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Anabaptist)의 기원 배경 유형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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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진한 개혁속도에 대한 불만으로서 유아세례를 지적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유아들에 대해 세례를 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관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굳어진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이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호적조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특별히 호적조사는 세금징수과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당시의 행정제도를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쯔빙글리에게 있어 “국가”와 “교회”는 실제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기독교 도시는 기독교 교회 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성례는 교회에 대한 충성 분만 아니라, 취리히라는 도시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녀에 대한 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취리히 공동체에 대한 불충의 행위였다. 때문에 취리히시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쯔빙글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반대는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행위였다. 또한 이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취리히시에서 개혁자 쯔빙글리는 취리히 의회를 등에 업은 메이저였다.
2) 루터의 재세례파 이해
루터의 재세례파에 대한 이해는 서론에서 언급한 재세례파의 기원 중, 비텐베르크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재세례파 혹은 열광주의자들은 루터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과격성을 띄고 있다. 루터의 재세례파 이해는 그가 기록한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평화주의를 외치는 집단으로가 아니라, 반란적인 과격집단으로 이해했다. 때문에 독일 제후들의 정치적 지원에 의존하여 카톨릭과 싸우고 있었던 루터는 세속 지도자들의 정치적 권위를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시킴으로써 그것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를 붕괴시키려는 재세례파의 외침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목소리였다. 루터 또한 독일의 제후들을 등에 업은 메이저였다.
3) 칼빈의 재세례파 이해
재세례파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먼저 기독교 강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프랑스 왕인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면서, 헌정사에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1534년 10월 플랑카드 사건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을 박해하던 프란시스 1세에게 종교개혁신학을 변호하여, 그들의 입장을 일부 급진적인 그룹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프랑스 왕과 집권자들로 하여금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재세례파 운동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에 일반적인 요리문답서 형식과는 다른 두 장을 추가했는데, 거짓된 성례(제 5장)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와 국가에 대한 교리(제 6장)가 그것이었다. 특히 1535년 뮌스터 사건으로 인한 재세례파에 대한 불신과 박해, 탄압이 고조되면서 프로테스탄트까지도 같은 취급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와 재세례파에 대한 비난은 무관한 것임을 천명하려 한 것이다. 또한 2판에서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의 개정판에서도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을 추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의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의 시작은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칼빈의 재세례파 이해의 한 측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제네바 의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칼빈에게,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재세례파의 견해는 극단적으로 밖에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칼빈은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늦은 시대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보다 정확히 재세례파의 입장을 드러낼 수 있었다. 특히 1544년에 제네바에서 쓰여진 『재세례파 논박』에서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을 비판하며, 재세례파의 교리뿐만 아니라 윤리 전반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칼빈은 여기에서 그들의 극단적인 해석을 지적하면서도, 3, 5째 조항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등, 초기에 비해 공정한 관점에서 재세례파의 신학을 비판한다.
칼빈이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공정한 관점에서 재세례파를 보았다 할지라도, 칼빈 또한 제네바 의회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메이저였다.(물론 루터나 쯔빙글리에 비해서 덜 매여 있다.)
마이너로서 메이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재세례파의 삶은, 그들의 사상과 행동보다도 마이너라는 이유로 메이저에 의한 핍박과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서의 절대평화를 외치는, 때문에 정교분리와 금욕적인 생활을 할 것을 외치는 재세례파는 순교 당함을 기쁘게 생각해야 했다.
결언
재세례파에 대한 평가는 그 동안 연구자들의 사상과 필요에 따라 공정치 못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때문에 재세례파의 신학과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참고자료로 사용되는 후대의 평가들에 대해서도, 어떠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인지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1, 2차 텍스트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재세례파의 신학과 윤리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틀이 자유의지와 이원론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이 재세례파를 세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도록 했음을,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더욱 극단적으로 변화되도록 했음을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세례파의 운동을 세상으로부터 떠난 극단적 분리주의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근거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첫 번째 유형인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대표적 부류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일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청교도들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재세례파의 후손들인 메노나이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이러한 평가가 옳은 평가인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메노나이트 학자인 하워드 요더의 말처럼 이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사람들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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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21
  • 저작시기2009.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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