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박제가와 실학사상
3. 박제가의 경제관과 우물론
(1) 검약의 역설과 우물론
(2) 상업을 통한 부국강병
4. 박제가의 사상적 한계
(1) 소비 장려에 대한 한계
(2) 독과점의 우려
5. 맺음말
2. 박제가와 실학사상
3. 박제가의 경제관과 우물론
(1) 검약의 역설과 우물론
(2) 상업을 통한 부국강병
4. 박제가의 사상적 한계
(1) 소비 장려에 대한 한계
(2) 독과점의 우려
5. 맺음말
본문내용
경제관과 우물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음.
(1) 소비 장려에 대한 한계
박제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비를 장려하여 시장의 수요를 늘이고 이를 통해 생산이 증가하고 기술일 발전하는 순환의 단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조선 후기 농업 경영의 변화에 따른 농민층의 분화를 간과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영농 기술의 발달은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경영에도 변화를 일으켜서 일부 농민들은 광작(廣作)이 가능해졌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농민 1인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이앙법에 의해 종래면적보다 약 5배로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력은 80% 가량 감소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 능력이 증대하면서 직파법으로 10마지기도 못 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마지기 내지는 40마지기까지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광작에 따라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일부 자작농과 소작농의 경우는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다수의 농민을 농촌에서 떠나게 했다.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 주고 일부 농토만 직영하던 지주들은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소작지를 회수하여직영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작농은 소작지를 잃기가 십상이었다. 따라서 일부 농민들은 부농층으로 성장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에서 밀려나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농민층의 몰락은 농촌 사회를 파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의 삶이 이렇게 피폐해지는데 소비를 늘리라는 주장은 그들에게는 억지인 것이다. 최소한의 삶의 유지도 어려웠던 그들에게 사치는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요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에게 검약이란 미덕(美德)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2) 독과점의 우려
설사 소비의 촉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독과점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박제가가 상업의 역할을 중시하였지만 당시 사회는 그에 대해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박제가는 ‘이용(利用)’을 통한 ‘후생(厚生)’의 증대를 꽤하였으나 시장권의 확대가 단지 ‘이용(利用)’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매점매석이란 행위로 잘 나타나있다. 실제로도 조선 후기 상업의 전개에 따라 상인들 사이에선 독과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대해 일정한 부담을 지기로 하고 금난전권(禁難廛權)을 얻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했다.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은 본래 상거래 행위를 감독하는 평시서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조선 후기 상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전은 정부에 대해 국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에 반대 급부로서 금난전권을 요구, 이를 취득하였다. 금난전권은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허용하였으나, 후에 많은 시전들이 이를 행사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게 되어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자 그들 중 일부는 도고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도고 역시 매점매석을 통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노렸다. 이들은 국가재정에도 문제를 끼쳤으며 자신들이 벌어들인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 조선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Ⅴ. 맺음말
여전히 유학적 세계관이 뿌리잡고 있지만 근대를 향한 싹이 움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조선사회에서 박제가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난이 조선후기 사회의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박제가는 농업이 중시되던 사회 속에서 농업 진흥책만으로는 나라가 크게 부강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여 부강한 나라와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상업의 활성화와 해외 무역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인프라의 구축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물적 토대 위에 전근대 조선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인 차별적인 신분 제도를 개선하여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농경 중심의,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선진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박제가의 사상은 당시 집권층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층에게 그의 주장은 시대를 앞섰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인 주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박제가의 사상은 매우 선각적이었으나 당대의 주류는 물론, 온건한 북학파 사이에서까지도 지나치게 진보적이라고 여겨져 박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후에 정조 서거 후 흉서사건 연루를 빌미로 하여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1803년에 조정에서는 박제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처분을 내려졌지만 현지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1804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제가는 1805년에 사면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 달에 56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현세에 박제가의 사상은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명분만을 중시하던 성리학의 비현실적인 면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여 조선 사회가 나아갈 길을 새롭게 모색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박제가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시대에 자신의 주장을 저서 북학의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왕 앞에서도 펼쳤던, 진정으로 조선의 미래를 위했던 용기 있는 학자였다.
박제가의 세계관과 사상이 비록 한계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시대를 앞선 볼 줄 알았던 경제관을 가지고, 부국을 꿈꾸고 궁핍한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 점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도서 -
박제가, 북학의, 돌베개, 2003
유봉학,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5
오세영윤일현김성준, 초정 박제가의 實學思想과 海運通常論, 신서원, 2004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실학사상사, 다운샘, 2002
김인규, 북학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근대적 성격, 다운샘, 2000
한정주,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다산초당, 2007
(1) 소비 장려에 대한 한계
박제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비를 장려하여 시장의 수요를 늘이고 이를 통해 생산이 증가하고 기술일 발전하는 순환의 단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조선 후기 농업 경영의 변화에 따른 농민층의 분화를 간과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영농 기술의 발달은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경영에도 변화를 일으켜서 일부 농민들은 광작(廣作)이 가능해졌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농민 1인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이앙법에 의해 종래면적보다 약 5배로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력은 80% 가량 감소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 능력이 증대하면서 직파법으로 10마지기도 못 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마지기 내지는 40마지기까지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광작에 따라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일부 자작농과 소작농의 경우는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다수의 농민을 농촌에서 떠나게 했다.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 주고 일부 농토만 직영하던 지주들은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소작지를 회수하여직영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작농은 소작지를 잃기가 십상이었다. 따라서 일부 농민들은 부농층으로 성장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에서 밀려나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농민층의 몰락은 농촌 사회를 파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의 삶이 이렇게 피폐해지는데 소비를 늘리라는 주장은 그들에게는 억지인 것이다. 최소한의 삶의 유지도 어려웠던 그들에게 사치는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요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에게 검약이란 미덕(美德)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2) 독과점의 우려
설사 소비의 촉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독과점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박제가가 상업의 역할을 중시하였지만 당시 사회는 그에 대해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박제가는 ‘이용(利用)’을 통한 ‘후생(厚生)’의 증대를 꽤하였으나 시장권의 확대가 단지 ‘이용(利用)’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매점매석이란 행위로 잘 나타나있다. 실제로도 조선 후기 상업의 전개에 따라 상인들 사이에선 독과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대해 일정한 부담을 지기로 하고 금난전권(禁難廛權)을 얻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했다.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은 본래 상거래 행위를 감독하는 평시서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조선 후기 상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전은 정부에 대해 국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에 반대 급부로서 금난전권을 요구, 이를 취득하였다. 금난전권은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허용하였으나, 후에 많은 시전들이 이를 행사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게 되어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자 그들 중 일부는 도고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도고 역시 매점매석을 통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노렸다. 이들은 국가재정에도 문제를 끼쳤으며 자신들이 벌어들인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 조선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Ⅴ. 맺음말
여전히 유학적 세계관이 뿌리잡고 있지만 근대를 향한 싹이 움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조선사회에서 박제가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난이 조선후기 사회의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박제가는 농업이 중시되던 사회 속에서 농업 진흥책만으로는 나라가 크게 부강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여 부강한 나라와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상업의 활성화와 해외 무역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인프라의 구축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물적 토대 위에 전근대 조선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인 차별적인 신분 제도를 개선하여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농경 중심의,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선진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박제가의 사상은 당시 집권층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층에게 그의 주장은 시대를 앞섰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인 주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박제가의 사상은 매우 선각적이었으나 당대의 주류는 물론, 온건한 북학파 사이에서까지도 지나치게 진보적이라고 여겨져 박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후에 정조 서거 후 흉서사건 연루를 빌미로 하여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1803년에 조정에서는 박제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처분을 내려졌지만 현지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1804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제가는 1805년에 사면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 달에 56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현세에 박제가의 사상은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명분만을 중시하던 성리학의 비현실적인 면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여 조선 사회가 나아갈 길을 새롭게 모색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박제가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시대에 자신의 주장을 저서 북학의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왕 앞에서도 펼쳤던, 진정으로 조선의 미래를 위했던 용기 있는 학자였다.
박제가의 세계관과 사상이 비록 한계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시대를 앞선 볼 줄 알았던 경제관을 가지고, 부국을 꿈꾸고 궁핍한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 점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도서 -
박제가, 북학의, 돌베개, 2003
유봉학,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5
오세영윤일현김성준, 초정 박제가의 實學思想과 海運通常論, 신서원, 2004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실학사상사, 다운샘, 2002
김인규, 북학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근대적 성격, 다운샘, 2000
한정주,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다산초당, 2007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