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아도르노의 철학
Ⅲ. 아도르노의 예술
Ⅳ.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Ⅴ. 아도르노의 가상과 표현 관계
1. 미적 가상
2. 표현의 계기
Ⅵ. 아도르노의 음악적 재료
Ⅶ. 아도르노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
Ⅷ. 결론
참고문헌
Ⅱ. 아도르노의 철학
Ⅲ. 아도르노의 예술
Ⅳ.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Ⅴ. 아도르노의 가상과 표현 관계
1. 미적 가상
2. 표현의 계기
Ⅵ. 아도르노의 음악적 재료
Ⅶ. 아도르노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특수한 것>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재료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예술가가 특수한 인간적 불행을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생각은 보편성이나 균형을 강하게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반고전주의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반고전주의적> 성향은 사회와의 불화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시 전적으로 새로워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재료이해에서 최대의 적은 음악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왜냐하면 음악을 듣는 마음은 당대의 사실적 고통만을 듣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뛰어넘는 음악이해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모든 음악심리학을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유로 <모든 시대의 음악을 변치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견고한 음악적 주관>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음악심리학이 가능한데 그러치 못하다고 말한다[신음악 p. 35]. 이로써 음악을 듣고 심리적인 반응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일반적 음악청취자들의 태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재료> 이해에서 음악이 <아름답다>든지 <듣기 좋다>든지 하는 일반적 음악청취는 배격 당한다. 이 점에서 그는 동반자들에게 바다요정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못하게 명령한 오딧세이와 흡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오딧세이와 동반자들이 자기보존을 위해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면 아도르노는 사회적 거짓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심미적 음악청취를 배제한 것이다. 즉 그는 <진실>을 추구하며 일반적 <미>를 버린 것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책 어디에고 진실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허구를 공박하면서 <진실>이 추구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세상의 고통을 폭로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허구에 대해 부정적인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려내는 데 그치는 태도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매우 혐오할 만한, <자기>가 <타인>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드러낸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재료 이론은 어떤 예술이 <틀린> 예술이고 어떤 것이<맞는> 예술인지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맞는> 예술은 잘못된 사회와 연결된, 틀에 박힌 보편성을 거부하고 유토피아적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유토피아와 현실의 간격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며 이를 드러낸다.
Ⅶ. 아도르노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
19세기말의 허무주의적인 풍토가 짓게 깔려있는 사회상을 보고나서, 니체가 신의 죽음을 고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회의 도래를 선언하였다면, 릴케는 신관 인간관의 관계고리를 풀지 않은 채,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고민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심오한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 제시를 통한 궁극적인 인식을 추종한 것이 바로 릴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미시인>이라고도 불리는 릴케는 장미꽃에서 현란한 아름다움과 날카로운 가시 돛힘을 동시에 읽어내고 인간 실존의 양면성과 비극적이지만 실존적인 인식에 다다른 시인이다. “오 장미 그 순수한 모순이여”를 외치며 묘지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는 어찌보면 무척이나 양면적인 형태를 띠는 인간에게 주어진 비관적인 삶의 실체를 엿보며 계속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릴케로 하여금 이러한 인간 존재의 심연에 대한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을 가지게 만든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때문이 아닐까한다. 19세기말에는 기존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모든 전통적인 신념이나 사조에 대한 회의가 점차적으로 곳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했고(니체가 행한 신의 죽음의 선언이 아마도 이의 절정을 이룰 것이다.), 이에 이어서 모든 것을 새로이 써야할 것 같은 부담스러운 위치에 우리가 처해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연이어서 20세기초에는 무시무시한 세계대전이 세계를 휩쓸어 버린 나머지 인류 전체를 공포와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버렸기에 이러한 불안과 고통은 점점 가중되기만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8세기의 산업 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발전과 새로운 문명의 계속적인 도입에 이어서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 의한 존재 환경의 급속한 변화가 그로하여금 인간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지도록 이끈것이 아닌가한다. 이러한 사실은 릴케의 시들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특히 <시도집>에서) 문명 비판적 성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릴케는 시작품 곳곳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더이상 대지(자연)와 함께 호흡할 수 없으며 자연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상당히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삶의 근거가 바로 자연이고 대지인데 인간들은 이 대지를 임의대로 변화시키고 구획시켜서 자신들의 존재 기반 혹은 바탕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릴케가 당시 극히 대조적인 체험을 경험할 수 있었던 러시아와 파리의 여행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도시화된 나머지 이제 자연과 대지의 숭고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과도한 물질문명이 인간관계마저 잠식해 들어온 나머지 점차 황폐해져가는 인간상의 모습들로 가득했던 당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던 파리,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산업화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러시아에서의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비록 소박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모습, 결국 이러한 대조적인 체험의 결과가 릴케로 하여금 그러한 문명비판적인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양상이 엿보이는 그의 시도집에 있는 시한편을 인용해 보자.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균형과 절제를 잃은 채, 깊은 타락에 빠져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달팽이자국을 진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엔 천천히 가던 곳을 이젠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치 창녀같이 여겨 요란스럽게 치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금속과 유리를 부
이러한 재료이해에서 최대의 적은 음악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왜냐하면 음악을 듣는 마음은 당대의 사실적 고통만을 듣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뛰어넘는 음악이해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모든 음악심리학을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유로 <모든 시대의 음악을 변치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견고한 음악적 주관>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음악심리학이 가능한데 그러치 못하다고 말한다[신음악 p. 35]. 이로써 음악을 듣고 심리적인 반응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일반적 음악청취자들의 태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재료> 이해에서 음악이 <아름답다>든지 <듣기 좋다>든지 하는 일반적 음악청취는 배격 당한다. 이 점에서 그는 동반자들에게 바다요정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못하게 명령한 오딧세이와 흡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오딧세이와 동반자들이 자기보존을 위해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면 아도르노는 사회적 거짓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심미적 음악청취를 배제한 것이다. 즉 그는 <진실>을 추구하며 일반적 <미>를 버린 것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책 어디에고 진실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허구를 공박하면서 <진실>이 추구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세상의 고통을 폭로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허구에 대해 부정적인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려내는 데 그치는 태도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매우 혐오할 만한, <자기>가 <타인>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드러낸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재료 이론은 어떤 예술이 <틀린> 예술이고 어떤 것이<맞는> 예술인지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맞는> 예술은 잘못된 사회와 연결된, 틀에 박힌 보편성을 거부하고 유토피아적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유토피아와 현실의 간격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며 이를 드러낸다.
Ⅶ. 아도르노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
19세기말의 허무주의적인 풍토가 짓게 깔려있는 사회상을 보고나서, 니체가 신의 죽음을 고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회의 도래를 선언하였다면, 릴케는 신관 인간관의 관계고리를 풀지 않은 채,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고민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심오한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 제시를 통한 궁극적인 인식을 추종한 것이 바로 릴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미시인>이라고도 불리는 릴케는 장미꽃에서 현란한 아름다움과 날카로운 가시 돛힘을 동시에 읽어내고 인간 실존의 양면성과 비극적이지만 실존적인 인식에 다다른 시인이다. “오 장미 그 순수한 모순이여”를 외치며 묘지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는 어찌보면 무척이나 양면적인 형태를 띠는 인간에게 주어진 비관적인 삶의 실체를 엿보며 계속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릴케로 하여금 이러한 인간 존재의 심연에 대한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을 가지게 만든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때문이 아닐까한다. 19세기말에는 기존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모든 전통적인 신념이나 사조에 대한 회의가 점차적으로 곳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했고(니체가 행한 신의 죽음의 선언이 아마도 이의 절정을 이룰 것이다.), 이에 이어서 모든 것을 새로이 써야할 것 같은 부담스러운 위치에 우리가 처해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연이어서 20세기초에는 무시무시한 세계대전이 세계를 휩쓸어 버린 나머지 인류 전체를 공포와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버렸기에 이러한 불안과 고통은 점점 가중되기만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8세기의 산업 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발전과 새로운 문명의 계속적인 도입에 이어서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 의한 존재 환경의 급속한 변화가 그로하여금 인간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지도록 이끈것이 아닌가한다. 이러한 사실은 릴케의 시들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특히 <시도집>에서) 문명 비판적 성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릴케는 시작품 곳곳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더이상 대지(자연)와 함께 호흡할 수 없으며 자연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상당히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삶의 근거가 바로 자연이고 대지인데 인간들은 이 대지를 임의대로 변화시키고 구획시켜서 자신들의 존재 기반 혹은 바탕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릴케가 당시 극히 대조적인 체험을 경험할 수 있었던 러시아와 파리의 여행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도시화된 나머지 이제 자연과 대지의 숭고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과도한 물질문명이 인간관계마저 잠식해 들어온 나머지 점차 황폐해져가는 인간상의 모습들로 가득했던 당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던 파리,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산업화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러시아에서의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비록 소박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모습, 결국 이러한 대조적인 체험의 결과가 릴케로 하여금 그러한 문명비판적인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양상이 엿보이는 그의 시도집에 있는 시한편을 인용해 보자.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균형과 절제를 잃은 채, 깊은 타락에 빠져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달팽이자국을 진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엔 천천히 가던 곳을 이젠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치 창녀같이 여겨 요란스럽게 치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금속과 유리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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