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성취 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구약에서는 여러 번 심판과 변혁에 의한 사물의 종결이 메시아적 도움 없는 여호와 자신의 현현과 연관되었다. 사실 종말의 그 큰 두 사건을 메시아적 인물의 ‘강림’으로 성격 지우는 것은 구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전체의 색조와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 현현 사상으로부터 메시아적 사유로 급격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대개 기다리는 큰 ‘오심’이 메시아의 오심이다. 첫째, 우리는 ‘파루시아’란 말을 바울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란 형식으로 나타난 형식으로 나타난 경우로 고린도전서 15:23, 데살로니가전서 2:19, 3:13, 4:15, 5:23, 데살로니가후서 2:1, 8을 들 수 있다. 후기에는 이것이 누구의 ‘강림’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속격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기독교적 어법에서는 ‘파루시아’하면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한 사건만을 지칭하게 되어 더 이상의 구체화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이 말의 일반적인 용법에서나, 종교적-종말론적인 용법에서나 이 말은 도착과 현존의 두 가지 밀접히 연관된 개념을 표현한다. 즉 파루시아는 ‘현조하게 됨’, 즉 도착과 오랜 시간이나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현존해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격변적이다. 그 개념 내적 발전이나, 그 사건의 이중화나 삼중화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둘째 용어는 ‘계시이란 용어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고린도전서 1:7,3:13(롬2:5; 8:18)에 나타난다. 메시아의 계시란 개념은 기독교 보다 더 오랜 것이다. 즉 이 개념은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그의 숨겨진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마지막 날 그가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심을 통하여 비쳐지게 된다는 신념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시란 용어에 신학적 의미를 부과하여, 이를 자주 초자연 영역으로부터 지상적 영역에로 위대한 것들이 내려오는 것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으로 묘사되는 다니엘 7장의 이상에서 그런 예를 발견한다. 이런 몇 가지 용어들에 나타나는 놀란 만한 특징은 이 용어들이 그것이 묘사하는 위기의 앞서는 것들과 병행하는 것들, 그리고 후속하는 것들과 아주 초연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들은 단지 다가오는 사건만을 표시하고, 그에 대한 그 이상의 종말론적 사변을 회피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정 문제에 대한 논리적으로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불신앙이라는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그는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비로소 예정론자가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로마서를 쓰기 이전에도 예정과 선택의 원칙을 사용했었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비교 살전 1:4,고전 1장), 바울이 그의 심중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를 하나님의 계시로 얻었음을 부인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제5장 불법의 사람
‘죄의 사람’,’멸망의 아들’로도 불려지는 ‘불법의 사람’은 데살로니가후서 2:1-12에서 바울에 의해서 묘사된 종말론적인 인물이다. 대개의 종말론적 말투에서 그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려지는 인물로서 요한일서와 이서에 이 이름이 나타난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적그리스도는 바울적인 용어가 아니다. 바울이 이를 알았으나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예수로, 예수에게서 다니엘로, 그리고 다니엘에게서 옛 세대의 이미 알려진 것에로 선을 그을 수 있다. 이 연속선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모든 기독교 학자에게 아주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심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것으로 여겨진 것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인, 신의 위엄에 대한 악의에 찬 모욕이었다. 여기서는 종교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았다’는 말은 가장 거룩한 분에게 불경한 모독이 가해짐을 아주 간결한 모습으로 요약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 자기 신화는 순전히 피동적인 태도로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참 신과 모든 거짓 신에 대해서 강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사람’이 나타나는 환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별로 문제되지 않는 환경인 듯 싶다. 더 흥미로운 문제는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신비적 기원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할 정도로 이 인물은 초지상성은 물론 초자연성의 분위기로 쌓여 있다는 것을 시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성을 가졌다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검토한 명칭들 외에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탐구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것에는 필연적으로 아주 문제로 남아 있는 이 많다. 이는 그 이상의 종국에로 갈 때에야 해결될 것이다. 다른 많은 예언들도 그렇지만 특히 데살로니가 후서는 그에 대한 최고의 종국적 주해가 종말론적 성취 때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일반에 대한 개념과 특히 배교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종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거침없이 진전되리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해준다.
제6장 부활
데살로니가 전서는 부활 자체의 성격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 주는 바가 없지만 파루시아의 성격에 관해서는 상당히 자세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파루시아와 부활이 거의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확언해 주고 있다. 부활에 대한 정보는 4:16에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호령’과 ‘천사자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이 주의 강림과 함께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묘사된 소리들은 죽은 자들을 일으켜 멀리로부터 모으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땅을 향해 오시기 시작한 조금 뒤에 그들도 이 사건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의 묘사 어구는’
바울에게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격변적이다. 그 개념 내적 발전이나, 그 사건의 이중화나 삼중화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둘째 용어는 ‘계시이란 용어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고린도전서 1:7,3:13(롬2:5; 8:18)에 나타난다. 메시아의 계시란 개념은 기독교 보다 더 오랜 것이다. 즉 이 개념은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그의 숨겨진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마지막 날 그가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심을 통하여 비쳐지게 된다는 신념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시란 용어에 신학적 의미를 부과하여, 이를 자주 초자연 영역으로부터 지상적 영역에로 위대한 것들이 내려오는 것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으로 묘사되는 다니엘 7장의 이상에서 그런 예를 발견한다. 이런 몇 가지 용어들에 나타나는 놀란 만한 특징은 이 용어들이 그것이 묘사하는 위기의 앞서는 것들과 병행하는 것들, 그리고 후속하는 것들과 아주 초연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들은 단지 다가오는 사건만을 표시하고, 그에 대한 그 이상의 종말론적 사변을 회피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정 문제에 대한 논리적으로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불신앙이라는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그는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비로소 예정론자가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로마서를 쓰기 이전에도 예정과 선택의 원칙을 사용했었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비교 살전 1:4,고전 1장), 바울이 그의 심중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를 하나님의 계시로 얻었음을 부인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제5장 불법의 사람
‘죄의 사람’,’멸망의 아들’로도 불려지는 ‘불법의 사람’은 데살로니가후서 2:1-12에서 바울에 의해서 묘사된 종말론적인 인물이다. 대개의 종말론적 말투에서 그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려지는 인물로서 요한일서와 이서에 이 이름이 나타난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적그리스도는 바울적인 용어가 아니다. 바울이 이를 알았으나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예수로, 예수에게서 다니엘로, 그리고 다니엘에게서 옛 세대의 이미 알려진 것에로 선을 그을 수 있다. 이 연속선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모든 기독교 학자에게 아주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심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것으로 여겨진 것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인, 신의 위엄에 대한 악의에 찬 모욕이었다. 여기서는 종교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았다’는 말은 가장 거룩한 분에게 불경한 모독이 가해짐을 아주 간결한 모습으로 요약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 자기 신화는 순전히 피동적인 태도로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참 신과 모든 거짓 신에 대해서 강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사람’이 나타나는 환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별로 문제되지 않는 환경인 듯 싶다. 더 흥미로운 문제는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신비적 기원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할 정도로 이 인물은 초지상성은 물론 초자연성의 분위기로 쌓여 있다는 것을 시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성을 가졌다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검토한 명칭들 외에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탐구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것에는 필연적으로 아주 문제로 남아 있는 이 많다. 이는 그 이상의 종국에로 갈 때에야 해결될 것이다. 다른 많은 예언들도 그렇지만 특히 데살로니가 후서는 그에 대한 최고의 종국적 주해가 종말론적 성취 때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일반에 대한 개념과 특히 배교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종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거침없이 진전되리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해준다.
제6장 부활
데살로니가 전서는 부활 자체의 성격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 주는 바가 없지만 파루시아의 성격에 관해서는 상당히 자세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파루시아와 부활이 거의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확언해 주고 있다. 부활에 대한 정보는 4:16에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호령’과 ‘천사자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이 주의 강림과 함께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묘사된 소리들은 죽은 자들을 일으켜 멀리로부터 모으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땅을 향해 오시기 시작한 조금 뒤에 그들도 이 사건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의 묘사 어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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