핵심이라고 평가되는 점이다. 그는 시가나 소설처럼 정의 분자를 포함한 문장을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점 또한 서양적 발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광수가 정의 내용적 재료로 첫 손에 꼽고 있는 자유연애는 반유교주의에다가 개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서양적 윤리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핵심을 정에서 찾는 지정의론은 이미 서양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때까지 전통적인 학문에서는 성정론은 있어도 지정의론은 없었다. 성정론은 우리 문학사상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정론에서는 성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바탕이고, 정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정론에서 말하는 정은 지정의론의 정과 달라서 지와 의도 함께 가진 개념이다. 여기서 벌써 문학 사상의 개념적 혼란이 비롯되고 있었고, 이광수는 이런 전통적 문학 사상에 거의 무지했다. 게다가 이 정이 바로 미감과 쾌감 또는 흥미로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는 점에서, 이광수는 문학 작품의 보편적 조건으로 이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이란 개인감정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광수가 일찍이 지와 의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정을 지, 정과 똑같은 자리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은 사고의 변혁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정의 독립을 서양의 문예부흥에서 찾는 것이나 문학의 목적을 정의 만족에 한정하는 것은 또한 자각된 목소리인지 의심을 갖게 한다. 지정의라는 사람의 심리 현상 가운데서 정의 독립을 강조한 뜻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지와 의를 문학적 감정이나 재료에서 빼 버린 것도 그의 문학적 한계이다. 이것은 이광수가 과학과 문학을 도식적으로 구별한데서 생기는 한계이며, 그래서 모든 과학이 지로써 만족을 구하고 문예는 정으로써 만족을 구한다는 노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과 지의 이런 대립적 인식 체계는 그의 문학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문학의 대천재와 대천재의 대문학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대목에서 이광수는 다시 재미의 문제를 재론한다. 대문인의 정신 곧 감정은 대개 일관불변하는 것이며, 이처럼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변함없이 재미를 줄 수 있는 문학을 대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심청전’이나 ‘춘향전’, ‘삼국지’, ‘수호지’는 조선과 중국의 보물인 반면에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는 세계 인류의 대보배요, 대문학의 보기라고 했다. 그가 구체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통하여 흥미목적설을 편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본질로서 재미와 정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광수에게서 즐거움은 문학의 목적이요, 재료이다. 그는 문학 예술이 쾌감을 준다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문학의 재료”라는 대목을 세우고 있다. 곧 문학의 재료에는 ‘호’, ‘불호’가 있고 이 재료를 묘사하는 정(正)부정(不正)정(情)부정(不情)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재료를 가장 바르게, 정답게 묘사한 것이 가장 좋은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문학의 재료로 연애와 분노, 비애, 희망과 같은 인간의 심리 상태와 인정 세태를 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진선미의 균형있는 발달에 이르는 것이 문학의 실효라고 하였다. 이광수는 여기에서도 정의 만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정신의 완전한 발달과 품성의 완비한 발달은 진선미의 균형있는 발달에 있다고 하여 문예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지표가 되어 근대로 접어들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따라서 이광수를 친일 문학가로서 여겨 그의 문학작품이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우리 문학의 공로자, 우리나라 여명기의 위대한 사상가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2. 이광수의 문학사상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의 첫 부분에서 그는 문학이 서양 사람들이 쓰는 Literature를 번역한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문학을 서양의 개념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수는 종래와는 다른 문학의 개념을 전제하여 과거의 문학과 결별을 선언하고, 문학을 논하는 근거를 서양 문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처럼 제목부터가 인식론적 물음으로 시작되고, 또 문학의 범위를 집요하게 좁혀 가는 방식으로 문학개론을 쓰고 있다. 그는 먼저 문학을 과학과 구별하겨고 했다. 그가 문예를 학문인 문학과 구별한 것이다, 과학과 구별하여 정의 만족을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을 편 것도 모두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그의 문학관은 서구 문예학의 가설에 접근해 있다.
다음으로 이광수는 문학 형식에서는 기록문학이란 조건을 내세워 구비전설을 문학의 범주에서 떼어 내고 양식에서는 시소설극평론만을 내세워 나머지 기록물을 문학의 범주에서 떼어 냈다. 게다가 내용상 조건으로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기록해야 한다고 하여 역사와 윤리와 관련하는 기록을 모두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점들은 이광수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재래로 사용하던 문학과는 상이하며 옛 것을 버리고 밖으로부터 새 것을 받아들인 문학관이었다. 그는 서양 문학의 수용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의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알고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광수는 서양 문학을 문학의 이상으로 보고 우리나라의 문학은 서양 문학을 배워 진화해야 할 뒤떨어진 문학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 근대문학 개념이 좁은 의미의 문예로 축소되고, 자기 것을 천히 여기는 잘못된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이론에 한세기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광수가 정의 만족을 문학의 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문학사상의 핵심이라고 평가되는 점이다. 그는 시가나 소설처럼 정의 분자를 포함한 문장을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점 또한 서양적 발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광수가 정의 내용적 재료로 첫 손에 꼽고 있는 자유연애는 반유교주의에다가 개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서양적 윤리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핵심을 정에서 찾는 지정의론은 이미 서양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때까지 전통적인 학문에서는 성정론은 있어도 지정의론은 없었다. 성정론은 우리 문학사상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정론에서는 성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바탕이고, 정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정론에서 말하는 정은 지정의론의 정과 달라서 지와 의도 함께 가진 개념이다. 여기서 벌써 문학 사상의 개념적 혼란이 비롯되고 있었고, 이광수는 이런 전통적 문학 사상에 거의 무지했다. 게다가 이 정이 바로 미감과 쾌감 또는 흥미로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는 점에서, 이광수는 문학 작품의 보편적 조건으로 이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이란 개인감정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광수가 일찍이 지와 의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정을 지, 정과 똑같은 자리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은 사고의 변혁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정의 독립을 서양의 문예부흥에서 찾는 것이나 문학의 목적을 정의 만족에 한정하는 것은 또한 자각된 목소리인지 의심을 갖게 한다. 지정의라는 사람의 심리 현상 가운데서 정의 독립을 강조한 뜻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지와 의를 문학적 감정이나 재료에서 빼 버린 것도 그의 문학적 한계이다. 이것은 이광수가 과학과 문학을 도식적으로 구별한데서 생기는 한계이며, 그래서 모든 과학이 지로써 만족을 구하고 문예는 정으로써 만족을 구한다는 노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과 지의 이런 대립적 인식 체계는 그의 문학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문학의 대천재와 대천재의 대문학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대목에서 이광수는 다시 재미의 문제를 재론한다. 대문인의 정신 곧 감정은 대개 일관불변하는 것이며, 이처럼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변함없이 재미를 줄 수 있는 문학을 대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심청전’이나 ‘춘향전’, ‘삼국지’, ‘수호지’는 조선과 중국의 보물인 반면에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는 세계 인류의 대보배요, 대문학의 보기라고 했다. 그가 구체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통하여 흥미목적설을 편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본질로서 재미와 정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광수에게서 즐거움은 문학의 목적이요, 재료이다. 그는 문학 예술이 쾌감을 준다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문학의 재료”라는 대목을 세우고 있다. 곧 문학의 재료에는 ‘호’, ‘불호’가 있고 이 재료를 묘사하는 정(正)부정(不正)정(情)부정(不情)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재료를 가장 바르게, 정답게 묘사한 것이 가장 좋은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문학의 재료로 연애와 분노, 비애, 희망과 같은 인간의 심리 상태와 인정 세태를 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진선미의 균형있는 발달에 이르는 것이 문학의 실효라고 하였다. 이광수는 여기에서도 정의 만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정신의 완전한 발달과 품성의 완비한 발달은 진선미의 균형있는 발달에 있다고 하여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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