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과거청산(과거사청산)의 정의
Ⅲ. 과거청산(과거사청산)의 중요성
Ⅳ. 독도문제 관련 과거청산문제
Ⅴ. 731부대 관련 과거청산문제
1. 731부대의 기원
2. 731 부대의 생체실험의 실상
3. 종전후 731부대의 행적과 미국의 은폐의혹
Ⅵ. 반평화적 역사교육 관련 과거청산문제
Ⅶ. 정신대 관련 과거청산문제
1. 연행시기
2. 동원수단
3. 위안소에서의 생활
4. 귀환
5.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장들
Ⅷ. 결론
참고문헌
Ⅱ. 과거청산(과거사청산)의 정의
Ⅲ. 과거청산(과거사청산)의 중요성
Ⅳ. 독도문제 관련 과거청산문제
Ⅴ. 731부대 관련 과거청산문제
1. 731부대의 기원
2. 731 부대의 생체실험의 실상
3. 종전후 731부대의 행적과 미국의 은폐의혹
Ⅵ. 반평화적 역사교육 관련 과거청산문제
Ⅶ. 정신대 관련 과거청산문제
1. 연행시기
2. 동원수단
3. 위안소에서의 생활
4. 귀환
5.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장들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전투의 유무에 따라 매우 불규칙적이었다고 한다. 하루 상대수가 일정치 않아 적은 날은 10명 이내 ,많은 날은 50명 이상 또는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정기검진은 꾸준히 시행되어서 위안소 군의에게 주마다, 달마다 성병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성병에 감염될 시에는 고통이 심한 606호주사를 맞기도 하였다. 또 콘돔인 삿쿠의 착용을 지시하여 군인들이 전부 이것을 착용하고 위안소를 이용하게 하였다. 이 중에서는 한 번 사용한 삿쿠를 빨 때의 경험이 매우 비참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 많은 수가 한 번 행위가 있은 후 소독수로 씻었으나 너무 사람이 몰릴때는 반 가사상태에 빠진채 지쳐 늘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위안부들은 여러 전장에서 성욕과 폭력에 짓눌린 일본군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비참하거나 변태적인 행위를 감수해야 했다.
“ 그때 내 나이는 열 아홉 살로 아직 남자를 몰랐습니다.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갑자기 이십명에 가까운 사병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놈 째가 올 때는 죽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곳이 빨간 복숭아만큼 커 부풀어 올랐습니다. 수건으로 밤새껏 차게 하였지만 너무 울어서 눈까지 빨갛게 부었습니다. 창끝으로 휘젓는 것 같은 통증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병들은 부어올라 아파서 지르는 소리를 즐거운 소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천전 하광과의 이야기)
“그 장면의 오물 사출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블록 건물이 늘어선 방에 들어가자 이불 한 장이 때에 절어 있었습니다. 몇 천명의 땀과 기름이 밴 이불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속치만 하나만으로 그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인 위안부나 중국인 위안부나 똑같았습니다.”(전 위생대 회계소위) 이름은 위안부 전원이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인을 받는 일외에 자신의 빨래, 주변 청소, 음식장만, 풀베기 등을 하거나 애국 부인회 띠를 두르고 훈련을 받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간호보조일 과의 관련성인데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들 위안부를 간호부로 이용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요금은 계급별로 장교는 8원, 사병은 한달 봉급의 반인 7원 50 전 등으로 명시되었고 표로 입장료를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위안부들은 돈이나 군표관리에서 거의 제외되었고 이의 관리는 포주나 군대측에서 하였다.
4. 귀환
패전시 일본군대가 위안부를 데리고 온 경우는 드물고 군인들이 어느날 부터인가 오지 않자 많은 위안부들이 고난을 겪으며 스스로 귀국하거나 미국 수용소에 있다가 귀환한 경우가 많았다. 또 그 전에는 탈주, 가깝게 지내던 장교의 도움을 받아서 귀환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의 위안부들의 생활은 그 동안에 얻은 병, 주위의 경시, 위안부였다는 기억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혼자 살면서 늙거나 경제적으로 도 힘든 상태가 대부분이다.
5.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장들
최근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가 언론을 통해서 소식이 알려지자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한국 정신대 대책협의회 총무, 나눔의 집 운영자 등이었다. 그리고 훈 할머니 가족 확인 작업이 용두사미가 될 때쯤 훈 할머니를 국내에 데려온 것은 정부가 아니라 역시 언론사와 민간단체였고 그 가족을 찾아준 것도 이들이었다. 정부는 현재 해외거주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영주 귀국에 필요한 수속과 비용에 대해 회피만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의 입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뚜렷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것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편 도꾜 카레이도스코프 지에서는 전 위안부의 항의에 대해 어이없는 발언을 한 자민당 이타가끼 의원의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요지는 전 위안부 김소기 할머니의 증언에 대해 뚜렷한 증거가 없고 돈을 받고 매춘을 하러 간 것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발언을 거듭하여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 해결이 아직도 요원함을 드러낸다.
Ⅷ. 결론
진상의 규명은 그 목적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 즉 과거의 국가폭력과 국가범죄 사실과 가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상황들이 공개되고, 피해의 사실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서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이 가졌던 무관심과 공포에 대해서도 같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진실의 규명과 그것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바로 고통을 공유하여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피해자 가족들과 피해자 ‘자신만의 것’으로 가슴에 묻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최소한 사회, 혹은 사회적 관계를 다시 수립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국가폭력의 진상의 규명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치료, 국가적 정신치료가 부를 수 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Healing with Truth). 물론 이러한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겉으로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건강성, 즉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범, 도덕률이 밑으로부터 무너진 상황이 초래된다. 용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지만, 용서는 진상의 규명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자행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청산은 일차적으로는 정의의 수립, 인권의 보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참고문헌
곽노현(1996) - 전노재판 이후의 과거청산: 과제, 원칙, 전략,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법학
박원순(1995) - 역사를 바로 세워야 민족이 산다
임종국(1982) - 일제침략과 친일파, 청사
안병직 외(2005) - 중앙일보 2005년 9월 2일 과거사청산 특집 32면
안병직 외 - 세계의 과거사 청산
최장집(1996) -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나남
허종 -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선인
“ 그때 내 나이는 열 아홉 살로 아직 남자를 몰랐습니다.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갑자기 이십명에 가까운 사병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놈 째가 올 때는 죽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곳이 빨간 복숭아만큼 커 부풀어 올랐습니다. 수건으로 밤새껏 차게 하였지만 너무 울어서 눈까지 빨갛게 부었습니다. 창끝으로 휘젓는 것 같은 통증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병들은 부어올라 아파서 지르는 소리를 즐거운 소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천전 하광과의 이야기)
“그 장면의 오물 사출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블록 건물이 늘어선 방에 들어가자 이불 한 장이 때에 절어 있었습니다. 몇 천명의 땀과 기름이 밴 이불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속치만 하나만으로 그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인 위안부나 중국인 위안부나 똑같았습니다.”(전 위생대 회계소위) 이름은 위안부 전원이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인을 받는 일외에 자신의 빨래, 주변 청소, 음식장만, 풀베기 등을 하거나 애국 부인회 띠를 두르고 훈련을 받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간호보조일 과의 관련성인데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들 위안부를 간호부로 이용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요금은 계급별로 장교는 8원, 사병은 한달 봉급의 반인 7원 50 전 등으로 명시되었고 표로 입장료를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위안부들은 돈이나 군표관리에서 거의 제외되었고 이의 관리는 포주나 군대측에서 하였다.
4. 귀환
패전시 일본군대가 위안부를 데리고 온 경우는 드물고 군인들이 어느날 부터인가 오지 않자 많은 위안부들이 고난을 겪으며 스스로 귀국하거나 미국 수용소에 있다가 귀환한 경우가 많았다. 또 그 전에는 탈주, 가깝게 지내던 장교의 도움을 받아서 귀환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의 위안부들의 생활은 그 동안에 얻은 병, 주위의 경시, 위안부였다는 기억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혼자 살면서 늙거나 경제적으로 도 힘든 상태가 대부분이다.
5.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장들
최근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가 언론을 통해서 소식이 알려지자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한국 정신대 대책협의회 총무, 나눔의 집 운영자 등이었다. 그리고 훈 할머니 가족 확인 작업이 용두사미가 될 때쯤 훈 할머니를 국내에 데려온 것은 정부가 아니라 역시 언론사와 민간단체였고 그 가족을 찾아준 것도 이들이었다. 정부는 현재 해외거주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영주 귀국에 필요한 수속과 비용에 대해 회피만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의 입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뚜렷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것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편 도꾜 카레이도스코프 지에서는 전 위안부의 항의에 대해 어이없는 발언을 한 자민당 이타가끼 의원의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요지는 전 위안부 김소기 할머니의 증언에 대해 뚜렷한 증거가 없고 돈을 받고 매춘을 하러 간 것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발언을 거듭하여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 해결이 아직도 요원함을 드러낸다.
Ⅷ. 결론
진상의 규명은 그 목적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 즉 과거의 국가폭력과 국가범죄 사실과 가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상황들이 공개되고, 피해의 사실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서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이 가졌던 무관심과 공포에 대해서도 같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진실의 규명과 그것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바로 고통을 공유하여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피해자 가족들과 피해자 ‘자신만의 것’으로 가슴에 묻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최소한 사회, 혹은 사회적 관계를 다시 수립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국가폭력의 진상의 규명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치료, 국가적 정신치료가 부를 수 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Healing with Truth). 물론 이러한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겉으로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건강성, 즉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범, 도덕률이 밑으로부터 무너진 상황이 초래된다. 용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지만, 용서는 진상의 규명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자행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청산은 일차적으로는 정의의 수립, 인권의 보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참고문헌
곽노현(1996) - 전노재판 이후의 과거청산: 과제, 원칙, 전략,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법학
박원순(1995) - 역사를 바로 세워야 민족이 산다
임종국(1982) - 일제침략과 친일파, 청사
안병직 외(2005) - 중앙일보 2005년 9월 2일 과거사청산 특집 32면
안병직 외 - 세계의 과거사 청산
최장집(1996) -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나남
허종 -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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