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당대(唐代)의 시대의 배경
3. 당시의 시기별 특징
(1) 초당
(2) 성당
(3) 중당
(4) 만당
4. 시선(詩仙) 이백의 생애와 사상
5. 이백시가의 예술적 특징
6. 시가발전사에서의 이백의 위치와 영향
7. 이백 악부의 내용
8. 이백의 작품에 드러나는 제세의지
9. 시성 두보의 생애와 사상
10. 두보의 시기별 분류
(1) 전기 - 안녹산의 난 이전
(2) 후기 - 안녹산의 난 이후
11. 두보의 시 분석
12. 이백과 두보의 만남과 이별
13. 이백과 두보의 시 비교
14. 중국문학의 범주를 벗어난 시작의 본보기, 이백과 두보
15. 참고자료
2. 당대(唐代)의 시대의 배경
3. 당시의 시기별 특징
(1) 초당
(2) 성당
(3) 중당
(4) 만당
4. 시선(詩仙) 이백의 생애와 사상
5. 이백시가의 예술적 특징
6. 시가발전사에서의 이백의 위치와 영향
7. 이백 악부의 내용
8. 이백의 작품에 드러나는 제세의지
9. 시성 두보의 생애와 사상
10. 두보의 시기별 분류
(1) 전기 - 안녹산의 난 이전
(2) 후기 - 안녹산의 난 이후
11. 두보의 시 분석
12. 이백과 두보의 만남과 이별
13. 이백과 두보의 시 비교
14. 중국문학의 범주를 벗어난 시작의 본보기, 이백과 두보
15. 참고자료
본문내용
이 48세 이후 대력 5년(770) 겨울 호남의 배안에서 죽기까지 11년 동안이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았다.
두보를 시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를 통한 성인이란 뜻이다. 그는 과연 위대한 문학가이자 최고의 시인이다. 그는 냉철한 사실주의자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이며 또 열렬히 충군애민하는 애국자이자 동시에 인자하고 성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두보는 철두철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인애의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뛰어난 유학자인 두예의 가계를 이어받았고 동시에 탁월한 시재를 발휘한 두심언의 후손임을 자부했다. 따라서 그는 사상면에서나 시의 기교면에서나 우수한 유산을 물려 받고 태어난 천품의 시인이었다. 동양적 휴머니즘의 결정인 유가의 살신성인하겠다는 인애정신과 수기치인의 군자도를 성실히 지킨 두보는 시의 표현이나 기교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기발하고 또 참신했다. <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던 그였다.
그는 한 자 한 귀절을 신중히 다졌고 또한 성운의 묘를 다했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형식적 표현면에서도 최고의 일품이다. 육조대의 문학의 정화를 총집성한 < 문성 >을 깊이 연구하여 그 광채와 전통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 그는 시에 있어서 자기만의 빛나고 새로운 경지의 창작을 이륙했던 것이다. 위대한 내용과 사상 탁월한 표현과 기교가 조화된 두보의 작품은 동시에 전통이란 깊은 뿌리에서 자란 참신하고도 화사한 창조의 미를 마냥 자유롭게 피어나게 한 꽃같이 자연스럽고 신묘한 걸작이다.
10. 두보의 시기별 분류
작품은 사람이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와 더불어 작품은 역시 장소와 때와 민족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게 마련이다. 더욱이 두보 같은 사실주의자의 작품은 시대와 사회를 충실히 그린 것으로 바로 그때, 그 사회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두보가 처했던 시기는 당제국이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급전직하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하던 전환기로 급격한 사회 변천과 온갖 모순이 두드러지게 노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란은 죽음과 이별, 곤궁과 기아를 동반한다. 이에 가장 고생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역시 일반 민중들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던 두보는 이들을 끝없는 휴머니즘으로 옹호했고 반면 전란의 장본인인 역적들에게 끝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두보가 처했던 시대를 대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겠다.
(1) 전기 - 안녹산의 난 이전
두보가 출생하던 선천 원년 8월에 예종이 자리를 태자 융기에게 물림으로써 당나라는 현종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현종은 연호를 개원이라 고쳤고 개원 29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의 당나라는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 하겠다. 당현종은 원래가 영명한 성품을 타고났다. 그는 등극하자 요숭. 송경. 장구령 등의 명신을 등용하여 정사에 장려했으므로 당나라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등 모든 면에서 눈부신 발정을 이룩했다. 두보는 < 억석 >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었다.
옛날을 회상하노라! 개원 전성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만호의 집이 들어섰고
쌀은 기름이 흐르고 희었고
관가나 개인의 곡식 창고는 꽉찼었노라.
온 천하의 길에는 승냥이나 호랑이같은 도적들이 없었으니
먼길 가는데 궂이 길일을 택할 필요가 없었으며
제나라 노나라의 특산품인 비단을 소송하는 수레가 열을 지었고
남자나 여자들은 제각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생산했었다.
궁중에서는 천자가 운문곡을 연주했고
천하의 모든 선비들이 다같은 벗으로서 긴밀하게 친교를 맺었으며
백여 년간을 두고 천재지변도 일어나지 않았고
숙손통의 예악이나 소하의 율법같이 훌륭한 문물제도가
수립되었었다.
이렇듯이 당시는 천하가 평안했고 생산이 풍성하였으며 국민들은 마냥 태평성세에 도취할 수 있었다. 천보 13년에 인구는 5천 8십 8만이었다. 한편 당나라는 국토확장전쟁에서도 거듭 승리를 거두었다. 원래부터 침략전쟁을 반대하던 두보는 다음과 같이 < 견회 >에서 변경 확대전쟁을 비판했다.
전의황제는 무력을 좋아했으며 천하도 쇠락하지 않았었다.
맹장은 서역을 평정했고
막강한 무력은 걸안을 격파했다.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성하나를 공략했고
장수들은 언제나 승리만을 보고하고 패전은 알리지 않았다.
이제 황제는 흙뿌리듯 하사품을 내려주었으며
한 자의 땅을 뺏기 위해 백명의 병사를 희생했다.
이렇듯 변경개척의 대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음양태화의 기운이 천지에서 사라져 세상이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치솟는 당나라의 국세는 그런대로 내부의 여러 모순을 점차로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개원 24년 학자풍의 명재상 장구령이 실각하고 <입에는 꿀 뱃속에는 칼을 품은 > 이임보가 실권을 잡게 되자 당나라 조정은 날로 황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경에 접어 들면서 혼용해진 현종이 자기의 아들 수왕의 비였던 양태진을 맞아 양귀비라 높이고 그녀에게 빠져 일야 유연만을 일삼고 모든 대소의 정사를 이임보에게 맡김으로써 사회의 기강마저 혼탁하게 흐려지게 되었다. 천보 6년에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한 목적으로 과거를 시행했다. 그러나 교활한 이임보는 한사람의 합격자고 내지않고 < 야에는 슬기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 라고 현종을 기만했다.
이때에 두보도 과거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통했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 조정은 악당들 손아귀에 놀아났고 차츰 모든 선비나 학자및 지식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국민과 유리된 당나라 조정은 부패와 방탕, 안일과 무능, 어둠과 실망속에 급속도로 하락의 길은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폭발이 바로 안녹산의 반란이었다.
(2) 후기 - 안녹산의 난 이후
천보 13년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는 바야흐로 쇠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보가 죽던 대종 대력 5년까지의 약 15 년간을 후반기로하고 보면 당나라의 모순과 불평이 사실로서 노출되어 사회와 나라가 전란과 쇠퇴에 빠졌던 시기였다. 최고로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당나라가 일조에 암흑과 혼란속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통치계급의 실책이라 하겠다. 두보도 다음과 같이 그의 시에서 비판했다.
귀족들의 붉은 대문안에는 술과 고기가
두보를 시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를 통한 성인이란 뜻이다. 그는 과연 위대한 문학가이자 최고의 시인이다. 그는 냉철한 사실주의자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이며 또 열렬히 충군애민하는 애국자이자 동시에 인자하고 성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두보는 철두철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인애의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뛰어난 유학자인 두예의 가계를 이어받았고 동시에 탁월한 시재를 발휘한 두심언의 후손임을 자부했다. 따라서 그는 사상면에서나 시의 기교면에서나 우수한 유산을 물려 받고 태어난 천품의 시인이었다. 동양적 휴머니즘의 결정인 유가의 살신성인하겠다는 인애정신과 수기치인의 군자도를 성실히 지킨 두보는 시의 표현이나 기교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기발하고 또 참신했다. <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던 그였다.
그는 한 자 한 귀절을 신중히 다졌고 또한 성운의 묘를 다했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형식적 표현면에서도 최고의 일품이다. 육조대의 문학의 정화를 총집성한 < 문성 >을 깊이 연구하여 그 광채와 전통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 그는 시에 있어서 자기만의 빛나고 새로운 경지의 창작을 이륙했던 것이다. 위대한 내용과 사상 탁월한 표현과 기교가 조화된 두보의 작품은 동시에 전통이란 깊은 뿌리에서 자란 참신하고도 화사한 창조의 미를 마냥 자유롭게 피어나게 한 꽃같이 자연스럽고 신묘한 걸작이다.
10. 두보의 시기별 분류
작품은 사람이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와 더불어 작품은 역시 장소와 때와 민족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게 마련이다. 더욱이 두보 같은 사실주의자의 작품은 시대와 사회를 충실히 그린 것으로 바로 그때, 그 사회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두보가 처했던 시기는 당제국이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급전직하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하던 전환기로 급격한 사회 변천과 온갖 모순이 두드러지게 노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란은 죽음과 이별, 곤궁과 기아를 동반한다. 이에 가장 고생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역시 일반 민중들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던 두보는 이들을 끝없는 휴머니즘으로 옹호했고 반면 전란의 장본인인 역적들에게 끝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두보가 처했던 시대를 대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겠다.
(1) 전기 - 안녹산의 난 이전
두보가 출생하던 선천 원년 8월에 예종이 자리를 태자 융기에게 물림으로써 당나라는 현종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현종은 연호를 개원이라 고쳤고 개원 29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의 당나라는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 하겠다. 당현종은 원래가 영명한 성품을 타고났다. 그는 등극하자 요숭. 송경. 장구령 등의 명신을 등용하여 정사에 장려했으므로 당나라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등 모든 면에서 눈부신 발정을 이룩했다. 두보는 < 억석 >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었다.
옛날을 회상하노라! 개원 전성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만호의 집이 들어섰고
쌀은 기름이 흐르고 희었고
관가나 개인의 곡식 창고는 꽉찼었노라.
온 천하의 길에는 승냥이나 호랑이같은 도적들이 없었으니
먼길 가는데 궂이 길일을 택할 필요가 없었으며
제나라 노나라의 특산품인 비단을 소송하는 수레가 열을 지었고
남자나 여자들은 제각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생산했었다.
궁중에서는 천자가 운문곡을 연주했고
천하의 모든 선비들이 다같은 벗으로서 긴밀하게 친교를 맺었으며
백여 년간을 두고 천재지변도 일어나지 않았고
숙손통의 예악이나 소하의 율법같이 훌륭한 문물제도가
수립되었었다.
이렇듯이 당시는 천하가 평안했고 생산이 풍성하였으며 국민들은 마냥 태평성세에 도취할 수 있었다. 천보 13년에 인구는 5천 8십 8만이었다. 한편 당나라는 국토확장전쟁에서도 거듭 승리를 거두었다. 원래부터 침략전쟁을 반대하던 두보는 다음과 같이 < 견회 >에서 변경 확대전쟁을 비판했다.
전의황제는 무력을 좋아했으며 천하도 쇠락하지 않았었다.
맹장은 서역을 평정했고
막강한 무력은 걸안을 격파했다.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성하나를 공략했고
장수들은 언제나 승리만을 보고하고 패전은 알리지 않았다.
이제 황제는 흙뿌리듯 하사품을 내려주었으며
한 자의 땅을 뺏기 위해 백명의 병사를 희생했다.
이렇듯 변경개척의 대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음양태화의 기운이 천지에서 사라져 세상이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치솟는 당나라의 국세는 그런대로 내부의 여러 모순을 점차로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개원 24년 학자풍의 명재상 장구령이 실각하고 <입에는 꿀 뱃속에는 칼을 품은 > 이임보가 실권을 잡게 되자 당나라 조정은 날로 황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경에 접어 들면서 혼용해진 현종이 자기의 아들 수왕의 비였던 양태진을 맞아 양귀비라 높이고 그녀에게 빠져 일야 유연만을 일삼고 모든 대소의 정사를 이임보에게 맡김으로써 사회의 기강마저 혼탁하게 흐려지게 되었다. 천보 6년에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한 목적으로 과거를 시행했다. 그러나 교활한 이임보는 한사람의 합격자고 내지않고 < 야에는 슬기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 라고 현종을 기만했다.
이때에 두보도 과거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통했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 조정은 악당들 손아귀에 놀아났고 차츰 모든 선비나 학자및 지식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국민과 유리된 당나라 조정은 부패와 방탕, 안일과 무능, 어둠과 실망속에 급속도로 하락의 길은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폭발이 바로 안녹산의 반란이었다.
(2) 후기 - 안녹산의 난 이후
천보 13년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는 바야흐로 쇠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보가 죽던 대종 대력 5년까지의 약 15 년간을 후반기로하고 보면 당나라의 모순과 불평이 사실로서 노출되어 사회와 나라가 전란과 쇠퇴에 빠졌던 시기였다. 최고로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당나라가 일조에 암흑과 혼란속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통치계급의 실책이라 하겠다. 두보도 다음과 같이 그의 시에서 비판했다.
귀족들의 붉은 대문안에는 술과 고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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