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단군과 단군릉
Ⅱ. 고조선의 성립
Ⅲ. 고조선의 위치
Ⅳ. 고조선의 종족구성
Ⅴ. 고조선의 성장
1. 영토 확장
2. 연과의 대립
3. 고조선의 변천(위만 조선의 성립)
Ⅵ. 고조선 강역의 쟁점
1. 대동강중심설
2. 요동중심설
참고문헌
Ⅱ. 고조선의 성립
Ⅲ. 고조선의 위치
Ⅳ. 고조선의 종족구성
Ⅴ. 고조선의 성장
1. 영토 확장
2. 연과의 대립
3. 고조선의 변천(위만 조선의 성립)
Ⅵ. 고조선 강역의 쟁점
1. 대동강중심설
2. 요동중심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는 16세기 이후 대명관계의 안정으로 북방 고토에 대한 관심이 퇴조되고 압록강 이남의 현 강역을 고수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양란이후에는 상고사의 적극적인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한백겸의『동국지리지』가 대표적인 저작이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정통론이 도입되어 삼한의 역사적 존재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삼한 정통론을 종합한 것이 안정복의『동사강목』으로, 그는 스승인 이익과는 달리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비정하고,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북에 비정한 『요사』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정약용과 한치윤으로 계승되었다.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 안에 있었으며, 뒤에 영토를 확장하여 요서를 점령하고 연과 국경을 접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으며, 한사군도 진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보아 낙랑은 평양, 현도는 함경도, 임둔은 임진강 일대로 해석하였으며, 대방군도 임진강 하류지방으로 비정하였다. 정약용의 엄밀한 고증에 의한 실증적 역사연구는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연구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치윤·한진서의 『해동역사』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은 요서지방을 훨씬 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수도는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보았으며, 한사군의 낙랑도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한치윤은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 안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로 확대하였으나, 그 중심은 한반도에 두었다.
2. 요동중심설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응제시주』에서 였다. 여기에서는 낙랑을 평양이 아닌 압록강 북쪽으로, 기자가 건국한 지역을 청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보다 구체화 된 것은 17세기 남인 학자에 의해서였다. 홍여하는『동국통감제강』에서 진번을 요양에 비정하고, 나아가 요양의 구호가 평양이며, 위만이 도읍했던 검터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패수도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라 요하로 보았고,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하여 2천리의 땅을 빼앗기고 나서 경계를 삼았다는 만번한의 위치도 요양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락랑은 통설대로 평양에 비정하였다.
18세기의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새롭게 고증하여 그 서쪽 경계선이 요하 서쪽의 고죽국(지금의 산해관 부근, 대능하와 난하 사이)과 북경 북쪽의 상곡 동쪽에까지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익은 만주의 요심지방(요하의 동서)을 단군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며, 단군이 개국했다는 태백산도 요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한사군의 위치도 낙랑·현도를 요동에, 진번을 요하 서쪽에, 임둔을 가원도에 새롭게 비정하였다. 이종휘도『동사』에서 요동·심양 일대는 단군과 기자의 구강이라 하였다.
19세기 말에 태동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인 19101920년대에 성립되었던 민족주의사학에서의 고대사연구는 신채호에서 시작되어 최남선·안재홍·정인보로 이어진다. 그들의 고대사 연구는 단군조선과 부여를 역사의 주류에 놓아 새로운 한국사의 체계를 세우는 한편, 동이족의 중국대륙에서의 활동을 강조하고, 고조선의 중심과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밖에 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참고문헌
남북학자들이 함께 쓴 단군과 고조선 연구(2005), 지식산업사
리지린(1964), 고조선 연구, 학우서방
서영수(1988),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시민강좌 2, 일조각
사회과학출판사(1999), 고조선 역사 개관, 중심
송호정(1999), 고조선 국가 형성 과정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1976), 한국고대사연구, 전영사
한국역사 연구회(1992), 한국의 역사, 역사비평사
17세기 중엽부터는 정통론이 도입되어 삼한의 역사적 존재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삼한 정통론을 종합한 것이 안정복의『동사강목』으로, 그는 스승인 이익과는 달리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비정하고,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북에 비정한 『요사』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정약용과 한치윤으로 계승되었다.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 안에 있었으며, 뒤에 영토를 확장하여 요서를 점령하고 연과 국경을 접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으며, 한사군도 진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보아 낙랑은 평양, 현도는 함경도, 임둔은 임진강 일대로 해석하였으며, 대방군도 임진강 하류지방으로 비정하였다. 정약용의 엄밀한 고증에 의한 실증적 역사연구는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연구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치윤·한진서의 『해동역사』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은 요서지방을 훨씬 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수도는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보았으며, 한사군의 낙랑도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한치윤은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 안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로 확대하였으나, 그 중심은 한반도에 두었다.
2. 요동중심설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응제시주』에서 였다. 여기에서는 낙랑을 평양이 아닌 압록강 북쪽으로, 기자가 건국한 지역을 청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보다 구체화 된 것은 17세기 남인 학자에 의해서였다. 홍여하는『동국통감제강』에서 진번을 요양에 비정하고, 나아가 요양의 구호가 평양이며, 위만이 도읍했던 검터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패수도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라 요하로 보았고,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하여 2천리의 땅을 빼앗기고 나서 경계를 삼았다는 만번한의 위치도 요양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락랑은 통설대로 평양에 비정하였다.
18세기의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새롭게 고증하여 그 서쪽 경계선이 요하 서쪽의 고죽국(지금의 산해관 부근, 대능하와 난하 사이)과 북경 북쪽의 상곡 동쪽에까지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익은 만주의 요심지방(요하의 동서)을 단군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며, 단군이 개국했다는 태백산도 요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한사군의 위치도 낙랑·현도를 요동에, 진번을 요하 서쪽에, 임둔을 가원도에 새롭게 비정하였다. 이종휘도『동사』에서 요동·심양 일대는 단군과 기자의 구강이라 하였다.
19세기 말에 태동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인 19101920년대에 성립되었던 민족주의사학에서의 고대사연구는 신채호에서 시작되어 최남선·안재홍·정인보로 이어진다. 그들의 고대사 연구는 단군조선과 부여를 역사의 주류에 놓아 새로운 한국사의 체계를 세우는 한편, 동이족의 중국대륙에서의 활동을 강조하고, 고조선의 중심과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밖에 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참고문헌
남북학자들이 함께 쓴 단군과 고조선 연구(2005), 지식산업사
리지린(1964), 고조선 연구, 학우서방
서영수(1988),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시민강좌 2, 일조각
사회과학출판사(1999), 고조선 역사 개관, 중심
송호정(1999), 고조선 국가 형성 과정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1976), 한국고대사연구, 전영사
한국역사 연구회(1992), 한국의 역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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