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로맨티시즘과 내셔널리즘
2. 내셔널리즘과 민족통합의 노력 : 1800~1848
3. 내셔널리즘, 자유주의, 그리고 1848년 혁명
4. 국민국가의 건설, 1850~1870
2. 내셔널리즘과 민족통합의 노력 : 1800~1848
3. 내셔널리즘, 자유주의, 그리고 1848년 혁명
4. 국민국가의 건설, 1850~1870
본문내용
저한 약화를 초래한 것이다. 1860년대에 이러한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곤 했다.
독일 통일의 단계 (1) 오스트리아의 약화 : 독일의 여러 국가들을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연합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 비스마르크는 우선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 대한 주도적 위치로부터 배제시키는 공작을 폈다. 이러한 방편으로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 및 홀슈타인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덴마크와의 오랜 분쟁에 불을 붙였다. 덴마크와의 전쟁에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승리한 후 전리품의 분배에 있어 분쟁이 일어났다. 1866년 소위 7주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슐레스비히 및 홀슈타인 지역과 베네치아를 차지하며 마인강 이북의 독일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으로 통합시켜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2)호의적인 대중정책 : 그는 프로이센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통합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금껏 독일정치인도 활용하지 못했던 대중을 선거구민으로 교화시키게 된다. 이에 양원제를 채택함으로써 지주와 자본가 양쪽 모두에 대항하여 중앙정부의 장악력을 강화하고자 민중의 지지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독일 사회주의자들과의 흥정을 성사시켰고 그들은 보통선거의 대가로 연방을 지지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3)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보불전쟁) : 독일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 비스마르크는 1870-1871년 보불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와의 대립을 통해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그리고 아직도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남부 국가에서 내셔널리즘 정신이 촉발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로 촉발된 이 전쟁은 전문적인 훈련을 쌓고 뛰어난 장비를 갖춘 프로이센 군대의 승리고 끝난다. 그 과정에서 약화된 오스트리아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오스트리아 내의 마쟈르인들은 환영하였다. 하나의 내셔널리즘 의식이 또 하나의 내셔널리즘 의식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일 제국 : 프랑스 제정이 붕괴되자 파리의 저항세력들은 겨울을 넘기며 1871년 초까지 계속 독일에 맞섰다. 그 동안 비스마르크는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진행시켜 왔던 독일통일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넉달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된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조약에 따라 접경지대인 알자스 지방은 신생제국에 양도되었고 프랑스인은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내야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합이 거둔 결과는 온 천하에 알려졌다.
이탈리아의 통일 :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독일통일과 거의 유사한 진행과정을 거쳤다. 1848년 이전 독립 국가들 중 북부의 사르디냐 왕국, 중부의 교황령 국가,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 있다. 1848년 혁명의 열기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자 통치자들은 하나 둘씩 민주개혁을 받아들였다. 사르디냐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시민적 자유와 의회제 정부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자우주의만큼이나 내셔널리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로맨틱한 애국자들은 국민을 로마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위로 복귀시키자는 리소르지멘토를 꿈꾸어왔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는 단일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데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취해야 할 형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첫째, 마치니의 지도력 둘째, 교황을 국가원수로 한 이탈리아 연방국가를 세우는 것 셋째, 사르디냐 왕국에 기반한 입헌군주정 주창이었다. 세 번째의 주도자로 카밀로 디 카부르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축출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는 러시아와 대립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호의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크림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나폴레옹 3세와 비밀회담을 가지며 프랑스에게 사보이와 니스를 넘겨주는 대가로 협력관계를 이루게 된다.
예정대로 1859년에 일어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처음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나갔으나 프랑스는 반교권적 카부르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가국내의 카톨릭 교도와의 반목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하였다. 사르디냐는 이를 극복하며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병합과 기타지역을 획득해 나가는데 성공하였다
제2보는 나폴리 왕국의 점령이었다. 부르봉 가문인 프란시스코 2세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 왕국은 이탈리아 백성들로부터 격렬한 증오를 받았는데 1860년 5월 주세페 가리발디는 묽은 셔츠연대와 함께 11월까지 프란시스코 2세의 왕국전체를 함락하였다. 처음에 그는 이 지역을 독립공화국으로 만들려 했지만 마음을 바
독일 통일의 단계 (1) 오스트리아의 약화 : 독일의 여러 국가들을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연합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 비스마르크는 우선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 대한 주도적 위치로부터 배제시키는 공작을 폈다. 이러한 방편으로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 및 홀슈타인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덴마크와의 오랜 분쟁에 불을 붙였다. 덴마크와의 전쟁에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승리한 후 전리품의 분배에 있어 분쟁이 일어났다. 1866년 소위 7주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슐레스비히 및 홀슈타인 지역과 베네치아를 차지하며 마인강 이북의 독일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으로 통합시켜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2)호의적인 대중정책 : 그는 프로이센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통합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금껏 독일정치인도 활용하지 못했던 대중을 선거구민으로 교화시키게 된다. 이에 양원제를 채택함으로써 지주와 자본가 양쪽 모두에 대항하여 중앙정부의 장악력을 강화하고자 민중의 지지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독일 사회주의자들과의 흥정을 성사시켰고 그들은 보통선거의 대가로 연방을 지지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3)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보불전쟁) : 독일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 비스마르크는 1870-1871년 보불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와의 대립을 통해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그리고 아직도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남부 국가에서 내셔널리즘 정신이 촉발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로 촉발된 이 전쟁은 전문적인 훈련을 쌓고 뛰어난 장비를 갖춘 프로이센 군대의 승리고 끝난다. 그 과정에서 약화된 오스트리아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오스트리아 내의 마쟈르인들은 환영하였다. 하나의 내셔널리즘 의식이 또 하나의 내셔널리즘 의식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일 제국 : 프랑스 제정이 붕괴되자 파리의 저항세력들은 겨울을 넘기며 1871년 초까지 계속 독일에 맞섰다. 그 동안 비스마르크는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진행시켜 왔던 독일통일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넉달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된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조약에 따라 접경지대인 알자스 지방은 신생제국에 양도되었고 프랑스인은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내야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합이 거둔 결과는 온 천하에 알려졌다.
이탈리아의 통일 :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독일통일과 거의 유사한 진행과정을 거쳤다. 1848년 이전 독립 국가들 중 북부의 사르디냐 왕국, 중부의 교황령 국가,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 있다. 1848년 혁명의 열기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자 통치자들은 하나 둘씩 민주개혁을 받아들였다. 사르디냐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시민적 자유와 의회제 정부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자우주의만큼이나 내셔널리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로맨틱한 애국자들은 국민을 로마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위로 복귀시키자는 리소르지멘토를 꿈꾸어왔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는 단일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데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취해야 할 형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첫째, 마치니의 지도력 둘째, 교황을 국가원수로 한 이탈리아 연방국가를 세우는 것 셋째, 사르디냐 왕국에 기반한 입헌군주정 주창이었다. 세 번째의 주도자로 카밀로 디 카부르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축출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는 러시아와 대립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호의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크림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나폴레옹 3세와 비밀회담을 가지며 프랑스에게 사보이와 니스를 넘겨주는 대가로 협력관계를 이루게 된다.
예정대로 1859년에 일어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처음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나갔으나 프랑스는 반교권적 카부르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가국내의 카톨릭 교도와의 반목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하였다. 사르디냐는 이를 극복하며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병합과 기타지역을 획득해 나가는데 성공하였다
제2보는 나폴리 왕국의 점령이었다. 부르봉 가문인 프란시스코 2세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 왕국은 이탈리아 백성들로부터 격렬한 증오를 받았는데 1860년 5월 주세페 가리발디는 묽은 셔츠연대와 함께 11월까지 프란시스코 2세의 왕국전체를 함락하였다. 처음에 그는 이 지역을 독립공화국으로 만들려 했지만 마음을 바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