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루터의 신학이론
Ⅲ. 칼빈의 신학이론
Ⅳ. 종교개혁의 사회적 영향력
Ⅴ. 맺음말
※ 참고문헌
Ⅱ. 루터의 신학이론
Ⅲ. 칼빈의 신학이론
Ⅳ. 종교개혁의 사회적 영향력
Ⅴ.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야 하며, 자기의 직업이 하늘의 소명, 천직인 줄 알아야 하며, 그 천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전하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직업이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길이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직업차별이 철폐되고 노동신성의 이론이 생긴 것이니 이러한 직업 및 노동개념의 혁명이 서양사회를 시민 또는 서민사회로, 그 문화를 시민 또는 대중문화로 전화시킨 것이고, 평등사회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중세기의 귀족사회와 그 사회계급제도는 서서히 무너져 갔고, 새로운 산업발달에 의한 경제적 문명이 발달하여 17, 18세기에 중산계급이라고 호칭할만한 부유층이 생겼지만 그것이 사회에서 법적으로 인정된 새로운 한 계급으로서 형성된것이 아니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기 문화를 금욕주의문화라고 표현하는 것도 15, 16세기에 와서는 적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문예부흥운동의 인문주의 조류가 성행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대학계에도 인문주의 학풍이 불고 있었고 해서 문화적 개혁이 서서히 진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교훈으로나 전통적인 금욕주의를 초극할만한 운동을 펴지 않았다. 이를테면 수도원은 종전과는 달리 입소자 수도 줄어들었고 수도원의 금욕생활의 취미도 감퇴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수도원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있었다. 루터도 개혁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문제로 로마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또 교회도 교회절기에 따라 부분적인 금욕생활을 계속 실천하고 있었고 신부의 독신제도에 대해서도 토론의 여지가 없었고 그 밖의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활동에 대한 종교적 견제와 금지사항들이 많았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이때 성하기 시작한 상공업의 발달과 신흥도시 생활문화를 저지할 힘도 없었고 또 이 새 문화 환경에 대한 합리적인 적응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종교개혁운동이 추진한 반금욕주의 운동에는 다음과 같다
먼저 루터는 남녀 수도원생활을 금지하였다. 수도원은 중세의 금욕생활의 본산이 되어 있었다. 루터는 이성이 계시와 신앙을 대신하여 종교적 기능을 대행하려는 것을 금했을 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은 자연적 은사는 이성이라고 말했다.
이 당시 사회윤리 면에서 사람들의 빈곤의 극복과 산업의 발달을 위한 경제활동이 교회의 어떤 종류들에 저촉되어서 활기를 띨 수 없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자제도에 관한 종류였다. 루터는 이 문제에 있어서 소극적 및 금욕적이었으나 칼빈은 제제바의 빈곤타파와 상공업 발달을 위한 자본형성을 위하여 이자제도를 완화하여 종전보다 금리를 조금 인상하여 유휴 소자본들이 기업가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근면, 절약, 절제 등을 강조하는 한편 사치, 낭비, 음란행위들을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그리고 루터의 천직 불변 사상과는 달리 칼빈은 직업의 변경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칼빈의 윤리가 반문화적인 것이라는 비평은 그가 지도하던 그 소도시의 시민생활상과 사회상에 대한 깊고 이해있는 통찰을 소홀하게 한 것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16세기의 사회와 19, 20세기의 사회를 동일선상에 두고 평하는 역사비평도 무모한 것이라 생각된다. 종교개혁자들은 다회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Ⅴ. 맺음말
종교개혁은 그저 종교 문제의 개혁에 멈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카톨릭 문명 세계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사상 일체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종교상의 문제가 어떻게 그렇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중세 카톨릭 교회는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관련하지 않은것이 없었다는 것과, 따라서 교회는 세속의 온갖 문제와 유기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그러기에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에 도전을 받거나 그 제도에 금이 가게 되었을때 그것은 교회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밀착해 있었던 서구 중세 사회 전체의 문제가 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종교적 교훈과 실천이 근세유럽의 문화형성과 발달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시대가 아직도 중세적인 종교우위 시대였기 때문이니, 종교가 문화의 원천이라는 교설을 현대에 와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문화의 영향을 종교가 받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종교와 문화의 유대는 밀접한 것이므로 상호교류를 반대하거나 막을 필요는 없다. 서양문화가 그동안 극도로 속화, 곧 비기독교적인 것이 되었다는 비평을 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부흥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현상이 나라와 지역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종교 사상의 최대의 적수는 무신론적인 자연, 사회과학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기독교를 허위의식의 산물로서 혹평하여 무신론세대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문예부흥 인문주의의 후예인 이러한 사상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인문주의의 갖가지 이데올로기의 파산을 경험한 이 시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문화적 이념으로 볼 수 있는 정교관계, 만인사제교설 및 사회적 금욕윤리는 현대의 정치권력의 상징인 내셔널리즘의 횡포와 빈부의 격차에서 생긴 사회계층이 빚는 사회악과 인간의 육신과 자연을 황폐시키고 파멸시킬 가공할만한 생태학적 위기에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구출, 보호할 수 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 참고문헌
<단행본>
해롤드 나이트, 칼빈의 신학사상, 기독교문화협회, 1982.
A.E. 맥그래스/박종숙 역, 종교개혁 입문, 성광문화사, 1998.
올리비에 크리스텡/채계병 역, 종교개혁:루터와 칼뱅,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사, 1999.
<논문>
강치원, 루터의 신학 이해, 역사신학논총,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2002.
귄애회, 칼빈에 있어서의 성화와 율법의 위치,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대학원, 1992.
정탁정, 칼빈의 예정론 고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1983.
노명식, 종교개혁의 사회정치적 배경, 기독교사상, 대한기독교서회, 1978.
<사전>
박조용,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1994,
<관련홈페이지>
http://www.ctm.or.kr/educh/reformation/ CTM 종교개혁
중세기 문화를 금욕주의문화라고 표현하는 것도 15, 16세기에 와서는 적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문예부흥운동의 인문주의 조류가 성행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대학계에도 인문주의 학풍이 불고 있었고 해서 문화적 개혁이 서서히 진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교훈으로나 전통적인 금욕주의를 초극할만한 운동을 펴지 않았다. 이를테면 수도원은 종전과는 달리 입소자 수도 줄어들었고 수도원의 금욕생활의 취미도 감퇴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수도원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있었다. 루터도 개혁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문제로 로마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또 교회도 교회절기에 따라 부분적인 금욕생활을 계속 실천하고 있었고 신부의 독신제도에 대해서도 토론의 여지가 없었고 그 밖의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활동에 대한 종교적 견제와 금지사항들이 많았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이때 성하기 시작한 상공업의 발달과 신흥도시 생활문화를 저지할 힘도 없었고 또 이 새 문화 환경에 대한 합리적인 적응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종교개혁운동이 추진한 반금욕주의 운동에는 다음과 같다
먼저 루터는 남녀 수도원생활을 금지하였다. 수도원은 중세의 금욕생활의 본산이 되어 있었다. 루터는 이성이 계시와 신앙을 대신하여 종교적 기능을 대행하려는 것을 금했을 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은 자연적 은사는 이성이라고 말했다.
이 당시 사회윤리 면에서 사람들의 빈곤의 극복과 산업의 발달을 위한 경제활동이 교회의 어떤 종류들에 저촉되어서 활기를 띨 수 없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자제도에 관한 종류였다. 루터는 이 문제에 있어서 소극적 및 금욕적이었으나 칼빈은 제제바의 빈곤타파와 상공업 발달을 위한 자본형성을 위하여 이자제도를 완화하여 종전보다 금리를 조금 인상하여 유휴 소자본들이 기업가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근면, 절약, 절제 등을 강조하는 한편 사치, 낭비, 음란행위들을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그리고 루터의 천직 불변 사상과는 달리 칼빈은 직업의 변경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칼빈의 윤리가 반문화적인 것이라는 비평은 그가 지도하던 그 소도시의 시민생활상과 사회상에 대한 깊고 이해있는 통찰을 소홀하게 한 것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16세기의 사회와 19, 20세기의 사회를 동일선상에 두고 평하는 역사비평도 무모한 것이라 생각된다. 종교개혁자들은 다회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Ⅴ. 맺음말
종교개혁은 그저 종교 문제의 개혁에 멈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카톨릭 문명 세계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사상 일체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종교상의 문제가 어떻게 그렇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중세 카톨릭 교회는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관련하지 않은것이 없었다는 것과, 따라서 교회는 세속의 온갖 문제와 유기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그러기에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에 도전을 받거나 그 제도에 금이 가게 되었을때 그것은 교회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밀착해 있었던 서구 중세 사회 전체의 문제가 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종교적 교훈과 실천이 근세유럽의 문화형성과 발달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시대가 아직도 중세적인 종교우위 시대였기 때문이니, 종교가 문화의 원천이라는 교설을 현대에 와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문화의 영향을 종교가 받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종교와 문화의 유대는 밀접한 것이므로 상호교류를 반대하거나 막을 필요는 없다. 서양문화가 그동안 극도로 속화, 곧 비기독교적인 것이 되었다는 비평을 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부흥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현상이 나라와 지역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종교 사상의 최대의 적수는 무신론적인 자연, 사회과학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기독교를 허위의식의 산물로서 혹평하여 무신론세대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문예부흥 인문주의의 후예인 이러한 사상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인문주의의 갖가지 이데올로기의 파산을 경험한 이 시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문화적 이념으로 볼 수 있는 정교관계, 만인사제교설 및 사회적 금욕윤리는 현대의 정치권력의 상징인 내셔널리즘의 횡포와 빈부의 격차에서 생긴 사회계층이 빚는 사회악과 인간의 육신과 자연을 황폐시키고 파멸시킬 가공할만한 생태학적 위기에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구출, 보호할 수 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 참고문헌
<단행본>
해롤드 나이트, 칼빈의 신학사상, 기독교문화협회, 1982.
A.E. 맥그래스/박종숙 역, 종교개혁 입문, 성광문화사, 1998.
올리비에 크리스텡/채계병 역, 종교개혁:루터와 칼뱅,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사, 1999.
<논문>
강치원, 루터의 신학 이해, 역사신학논총,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2002.
귄애회, 칼빈에 있어서의 성화와 율법의 위치,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대학원, 1992.
정탁정, 칼빈의 예정론 고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1983.
노명식, 종교개혁의 사회정치적 배경, 기독교사상, 대한기독교서회, 1978.
<사전>
박조용,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1994,
<관련홈페이지>
http://www.ctm.or.kr/educh/reformation/ CTM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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