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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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기원

3.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발전
3-1 도서관의 구조
3-2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책수집
3-3 도서관의 기능
3-4 학자사서

4.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파괴
4-1 율리시스 카이사르의 파괴설
4-2 기독교도들에 의한 도서관 방화설
4-3 칼리프 오마르의 파괴설

5.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6. 결론

7. 참고문헌

본문내용

4.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의 파괴
BC300년경에서 AD390년경까지 적어도 600년 넘게 존재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과연 누가 불태웠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소멸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주로 세 단계로 구분 짓고 있다. 첫 째는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황실내의 화재로 인해 도서관의 많은 장서가 소실되었다. 이 전쟁 중에 “40만 권의 책을 유실하였지만 그 당시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장서 수를 생각하면 거의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안토니우스가 페르가몬 도서관에 소장된 20만 권의 장서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어 부분적인 보상”으로 장서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페르가몬 장서가 세라피움 도서관에 이관되면서 세라피움 도서관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렇게 장서의 측면에서 엄격히 말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소멸이라고 일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 270년경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 동안 왕궁이 파괴되었고 더불어 도서관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기독교 탄생이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역사는 더욱 감춰져 버리게 된다. 서기 389년 갑자기 들이닥친 종교전쟁으로 이 도서관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4세경에는 기독교 문화가 중요한 힘을 갖게 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교도를 붕괴시키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불행히도 세라피움 도서관은 세라피스 사원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유일한 종교가 되면서 믿음이 아니라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접근한다는 헬레니즘의 전통, 그노시스(지식)의 활동지를 그냥 놔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박물관은 이교 사상의 가장 좋은 본보기로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상형문자와 이집트 여신들이 이교도 배척의 최초 목표가 된 것이다. 결국 391년에 세라피움 도서관은 기독교 집단에 의해 침해당했으며, 사원은 교회와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이 때 이후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질적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642년경 오마르 장군 지휘하에 무슬림들의 침공으로 남아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일부분마저도 망각의 늪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오마르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를 원했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단 논법을 사용하였다.
- 만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코란에 적대적인 책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파괴되어야 한다.
- 만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코란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책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불 필요하므로 따라서 파괴되어야 한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은 코란의 가르침과 적대적이거나 동조적이다. 고로 알렉산 드리아 도서관은 파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3단 논법을 통한 오마르의 명령으로 “도서관 장서는 알렉산드리아 대중 목욕탕의 연료로 사용했고 6개월 동안이나 지폈을 정도”였으며 이 후 알렉산드리아에는 다시 도서관 부흥은 없었다. 이제 알렉산더 대 도서관의 파괴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4-1 율리시스 카이사르의 파괴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얼마나 오래 존속되었을까? 기원전 48년까지 건재하다가 불에 타서 무너져 버렸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말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불이 나기는 했으나 건물이 좀 손상된 정도라고 말한다. 기원전 50년에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 장군이 주도하는 적군과의 내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2년 후 그리스 북쪽의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적장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몇 척의 배와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카이사르는 그의 뒤를 쫓았다. 율리시스 카이사르가 이복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전쟁을 벌이던 클레오파트라를 돕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48년경이다(이 무렵 도시에 있던 도서관들의 나이는 이미 3백살에 육박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어린 두 아이들이고, 그들 아버지의 뒤를 이은 공동 통치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논쟁에의 그의 연루를 카이사르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던 그 어린 왕의 전능한 전략가인 아킬레스와 환관인 포티니우스 등의 프톨레마이오스 측근에 대한 열광을 낳았다. 그들의 은밀한 계획은 시작 단계에서 좌절되었다. 포티니우스는 투옥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탈출에 성공하여 강력한 군대를 일으켰고,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모두 카이사를 성안에 포위하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계속해서 반격을 시도하였다. 바다 성벽의 꼭대기에서 그 곳에 정박하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60척의 배에 불을 지르면서 그 항구를 바라보았다. 그 화재는 빠르게 조선소의 설비들과 강가에 있는 건물들로 번져 갔고, 세네카는 이 화재로 약 4만여 권의 책이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이 불에 대하여 썼던 그 시대의 유일한 역사가는 당시에 12살이었던, 라이비였는데 이것은 별 생각 없이 언급된 듯하다. 그의 진술은 소실되었던 40,000개의 두루마리가 디오 카시우스와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얻었던 세네카에 의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무렵에 폼페이우스는 이미 배신자들에 의해 죽은 후였으나 카이사르는 그 곳에 계속 머물렀다. 그 때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사후여서 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과 왕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매력적인 여인이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고 그녀를 차지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도들이 로마인에게 대항하여 일어났을 때 정치적인 상황은 폭력적 국면으로 치달았고 병력도 별로 갖추지 못한 카이사르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해안부근의 왕궁 안에서 바리케이드를 쳤고, 바로 그 지점에서 “ 그의 선박으로부터 살해당하는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그는 불을 질러서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선박 수리소로부터 번진 불길은 위대한 도서관을 불태웠다” 전기 작가이자 철학자인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전기에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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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3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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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9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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