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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1833년
7월 이 현장에 새로운 조사관이 채용되었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는 고딕 리바이벌 건축가이며, 원래는 싱켈 밑에서 배운 학생이었다.
1840년
프로이센의 왕위에 취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역사적 건물에 대해 구체적인 형태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1841년
12월 싱켈과 츠비르너는 중세부터의 계획에 따라 건설을 속행시켜 완성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1842년
9월 4일 프리드리히 빌헬룸 4세와 대사교장 요하네스 폰 가이셀이 건설의 속행을 알리기 위한 최초의 돌을 내려놓았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참배했다.
1880년
대규모의 이 기념물을 완성했을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건설은 수복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었다.
5.5.2 마리엔부르크 성
1794년
프리드리히 길리는 아버지 다비드와 동행하여 마리엔부르크 성을 조사했다. 그때 그는 폐허가 된 외관과 아름다운 볼트가 남아있는 내측에 대해 훌륭한 도면을 그렸다.
1803년
페르디난드 막스 폰 센켄도르프는 베를린에서 발간된 잡지 ‘프라이무티게’에서 이 성이 계속 붕괴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했다.
1816년
서프로이센의 총감독이었던 테오도르 폰 센은 단치히의 지방청을 지휘하고 있었다.
1822년
이 성의 국가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1822년에 대규모 행사가 개최되었다.
1856년
폰 쉔 데오도르의 영광을 칭송하는 행사도 열렸다.
5.5.3 마그데부르크 성당
1520년
마그데부르크 성당 완성,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건물이며 사암과 석회암으로 건설 되었다.
1550년
마그데루르크 성당은 1550~51년에 걸쳐 작센의 모리스 군대에 의해 훼손
30년 전쟁에서는 1631년 틸리 장군의 공격을 받아 불탐
나폴레옹전쟁 동안에는 식량잡화창고로 사용
1814년
5월 프로이센군은 마그데부르크를 다시 탈환하여 5월 29일 이 성당에서 감사예배를 올림
1819년
독일 지방정부는 마그데부르크 성당에 대해 대규모 수리가 필요하다고 결정
1821년 2월 코스테노블이 최초의 견적서를 작성했지만, 그 계획을 감독하도록 선출된 자는 로젠탈이었다.
1826년
마그데부르크 성당에 대한 4월에 수복작업 개시
1835년
1월 18일 주교는 이 사업을 기리고 완성을 축하하는 감사예배를 올렸다.
5.5.4 보존관
1818년
1월 22일 해세-다름슈타트의 대공이 공포한 법령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제도와 비교하더라도 그 개념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1835년
바이에른은 기념물보존총감독관을 임명했다. 바덴에서는 이미 1749년에 로마시대의 유물에 대한 칙령이 나왔었지만 185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존관을 임명하게 되었다.
1837년
폰 쿠아스트는 프로이센의 고대 유물의 보존에 대한 ‘각서’를 초안했다.
그는 역사적 건물과 전통기술에 대한 적절한 지식과 평가가 없는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1843년
프리드리히 빌헬룸 4세는 처음 이직무의 적임자를 임명하였다.
최초의 예술기념물 보존관은 페르디난드 폰 쿠아스트였다.
1858년
폰 쿠아스트는 게른로데에 초대되었다.
1891년
프로이센에서는 처음으로 지방위원회와 지방보존관을 임명해 주임보존관을 보좌하게했다
5.6 프랑스의 역사적기념물에 대한 국가행정의 시작
1802년
프랑스 정부와 교황과의 사이에서 정교조약 체결
1810년
몽탈리베 백작과 알렉상드르 드 라보데는 프랑스의 역사적기념물의 목록작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1813년
스타엘 부인은 ‘연속적인 역사’ 개념을 ‘독일론’에서 강조했다.
1823년
장 앙투안 아라봐느는 낙뢰로 파괴된 중세에 만들어졌던 루앙 성당의 첨탑을 재건하기 위해 조립식 주철부재를 사용하는 방법을 처음 제안
1825년
위고는 ‘파괴자에 대한 투쟁’이라는 항의문을 써서 그것을 1832년 ‘Revue des Deux Mondes\'에 가필하여 발표
1830년
귀조가 설립한 예술위원회는 그 후에 역사사업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부가 관활하게 되었다.
1831년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을 발표하면서 이 건물은 ‘모든 프랑스 성당에 군림하는 늙은 여왕’이라고 칭송
1831년
루도빅 비테는 국내 문화유산에 대해 점검과 보고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시찰여행을 기획했다. 그는 에술사와 건축사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물을 선택했고
13~15세기 지어진 건물들이였다.
1834년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총조사관에 임명, 20년 이상에 걸쳐 역사적기념물과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834년
아르시스 드 코몽은 지방의 여러 단체들을 연합체로 모아서 1834년 프랑스 고고학협회를 창설
1837년
장 피에르의 아들이었던 내무장관 카미유 바샤송 드몽탈리베는 역사적기념물위원회를 설립, 주 목적은 주지사를 보좌하여 총조사관이 역사적기념물을 평가분류하고 수복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보조하는 것이었다.
1860년
에밀 보스빌발드는 역사적기념물위원회의 총조사관이 되었다.
샤르트르 성당, 르 망 성당, 생트 샤펠 성당, 쿠시 성당 등을 수복
6장. 양식적 수복
1. 프랑스의 수복원칙과 실천
1837년
생드니 수도원교회의 북서탑 첨탑 상부에 낙뢰가 떨어져, 그 수리는 공 공건축심의회의 위원이었던 프랑수와 드브레에게 맡겨짐
1844년
새로운 균열이 너무나 빨리 발생하여 시멘트와 철제 연결재로 수리되었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공공사업장관은 그 새로운 구조부분을 철거하도록 명
령함
1839년
예술기념물위원회에서 빅토르 위고는 성구실의 두 부속예배당과 납골당을
파괴한 것과 창을 폐쇄하면서 15세기의 창살을 제거한 것을 비난함
1837년
라수스는 생프 샤펠에 관한 연구논문의 출판을 제안했고, 비야르 드온느쿠
르의 자료집 발행도 준비하고 있었음
1844년
고고학자이며 유리페인터였던 아돌프 나폴레옹 디드론은 최초의 원칙을 정
리한 고고학연보를 창간함
1845년
고고학연보에 게재된 논설에 의해 라수스는 과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수
복의 의도와, 중세 건축사의 해명을 목표로 한 ‘국가적 고고학’에 바탕을 둔
수복의 의도를 명시함
1842년
콩쿠르를 통한 노트르담의 수복은 라수스와 비올레 르
1833년
7월 이 현장에 새로운 조사관이 채용되었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는 고딕 리바이벌 건축가이며, 원래는 싱켈 밑에서 배운 학생이었다.
1840년
프로이센의 왕위에 취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역사적 건물에 대해 구체적인 형태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1841년
12월 싱켈과 츠비르너는 중세부터의 계획에 따라 건설을 속행시켜 완성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1842년
9월 4일 프리드리히 빌헬룸 4세와 대사교장 요하네스 폰 가이셀이 건설의 속행을 알리기 위한 최초의 돌을 내려놓았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참배했다.
1880년
대규모의 이 기념물을 완성했을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건설은 수복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었다.
5.5.2 마리엔부르크 성
1794년
프리드리히 길리는 아버지 다비드와 동행하여 마리엔부르크 성을 조사했다. 그때 그는 폐허가 된 외관과 아름다운 볼트가 남아있는 내측에 대해 훌륭한 도면을 그렸다.
1803년
페르디난드 막스 폰 센켄도르프는 베를린에서 발간된 잡지 ‘프라이무티게’에서 이 성이 계속 붕괴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했다.
1816년
서프로이센의 총감독이었던 테오도르 폰 센은 단치히의 지방청을 지휘하고 있었다.
1822년
이 성의 국가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1822년에 대규모 행사가 개최되었다.
1856년
폰 쉔 데오도르의 영광을 칭송하는 행사도 열렸다.
5.5.3 마그데부르크 성당
1520년
마그데부르크 성당 완성,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건물이며 사암과 석회암으로 건설 되었다.
1550년
마그데루르크 성당은 1550~51년에 걸쳐 작센의 모리스 군대에 의해 훼손
30년 전쟁에서는 1631년 틸리 장군의 공격을 받아 불탐
나폴레옹전쟁 동안에는 식량잡화창고로 사용
1814년
5월 프로이센군은 마그데부르크를 다시 탈환하여 5월 29일 이 성당에서 감사예배를 올림
1819년
독일 지방정부는 마그데부르크 성당에 대해 대규모 수리가 필요하다고 결정
1821년 2월 코스테노블이 최초의 견적서를 작성했지만, 그 계획을 감독하도록 선출된 자는 로젠탈이었다.
1826년
마그데부르크 성당에 대한 4월에 수복작업 개시
1835년
1월 18일 주교는 이 사업을 기리고 완성을 축하하는 감사예배를 올렸다.
5.5.4 보존관
1818년
1월 22일 해세-다름슈타트의 대공이 공포한 법령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제도와 비교하더라도 그 개념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1835년
바이에른은 기념물보존총감독관을 임명했다. 바덴에서는 이미 1749년에 로마시대의 유물에 대한 칙령이 나왔었지만 185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존관을 임명하게 되었다.
1837년
폰 쿠아스트는 프로이센의 고대 유물의 보존에 대한 ‘각서’를 초안했다.
그는 역사적 건물과 전통기술에 대한 적절한 지식과 평가가 없는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1843년
프리드리히 빌헬룸 4세는 처음 이직무의 적임자를 임명하였다.
최초의 예술기념물 보존관은 페르디난드 폰 쿠아스트였다.
1858년
폰 쿠아스트는 게른로데에 초대되었다.
1891년
프로이센에서는 처음으로 지방위원회와 지방보존관을 임명해 주임보존관을 보좌하게했다
5.6 프랑스의 역사적기념물에 대한 국가행정의 시작
1802년
프랑스 정부와 교황과의 사이에서 정교조약 체결
1810년
몽탈리베 백작과 알렉상드르 드 라보데는 프랑스의 역사적기념물의 목록작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1813년
스타엘 부인은 ‘연속적인 역사’ 개념을 ‘독일론’에서 강조했다.
1823년
장 앙투안 아라봐느는 낙뢰로 파괴된 중세에 만들어졌던 루앙 성당의 첨탑을 재건하기 위해 조립식 주철부재를 사용하는 방법을 처음 제안
1825년
위고는 ‘파괴자에 대한 투쟁’이라는 항의문을 써서 그것을 1832년 ‘Revue des Deux Mondes\'에 가필하여 발표
1830년
귀조가 설립한 예술위원회는 그 후에 역사사업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부가 관활하게 되었다.
1831년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을 발표하면서 이 건물은 ‘모든 프랑스 성당에 군림하는 늙은 여왕’이라고 칭송
1831년
루도빅 비테는 국내 문화유산에 대해 점검과 보고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시찰여행을 기획했다. 그는 에술사와 건축사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물을 선택했고
13~15세기 지어진 건물들이였다.
1834년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총조사관에 임명, 20년 이상에 걸쳐 역사적기념물과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834년
아르시스 드 코몽은 지방의 여러 단체들을 연합체로 모아서 1834년 프랑스 고고학협회를 창설
1837년
장 피에르의 아들이었던 내무장관 카미유 바샤송 드몽탈리베는 역사적기념물위원회를 설립, 주 목적은 주지사를 보좌하여 총조사관이 역사적기념물을 평가분류하고 수복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보조하는 것이었다.
1860년
에밀 보스빌발드는 역사적기념물위원회의 총조사관이 되었다.
샤르트르 성당, 르 망 성당, 생트 샤펠 성당, 쿠시 성당 등을 수복
6장. 양식적 수복
1. 프랑스의 수복원칙과 실천
1837년
생드니 수도원교회의 북서탑 첨탑 상부에 낙뢰가 떨어져, 그 수리는 공 공건축심의회의 위원이었던 프랑수와 드브레에게 맡겨짐
1844년
새로운 균열이 너무나 빨리 발생하여 시멘트와 철제 연결재로 수리되었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공공사업장관은 그 새로운 구조부분을 철거하도록 명
령함
1839년
예술기념물위원회에서 빅토르 위고는 성구실의 두 부속예배당과 납골당을
파괴한 것과 창을 폐쇄하면서 15세기의 창살을 제거한 것을 비난함
1837년
라수스는 생프 샤펠에 관한 연구논문의 출판을 제안했고, 비야르 드온느쿠
르의 자료집 발행도 준비하고 있었음
1844년
고고학자이며 유리페인터였던 아돌프 나폴레옹 디드론은 최초의 원칙을 정
리한 고고학연보를 창간함
1845년
고고학연보에 게재된 논설에 의해 라수스는 과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수
복의 의도와, 중세 건축사의 해명을 목표로 한 ‘국가적 고고학’에 바탕을 둔
수복의 의도를 명시함
1842년
콩쿠르를 통한 노트르담의 수복은 라수스와 비올레 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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