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실학(실학사상)의 개념
Ⅱ. 실학(실학사상)의 발생
Ⅲ. 실학(실학사상)의 유형
1.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2.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3.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Ⅳ. 실학(실학사상)의 연구분야
Ⅴ. 실학(실학사상)의 학문방법론
1. 백과사전식의 박학(博學)
2.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식의 실재성 중시
3. 훈고학(訓詁學)적 고증(考證)의 방법론
Ⅵ. 실학(실학사상)의 대표적 사상가
1. 유형원
2. 이익
3. 정약용
4. 이덕무
Ⅶ. 실학(실학사상)의 개화사상으로의 발전
Ⅷ. 실학(실학사상)의 한계
1. 토지개혁론의 한계
2. 신분제도 개혁사상의 한계
참고문헌
Ⅱ. 실학(실학사상)의 발생
Ⅲ. 실학(실학사상)의 유형
1.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2.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3.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Ⅳ. 실학(실학사상)의 연구분야
Ⅴ. 실학(실학사상)의 학문방법론
1. 백과사전식의 박학(博學)
2.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식의 실재성 중시
3. 훈고학(訓詁學)적 고증(考證)의 방법론
Ⅵ. 실학(실학사상)의 대표적 사상가
1. 유형원
2. 이익
3. 정약용
4. 이덕무
Ⅶ. 실학(실학사상)의 개화사상으로의 발전
Ⅷ. 실학(실학사상)의 한계
1. 토지개혁론의 한계
2. 신분제도 개혁사상의 한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연결된 인적 계보는 정약용→ 최한기, 김정희→ 박규수, 강위, 신헌(신관호)이다. 노론 집권층에서 성장한 북학파의 주장은 정조대에 규장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체제내로 수용, 세도정국하에서 김정희에 의해 더욱 학문적으로 성숙해졌고 김정희 문하에서 배출된 조희롱, 이상적, 허유, 오경호, 강위 등 중인계층은 상공업 사회의 주도층이 될 상인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관배가 중심이 되었다. 신헌, 민태호 등 양반사대부 계층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의 핵심세력이였다. 최한기는 기의 철학을 주장하여 실학이 개화사사응로 전환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닦고 스스로의 근대화 기술을 연구하였고 개국통상론을 주장하여 선각적인 개화사상가로써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연결되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박규수는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등 선배실학자들에게 출입하였고 윤종의, 남병철 등 말기 실학자들과 교유하고 셔먼호 사건 때 평안감사로서 국교수립을 주장하여 강화도조약 체결 때는 우의정을 맡았다. 문하에 출입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개화당으로 활약하였고 통상개국론이 개화사상에 계승 발전하였다. 단순한 무역이 아니고 기술도입을 중시하는 것으로 개화사상가들의 기술도입론으로 계승하였다.
Ⅷ. 실학(실학사상)의 한계
실학이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학’이란 학문 또한 기존의 유교적 질서에서 나온 학문이고, 실학자들 또한 기존 질서와 유학의 사상 속에 자라난 사람들이므로 완전한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학은 근대화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 토지개혁론의 한계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은 부강자의 권세와 강대함을 크게 의식하여 그에 타협하면서 토지개혁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려 한 온건한 토지개혁 안이며 따라서 혁명적 토지개혁 안이 아닌 기존의 토지개혁안을 개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 박지원의 경우를 보면 그의 문학 작품에서는 양반층을 생산자화 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전제 토지 개혁안에서는
“으레 후하게 대우해야 할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이므로 평민이 균등하게 분배받을 것은 또한 1결이 못될 것이다.” 라고 하여 왕실과 사족에 대한 토지분배의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 경구에 사대부에게 농민과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할 것인지, 또는 사회신분제를 전제로 차등을 두어 분배할 것인지, 완실과 공신의 자손을 얼마나 우대하려 했는지, 자세한 생각을 알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지주제도를 온존시켜 이용하게 될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어, 실학을 근대화 사상에 반영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2. 신분제도 개혁사상의 한계
실학자들의 신분 개혁사상의 한계점을 ‘위계적 서열’을 인정하고 양반이 ‘농·상·공’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양반신분 전체에 대한 폐지를 꾀한 것이 아니라, 세습적 양반만을 폐지하려 하였다. 즉, 그의 신분제도에 관한 사상은 양반신분의 ‘폐지론’이 아닌 ‘개혁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근대적인 완전평등을 이루는 데는 큰 한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 남상락, 한국실학사상의 철학적 고찰, 한국철학논문집
◇ 윤사순고익진 편(1984), 한국의 사상, 열음사, 열음사상총서1
◇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연구회 편저, 예문서원
◇ 주칠성(1996), 실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 주홍성·이홍순 외(1993), 한국철학사상사, 예문서원
◇ 정설철,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 한마당
◇ 최영성(2000), 한국실학사상서설, 한국실학사상사, 도서출판 다운샘
Ⅷ. 실학(실학사상)의 한계
실학이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학’이란 학문 또한 기존의 유교적 질서에서 나온 학문이고, 실학자들 또한 기존 질서와 유학의 사상 속에 자라난 사람들이므로 완전한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학은 근대화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 토지개혁론의 한계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은 부강자의 권세와 강대함을 크게 의식하여 그에 타협하면서 토지개혁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려 한 온건한 토지개혁 안이며 따라서 혁명적 토지개혁 안이 아닌 기존의 토지개혁안을 개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 박지원의 경우를 보면 그의 문학 작품에서는 양반층을 생산자화 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전제 토지 개혁안에서는
“으레 후하게 대우해야 할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이므로 평민이 균등하게 분배받을 것은 또한 1결이 못될 것이다.” 라고 하여 왕실과 사족에 대한 토지분배의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 경구에 사대부에게 농민과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할 것인지, 또는 사회신분제를 전제로 차등을 두어 분배할 것인지, 완실과 공신의 자손을 얼마나 우대하려 했는지, 자세한 생각을 알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지주제도를 온존시켜 이용하게 될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어, 실학을 근대화 사상에 반영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2. 신분제도 개혁사상의 한계
실학자들의 신분 개혁사상의 한계점을 ‘위계적 서열’을 인정하고 양반이 ‘농·상·공’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양반신분 전체에 대한 폐지를 꾀한 것이 아니라, 세습적 양반만을 폐지하려 하였다. 즉, 그의 신분제도에 관한 사상은 양반신분의 ‘폐지론’이 아닌 ‘개혁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근대적인 완전평등을 이루는 데는 큰 한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 남상락, 한국실학사상의 철학적 고찰, 한국철학논문집
◇ 윤사순고익진 편(1984), 한국의 사상, 열음사, 열음사상총서1
◇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연구회 편저, 예문서원
◇ 주칠성(1996), 실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 주홍성·이홍순 외(1993), 한국철학사상사, 예문서원
◇ 정설철,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 한마당
◇ 최영성(2000), 한국실학사상서설, 한국실학사상사, 도서출판 다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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