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제국주의, 현대의 문화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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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국의 제국주의, 현대의 문화제국주의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제국주의
(1) 제국주의의 의미
(2)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이론들
(3) 에드워드 사이드
- 생애,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제국주의
2. 문화제국주의 관점에서 본 영국의 제국주의
(1)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
- 종교적 정책, 교육정책, 경제정책
(2) 문화 속에 담긴 영국의 제국주의
- ‘제인 에어’를 통해 보는 영국의 제국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제국주의
(3) 식민국가의 민족들이 겪은 피해와 그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운동
- 세포이항쟁, 아프리카에서의 문화제국주의의 영향
3. 현대의 문화제국주의
(1) 영어 권하는 사회
(2) 코카콜라의 사례

Ⅲ. 결론

본문내용

자인 벤담(1748~1832)은 쾌락은 선이요,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실현에 있다고 말했다. 즉 쾌락을 만들어내고 고통을 막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법의 기초 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제임스 밀은 영국령 인도사를 출간하여 ‘인민의 악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조치는 법률들에서 모든 결함을 제거하는 것이다’라며 인도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제시하였다. 그 일예로 인도의 다수의 관습 그중에서도 특히 사티(죽은 남편의 화장 때 힌두교 미망인을 불태우는 관습) 와 서기(의례적인 살인)를 억제하였다. 결국 벤담과 제임스 밀의 공리주의실용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영국은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인민의 악습을 감소시키기 위해 인도를 보다 더 효과적이고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다.
이후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분할정책으로 나타난다. 총독 민토(Minto)경은 회교도와 힌두교도 선거민들을 분리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즉 회교도는 회교도인들에 의해 회교도들의 대표로 선출되고, 또 힌두교는 힌두교도의 대표로서만 선출되도록 제도화했던 것이다. 이 제도에 의해 두 종교사회는 서로 대립적인 정치집단으로서 모든 문제를 파당적 관점에서 해결하려 하였고 그 결과 인도는 종국에 두 개의 주권국-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② 교육정책
영국은 인도정부 이후 반세기 동안은 행정, 재정, 사법제도 등을 만드느라고 문화문제에는 관심을 쏟을 틈이 없었다. 1835년에 공중교육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이 위원회는 ‘영국파’와 ‘동양파’의 두 파로 분열되어 ‘동양파’는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페르샤어 등에 기초한 전통교육을 지지하는 반면 ‘영국파’는 영어와 서방 과학 및 사상 교육을 주장했다. 이 교착상태를 타개한 것은 1835년 신임 위원장 마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에 의해서였다. 그가 작성한 유명한 ‘교육각서’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영어는 산스크리트어나 아랍어보다 배울 가치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한정된 수단으 이를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들과 우리의 통치를 받는 수천만 주민들 간에 통역을 맡을 새로운 계급, 즉 혈통과 피부색은 인도인이지만 취향과 의견, 그리고 정신과 지성은 영국인인 하나의 계급을 형성해야만 한다.
결국 혈통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정신은 영국인인 하나의 계급을 형성해야 한다는 마콜리의 권고에 따라 전국적인 교육제도가 정비되고 실시되어 대학과 사범학교, 그리고 모국어를 가르치는 초등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885년에서 1900년 사이에 대학생 수는 1만 1,000명에서 2만3,000명으로, 그리고 중등학교 학생수는 42만9,000명에서 63만3,000으로 늘어났다. 또한 인쇄기의 도입으로 하생활이 크게 촉진되어 승려계급(Brahmins)의 전유물이던 산스크리트 문헌들이 대중화되었고, 영어 및 각종 현대 인도어로 인쇄된 신문들도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인도의 학문적 정치적 풍토도 크게 달라졌다. 영국식 교육에 의한 외국어와 외국문화에 익숙하고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새로운 인도인 계급이 탄생했고, 또한 이 교육받은 새로운 엘리트들은 인도 전역에 걸쳐 처음으로 하나의 용어와 공통적인 문화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조전에 그들을 언어 및 문화적 차이로 갈라놓았던 장벽이 이제는 영어와 영국식 사고방식에 의해 극복되었다.
영국인들이 인도에 영어와 영국문화를 도입한 것은 그들의 통치를 도와줄 게급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도통치의 기반이 침식되기 시작한바 바로 이들 서구식 교육을 받은 계급이 유럽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영국통치를 공격하고 민족운동을 조직하여 결국 인도의 독립을 달성했다.
인도 민족주의는 영국식 교육의 산물인 동시에 또한 영국의 경제적 착취와 영국의 인종차별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반란의 재발을 우려하여 그들의 통치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인종론을 발전시켰다. 영국인들의 우월감은 모든 분야에서 드러나, 인도인의 출입이 금지된 호텔, 클럽, 공원 등이 생겨났으며 군대와 관료사회에서도 인도인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일정 직위 이상은 승진하지 못했다. 인도군 총사령관 키치너(Kitchener)경은 “우리는 인도에서 유럽인이 원래부터 우수하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토착민은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아무리 똑똑하고 용감하더라도 높은 계급을 줄 수 없다. 토착민을 영국장교와 동등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총독 커즌(Curzon)경도 인도인의 고위관리직 임명에는 마찬가지로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1999년에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인도의 고위 행정직은 영국인이 차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국인만이 유전적으로, 그리고 훈육과 교육에 의해 이 일을 맡는데 필수적 요건인 정부방침에 대한 지식과 마음가짐, 그리고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한 인종차별은 교육받은 인도인들 간에 민족주의 감정을 싹트게 하는데 결정저긴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외교관이며 역사학자인 파니카르(K.M. Panikkar)는 “이같은 인종주의의 결과로 유럽인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인도에 거주하더라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영국의 인도통치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과 인도인들 간에는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존재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③ 경제정책
인도에서는 수 천년 동안 부락이 기본적인 경제단위였다. 부락에서는 개인은 중시되지 않았고 씨족이나 ‘카스트’만이 중시되었기에 씨족, 카스트 및 부락에 대한 충성이 우선시되면서 민족정신이 싹트기 어려웠다. 토지는 군주의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군주는 생산물의 일부를 현물 또는 세금으로 받을 권리가 있었는데 이것이 주요 국가 세입원인 토지세였다. 토지세 납부의무는 부락단위로 부과되었고 농민은 자기 몫의 세금을 내는 한 농지를 상속할 수 있었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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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16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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