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상 나의 고향 - 김해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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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의 조상 나의 고향 - 김해김씨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족 보
1. 족보의 의의
2. 족보 보는 법
☞ 이름과 항렬

Ⅲ. 한국인의 성씨
1. 성씨의 의의
2. 성씨의 유래
3. 성씨의 득성 과정
4. 성씨의 성장 과정
5. 성씨에 대한 전설

Ⅳ. 김씨의 유래

Ⅴ. 김해 김씨
1. 시 조
2. 관련 전설
3. 집 성 촌
4.본관의 연원
5. 가문을 빛낸 선조
6. 현대 인물
7. 유적 소재지

본문내용

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며, 조선조에서는 그의 5세손 극일(克一)이 유명하였다.
극일(克一)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뜻을 두지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으며 효행이 뛰어나 세종(世宗)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고, 그의 둘째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급제하여 집의를 역임했고, 맹의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삼주(金氏三珠)』라 불리웠다.
특히 셋째 일손(馹孫)은 일찍이 조선의 석학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에 기록하여 원한을 사게 되었다.
1498년 (연산군 4)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노사신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알려 김종직은 부관참시(副棺斬屍 : 죽은 뒤에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어 시체를 내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건 극형) 되고, 그의 일족은 참수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영의정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준손(駿孫)의 아들 대유(大有)는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으로 아버지와 함께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현량과(賢良科 : 조광조에 의하여 실시된 관리채용제도) 에 급제, 칠원 현감등을 지내고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현량과가 없어지자 고향인 청도(淸道)의 산속에서 살았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의 비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에 인물로는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시문가로 이름을 날린 현성(玄成)과 조선의 명장 경서(景瑞),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를 사액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의 김해 김씨(金海 金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 가문을 빛낸 선조(先祖)
김 관(金 管)
호는 정성(靖醒),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국자사에 이르렀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누차 왕에게 간하여 부도(浮屠 : 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1세조=삼현파(三賢派)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명장. 가야국(伽倻國) 김수로왕의 12대손. 서현(舒玄)의 아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萬明).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진평왕 51) 중당의 당주로서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했고, 압량주(押梁州) 군주가 되었다. 644년(선덕여왕 13) 소판이 되어 상장군에 오르고 백제군과 수차 싸워 이겼으며, 647년(진덕여왕 1) 반역을 꾀하는 비 담(毗 曇)염 종(廉 宗)의 반군을 토벌한 후 무산성감물성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진덕여왕 2) 백제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 이찬이 되어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듬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격파했고, 654년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을 함락,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663년(문무왕 3)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665년 당나라의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해졌다.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이듬해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태대각간에 승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여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했다. 유해는 금산원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부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慶州)의 서악서원에 제향.
김흠순(金欽純)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이 되고, 660년(무열왕 7)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호응하여 백제을 정벌하고 662년(문무왕 5) 내사지성에서 백제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668년 대당총관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여했다.
김목경(金牧卿)
고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품계가 삼중대광에 봉해졌으나.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녕군파(金寧君派) 1세조
김 유(金 庾) ? ~1386(우왕 12)
고려의 문신. 1362년(공민왕 11) 강릉도 병마사로 홍건적을 대파, 이듬해 성ㄹ 수복의 공으로 2등 공신, 이 해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 용(金 鏞)의 난을 평정, 1등 공신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머물고 있을 때 덕흥군(德興君)이 고려왕을 칭하고 원나라에 있던 고려인도 모두 이를 따랐으나 홀로 절개를 지킨 후, 1364년 돌아와서 밀직 부사에 추성익조 공신이 되고 이듬해 동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367년 전라도 도순문사로서 반란을 일으킨 탐라의 목호를 토벌했고, 1373년(공민왕 22)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의 병선 40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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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13
  • 저작시기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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