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헤겔의 생애
Ⅲ. 헤겔의 의지
1. 의지의 3계기
1) 추상적 보편성의 계기
2) 특수성의 계기
3) 개별성
2. 의지의 3형태
1) 자연적 의지
2) 자의
3) 즉자 대자적 의지
3. 의지의 주관성과 객관성
1) 의지의 주관성
2) 의지의 객관성
Ⅳ. 헤겔의 윤리학
Ⅴ. 헤겔의 미학
Ⅵ. 헤겔과 불교
Ⅶ. 헤겔의 세 가지 욕구
Ⅷ. 헤겔과 라이프니츠
Ⅸ. 헤겔과 마르크스
Ⅹ. 헤겔의 전쟁과 국제관계
Ⅺ. 결론
참고문헌
Ⅱ. 헤겔의 생애
Ⅲ. 헤겔의 의지
1. 의지의 3계기
1) 추상적 보편성의 계기
2) 특수성의 계기
3) 개별성
2. 의지의 3형태
1) 자연적 의지
2) 자의
3) 즉자 대자적 의지
3. 의지의 주관성과 객관성
1) 의지의 주관성
2) 의지의 객관성
Ⅳ. 헤겔의 윤리학
Ⅴ. 헤겔의 미학
Ⅵ. 헤겔과 불교
Ⅶ. 헤겔의 세 가지 욕구
Ⅷ. 헤겔과 라이프니츠
Ⅸ. 헤겔과 마르크스
Ⅹ. 헤겔의 전쟁과 국제관계
Ⅺ.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절대적 인륜성은 각각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원리를 이룬다. 이러한 각각의 사회적 관계들이 어떠한 원리에 입각하여 구성될 때 올바르고 정당한 관계가 될 수 있는가, 이 관계들이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확립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그리고 이들의 각각의 적용 영역과 한계는 무엇인가를 우리는 살펴보았다. 가족과 시민사회, 국가는 상호 승인을 통해 형성된 인륜성을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현실화한 사회 제도들이다. 이는 동시에 승인의 원리가 현존하는 사회 제도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당위적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이 개인의 주관성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는 각각의 사회적 관계들에서 그 특수한 형태의 승인이 거부되거나 박탈될 경우 그것이 개인의 자기 정체성에 얼마나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는가를 생각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가 인륜성의 필수적인 구성 계기이고 또 포기될 수 없는 권리인 한, 승인의 거부나 박탈은 또 다른 승인 투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새로운, 즉 승인의 원리에 보다 더 부응하는 사회적 관계 양식들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Ⅱ. 헤겔의 생애
헤겔은 신학 외에도 철학을 공부한다. 기숙사에는 칸트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회가 있다. 헤겔은 이 쾨니히스베르그 출신 사상가의 철학 중 실천철학, 곧 인격의 자율성에 대한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갖는다. 그는 또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의 작품을 탐독한다. 야코비는 신은 오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역시 헤겔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헤겔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루소의 에밀이다. 헤겔은 이 책에서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육관을 접하게 된다. 루소는 인간이란 본성상 선한데(신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릇된 교육이 그들을 문화 괴물로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1793년 졸업시험에 통과한 그는, 그전에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가정교사가 된다.
그는 스위스 베른에서 첫 번째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 헤겔은 이곳에서 4년동안 명문 귀족가문이자 시장집안인 쉬타이거가(家)의 세 아이들을 지도한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많은 양의 책들을, 이제는 무엇보다도 칸트의 작품들을 읽는다. 종교에 관한 초기 논문들이 이때 나온다. 헤겔은 또한 그 무렵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797년 이미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친구 휄더린이 그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준다. 1799년 헤겔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당장 그가 썩 내키지 않던 가정교사 일을 그만둔다. 그는 쉬타이거가와의 고용계약을 취소하고 그길로 예나를 향해 떠난다.
튀링겐 지방의 이 소도시는 당시 독일 정신의 중심지이다. 이 도시가 그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바이마르에서 추밀고문관으로 일하지만, 예나에 거처를 두고 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덕분이다. 대학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던 그는 또한 명망있는 사람들이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고트프리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사조의 주창자중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쉴레겔(August Wilhelm Schelegel)이 모두 괴테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예나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단지 객원교수의 신분으로만 활동하는데, 그 이유는 교수 급료 문제를 담당하고 있기도 한 괴테가 형편없이 적은 액수의 수당만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표면상의 이유는 국가 재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헤겔은 대학시절 친구인 셸링의 주선으로 예나에 오게 된다. 괴테의 도움으로 23세에 대학 교수가 되었던 셸링은 이미 그 당시 독일 넘어서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는 헤겔이 서둘러 교수 자격을 따고 철학 강사 자리를 얻도록 힘써 준다. 그렇지만 강사란 직업 역시 결코 안정된 보수가 달린 자리가 아니어서 신출내기 사상가는 학생들의 수강료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알릴 생각으로 셸링과 함께 철학비평잡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을 창간한다. 그는 여기에 실을 논문들의 대부분을 그 자신이 작성한다. 이 기고 논문들에게 그가 다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철학과 진리의 관계이다. 그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철학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에겐 서로 무순되면서도 똑같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여러 개의 철학이 있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비록 괴테는 복잡하고 심지어는 생소하기조차 한 사상에는 어떤 특별한 관심도 보이지 않지만--괴테 전기작가 리하르트 프리덴탈(Richard Friedenthal)에 따르면 괴테는 오직 자기가 이미 알고 있은 것만을 읽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헤겔의 논문은 그의 관심을 끈다. 1805년 괴테는 헤겔에게 객원교수 자리를 마련해준다. 헤겔은 이를 수락한다. 괴테가 그에게 제시한 급료(연봉 1천 탈러)란 물론 모욕적일 만큼 형편없는 것이지만, 철학자에겐 그 문제로 화낼 여유가 없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소모시키는 원고를 쓰는데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현상학(정신의 나타남의 방식에 대한 이론)이다.
한 비평가에 따르면, 이 이해 불가능한 대작은 헤겔의 세계적 명성의 기반을 다져 준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맑시즘, 곧 수십년후 지구를 뒤흔들고 전 인류를-자주 유혈로 얼룩진-대립으로 갈라놓은 혁명적 사유의 단초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어떤 확정적 해석도 거부하고 있기에, 그 영향력은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 책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부분적으로는 소재의 탓이다. 그러나 그 책임의 또 다른 일부는 헤겔 자신에게 있다. 헤겔은 시간에
Ⅱ. 헤겔의 생애
헤겔은 신학 외에도 철학을 공부한다. 기숙사에는 칸트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회가 있다. 헤겔은 이 쾨니히스베르그 출신 사상가의 철학 중 실천철학, 곧 인격의 자율성에 대한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갖는다. 그는 또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의 작품을 탐독한다. 야코비는 신은 오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역시 헤겔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헤겔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루소의 에밀이다. 헤겔은 이 책에서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육관을 접하게 된다. 루소는 인간이란 본성상 선한데(신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릇된 교육이 그들을 문화 괴물로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1793년 졸업시험에 통과한 그는, 그전에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가정교사가 된다.
그는 스위스 베른에서 첫 번째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 헤겔은 이곳에서 4년동안 명문 귀족가문이자 시장집안인 쉬타이거가(家)의 세 아이들을 지도한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많은 양의 책들을, 이제는 무엇보다도 칸트의 작품들을 읽는다. 종교에 관한 초기 논문들이 이때 나온다. 헤겔은 또한 그 무렵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797년 이미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친구 휄더린이 그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준다. 1799년 헤겔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당장 그가 썩 내키지 않던 가정교사 일을 그만둔다. 그는 쉬타이거가와의 고용계약을 취소하고 그길로 예나를 향해 떠난다.
튀링겐 지방의 이 소도시는 당시 독일 정신의 중심지이다. 이 도시가 그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바이마르에서 추밀고문관으로 일하지만, 예나에 거처를 두고 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덕분이다. 대학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던 그는 또한 명망있는 사람들이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고트프리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사조의 주창자중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쉴레겔(August Wilhelm Schelegel)이 모두 괴테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예나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단지 객원교수의 신분으로만 활동하는데, 그 이유는 교수 급료 문제를 담당하고 있기도 한 괴테가 형편없이 적은 액수의 수당만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표면상의 이유는 국가 재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헤겔은 대학시절 친구인 셸링의 주선으로 예나에 오게 된다. 괴테의 도움으로 23세에 대학 교수가 되었던 셸링은 이미 그 당시 독일 넘어서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는 헤겔이 서둘러 교수 자격을 따고 철학 강사 자리를 얻도록 힘써 준다. 그렇지만 강사란 직업 역시 결코 안정된 보수가 달린 자리가 아니어서 신출내기 사상가는 학생들의 수강료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알릴 생각으로 셸링과 함께 철학비평잡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을 창간한다. 그는 여기에 실을 논문들의 대부분을 그 자신이 작성한다. 이 기고 논문들에게 그가 다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철학과 진리의 관계이다. 그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철학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에겐 서로 무순되면서도 똑같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여러 개의 철학이 있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비록 괴테는 복잡하고 심지어는 생소하기조차 한 사상에는 어떤 특별한 관심도 보이지 않지만--괴테 전기작가 리하르트 프리덴탈(Richard Friedenthal)에 따르면 괴테는 오직 자기가 이미 알고 있은 것만을 읽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헤겔의 논문은 그의 관심을 끈다. 1805년 괴테는 헤겔에게 객원교수 자리를 마련해준다. 헤겔은 이를 수락한다. 괴테가 그에게 제시한 급료(연봉 1천 탈러)란 물론 모욕적일 만큼 형편없는 것이지만, 철학자에겐 그 문제로 화낼 여유가 없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소모시키는 원고를 쓰는데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현상학(정신의 나타남의 방식에 대한 이론)이다.
한 비평가에 따르면, 이 이해 불가능한 대작은 헤겔의 세계적 명성의 기반을 다져 준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맑시즘, 곧 수십년후 지구를 뒤흔들고 전 인류를-자주 유혈로 얼룩진-대립으로 갈라놓은 혁명적 사유의 단초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어떤 확정적 해석도 거부하고 있기에, 그 영향력은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 책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부분적으로는 소재의 탓이다. 그러나 그 책임의 또 다른 일부는 헤겔 자신에게 있다. 헤겔은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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