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제국에 직접 도전하고 싶어 했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위협을 분쇄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버리기를 거부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맺은 동맹을 준수했다. 영국이 주도한 협상은 실패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한 뒤,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굼뜬 움직임을 이용해 서부 전선에서 전격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유럽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1919년 6월 28일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식민지를 빼앗기고, 군대 재건에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강요받았다. 중부 유럽에 대한 처리 결과를 살펴보면, 베르사유 조약 및 관련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구상은 1920년에 창설된 국제연맹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은 집단안보였고, 가맹국들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동시에 침략 행위가 일어날 경우에는 서로 도와서 침략을 물리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대공황과 그 영향
전쟁이 끝난 뒤 10년 동안 미국의 금융 지배와 유럽의 채무는 경제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이 물어야 할 전쟁 배상금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독일은 많은 지폐를 찍어냈다. 결국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고 투기꾼과 부동산 소유자는 큰돈을 벌었지만, 금리 생활자는 파산했다. 이것은 나치가 집권하는 배경이 되었다. 연합국도 물가 폭등과 부채에 시달려 경제적인 고통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 배상금에 대해서는 탕감해줄 뜻이 있었지만, 영국과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상거래에 따른 부채는 탕감해주려 하지 않았다.
유럽은 미국에 빚을 지고 있었지만 1920년대에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1929년 월가의 증권시장이 무너진 결과 미국이 유럽에 직접 투자했던 자본도 모조리 빠져나갔다. 결국 대파국이 닥쳤다. 은행들이 잇따라 쓰러졌으며, 일부 유럽 국가는 통화 수축으로 대응했다. 이들 나라에서는 통화의 액면가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임금과 경비를 줄여서 수출 가격을 내렸다. 그 결과는 사회 불안으로 나타났다.
독재정권의 장식품
20세기 유럽에서 전체주의적 독재는 처음에는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유럽 최초의 실제적 독재정권은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에 따라 러시아에서 수립되었다. 러시아 독재정권은 활발한 근대화운동을 벌이면서 1당 국가와 가혹한 검열에 의존했고, 자유를 억압했으며 반대자는 숙청했다. 이로써 강력한 독재 체제가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도시들은 황폐해지거나 화재로 파괴되었다. 게다가 1939~45년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 민간인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 폭탄은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평화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적 계획이 세계적인 규모로 이루어졌다. 5년도 지나기 전에 정치가들은 국제연합을 포함해 오늘날 존재하는 세계기구를 거의 다 만들었다. 유럽 전역에서 기독교 민주당이 창설되거나 부활했다. 이런 로마 가톨릭계 정당들은 당시에는 최근보다 중도좌파적 경향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 존재하지 않았고, 영국 노동당은 비국교주의나 노동조합운동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당은 보수당에 승리한 뒤, 영국 은행과 연료 및 동력, 철과 강철, 내륙 수로의 국유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계획만으로는 유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중대한 재정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 같은 공동 노력이 필요했다.
1947년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주로 경제 원조를 통해 자유 인민을 지원하고 무력 정복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주요골자였다. 또한 미국의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마셜 플랜이라고 하는 유럽 원조계획을 발표했다. 마셜의 원조는 유럽에서 몇 가지 대규모 사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식민지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들의 출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50개가 넘는 신생 주권국가가 출현한 것이었다. 이것은 식민지가 독립한 결과였다. 동유럽은 소련의 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였다. 동요의 조짐은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것은 소련의 전환점이었다.
유럽의 협력
1948년에 네덜란드에서는 수많은 행동주의 조직이 대규모 유럽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유럽의 각국 정부들도 여기에 호응해 1949년 5월 각료위원회와 자문회의로 이루어진 유럽 회의를 창설했다. 장 모네는 서유럽의 석탄 및 강철 생산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루르 지방을 관리하는 국제기구는 유독 서독에만 심한 통제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공통된 규칙에 따라 공동으로 석탄과 강철을 생산하고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1950년에 로베르 슈만이 기초한 슈만 계획의 요체였다. 슈만 계획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네와 슈만은 이것이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다시 유럽 방위공동체를 제안했다. 이것이 끝내 실패로 끝나자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은 유럽 원자력공동체로 결실을 맺었다. 이들 기구는 통합되어 유럽 공동체(EC)가 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기본적 관세동맹은 유럽을 '단일시장'으로 만들어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것인데, 1983년 1월부터 상당부분의 물품에 대하여 비관세가 이미 실시되었다.
유럽 공동체는 경제 및 화폐통합을 모색했다. 1995년 단일통화의 이름을 '유로'로 결정하고, 1999년 유럽 11개국이 참여한 유로를 출범시켰다. 한편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분야에서도 통합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1993년 효력을 발휘한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1999년 발효한 암스테르담 조약은 유럽 공동체에게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공동체 정책을 실시할 권한을 주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유럽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1919년 6월 28일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식민지를 빼앗기고, 군대 재건에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강요받았다. 중부 유럽에 대한 처리 결과를 살펴보면, 베르사유 조약 및 관련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구상은 1920년에 창설된 국제연맹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은 집단안보였고, 가맹국들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동시에 침략 행위가 일어날 경우에는 서로 도와서 침략을 물리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대공황과 그 영향
전쟁이 끝난 뒤 10년 동안 미국의 금융 지배와 유럽의 채무는 경제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이 물어야 할 전쟁 배상금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독일은 많은 지폐를 찍어냈다. 결국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고 투기꾼과 부동산 소유자는 큰돈을 벌었지만, 금리 생활자는 파산했다. 이것은 나치가 집권하는 배경이 되었다. 연합국도 물가 폭등과 부채에 시달려 경제적인 고통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 배상금에 대해서는 탕감해줄 뜻이 있었지만, 영국과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상거래에 따른 부채는 탕감해주려 하지 않았다.
유럽은 미국에 빚을 지고 있었지만 1920년대에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1929년 월가의 증권시장이 무너진 결과 미국이 유럽에 직접 투자했던 자본도 모조리 빠져나갔다. 결국 대파국이 닥쳤다. 은행들이 잇따라 쓰러졌으며, 일부 유럽 국가는 통화 수축으로 대응했다. 이들 나라에서는 통화의 액면가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임금과 경비를 줄여서 수출 가격을 내렸다. 그 결과는 사회 불안으로 나타났다.
독재정권의 장식품
20세기 유럽에서 전체주의적 독재는 처음에는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유럽 최초의 실제적 독재정권은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에 따라 러시아에서 수립되었다. 러시아 독재정권은 활발한 근대화운동을 벌이면서 1당 국가와 가혹한 검열에 의존했고, 자유를 억압했으며 반대자는 숙청했다. 이로써 강력한 독재 체제가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도시들은 황폐해지거나 화재로 파괴되었다. 게다가 1939~45년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 민간인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 폭탄은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평화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적 계획이 세계적인 규모로 이루어졌다. 5년도 지나기 전에 정치가들은 국제연합을 포함해 오늘날 존재하는 세계기구를 거의 다 만들었다. 유럽 전역에서 기독교 민주당이 창설되거나 부활했다. 이런 로마 가톨릭계 정당들은 당시에는 최근보다 중도좌파적 경향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 존재하지 않았고, 영국 노동당은 비국교주의나 노동조합운동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당은 보수당에 승리한 뒤, 영국 은행과 연료 및 동력, 철과 강철, 내륙 수로의 국유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계획만으로는 유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중대한 재정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 같은 공동 노력이 필요했다.
1947년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주로 경제 원조를 통해 자유 인민을 지원하고 무력 정복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주요골자였다. 또한 미국의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마셜 플랜이라고 하는 유럽 원조계획을 발표했다. 마셜의 원조는 유럽에서 몇 가지 대규모 사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식민지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들의 출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50개가 넘는 신생 주권국가가 출현한 것이었다. 이것은 식민지가 독립한 결과였다. 동유럽은 소련의 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였다. 동요의 조짐은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것은 소련의 전환점이었다.
유럽의 협력
1948년에 네덜란드에서는 수많은 행동주의 조직이 대규모 유럽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유럽의 각국 정부들도 여기에 호응해 1949년 5월 각료위원회와 자문회의로 이루어진 유럽 회의를 창설했다. 장 모네는 서유럽의 석탄 및 강철 생산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루르 지방을 관리하는 국제기구는 유독 서독에만 심한 통제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공통된 규칙에 따라 공동으로 석탄과 강철을 생산하고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1950년에 로베르 슈만이 기초한 슈만 계획의 요체였다. 슈만 계획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네와 슈만은 이것이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다시 유럽 방위공동체를 제안했다. 이것이 끝내 실패로 끝나자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은 유럽 원자력공동체로 결실을 맺었다. 이들 기구는 통합되어 유럽 공동체(EC)가 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기본적 관세동맹은 유럽을 '단일시장'으로 만들어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것인데, 1983년 1월부터 상당부분의 물품에 대하여 비관세가 이미 실시되었다.
유럽 공동체는 경제 및 화폐통합을 모색했다. 1995년 단일통화의 이름을 '유로'로 결정하고, 1999년 유럽 11개국이 참여한 유로를 출범시켰다. 한편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분야에서도 통합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1993년 효력을 발휘한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1999년 발효한 암스테르담 조약은 유럽 공동체에게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공동체 정책을 실시할 권한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