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간도의 유례와 범위
●간도분쟁의 성격
●간도지역의 역사
●간도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
●우리땅 간도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
●간도분쟁의 성격
●간도지역의 역사
●간도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
●우리땅 간도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
본문내용
것이다. 반면 청은 두만강으로 인정하였으며, 미정된 곳은 무산 이상 2백여 리의 두만강 상류라는 것이다. 1904년 한·청의 변계관리들이 임의로 약정한 변계선후장정의 제1조에서 백두산의 정계비가 국경선으로써 입증되며, 두만강이 양국의 확정 된 국경선이 아님을 명시하였다는 것이 한, 일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청은 선후장정에서 국경이 명백한 것은 두만강 하류지방이며, 추호도 두만강으로 국경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상의 사실에 관한 쟁점에 대해서는 한·일은 두만강 북은 한국의 발상지이며, 그 지역 일대가 한국에 내부하였던 일이 있다. 지금도 한국인의 유적이 많으며 이주의 역사도 청보다 빨라고 한국인의 수도 청인보다 몇 배로 많다는 점이다. 이 지역은 청의 통치외의 지역이며, 정계비 건립 후에도 한국의 허락 없이는 개간하거나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또한 두만강 이북지역에는 청의 지명이 없었다. 반면 청의 주장은 다르다. 청이 처음부터 두만강 북을 청의 판도로 여겼으며, 정계비 건립 후에 청병을 파견하였다. 이 지역이 원 이전부터 청의 초기까지 중국의 역대 정권에 복종하였으며, 훈춘·둔화 등의 중국 지명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일본이 대청 교섭 시에 주장한 견해는 간도가 한국영토임을 전제로 하였지만, 일본이 청에 동3성 6안, 즉 신법철도 부설권문제, 대석교 영구간의 지선 문제, 경봉선 철도 연장문제, 무순, 연대 탄광 채굴권 문제, 안봉철도 연선의 광무문제, 간도귀속문제를 청에 제시함으로써 일본의 종래 입장을 변경하였다. 결국 일본은 1909년 9월 4일 일본은 간도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청은 동3성 5안건을 일본에 양보하기로 하여 간도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때 한·중의 국경선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결국 이와 같은 간도분쟁의 쟁점들은 일본의 책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12년 목극등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만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르며, 봉금지역인 무주지에 대한 영유권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하튼 백두산정계비가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도지역의 역사
1. 이 지역에 최초로 환국(桓國)이 존재하였음이 나타난다(삼국유사 정덕본의 檀君古記에는 昔有桓國이라 하였다)
2.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 - 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 - 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3. 우리 민족은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이 나타난다. 단군고기의 “백산흑수(白山黑水)” 지역은 백두산과 흑룡강이다(환단고기)
4. B.C. 3천년에 숙신(肅愼), 이(夷)이라 불렸으며, 산해경에는 ‘불함산이 있는 나라가 숙신국이며 동북지역의 국가원수들이 모두 숙신 출신이라 하였다. 주(周) 시기에는 이적(夷狄), 험윤이라 하였고, 춘추(春秋), 한 (漢) 시기에는 호(胡), 맥맥, 흉노(匈奴)라 하였으며, 이후의 위진(魏晋) 시대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하였다.
5. 동이(東夷)에는 아홉 겨레(九夷)가 있는데, 황하 이북과 몽골 사막 이동의 만주지역과 흑룡강 일대 및 연해주 지역에, 황, 백, 현, 적, 남, 양, 우, 방, 견이라는 종족이 살았다.
6. B.C.2333년에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을 건립하였으며 북만주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대능하, 요하지역인 발해 연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7. 고조선은 하-은-주시대에 하르빈-농안-장춘-봉천지역과 요하 및 압록강 부근의 진(眞)조선과 대능하와 요하 사이 지방에 존재했던 번(番)조선으로 발전하였다.
8. 고조선시기의 발전된 문화는 창힐(蒼?)의 문자(漢字) 발명과 더불어 홍범(洪範)의 창제 및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발전하였다.
9. 고조선 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대부터 발견되어진 대·소능하 유역의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 발견으로 입증되었으며, 중국의 황화문화 보다도 2천년 내지 천오백년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10. 중국이 부르는 청구국(靑邱國)은 황제시대 이전에 산해관 북방지역인 번조선지역에 존재한 국가였으며, 동이문화를 심화 발전시킨 국가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지금까지의 일본이 대청 교섭 시에 주장한 견해는 간도가 한국영토임을 전제로 하였지만, 일본이 청에 동3성 6안, 즉 신법철도 부설권문제, 대석교 영구간의 지선 문제, 경봉선 철도 연장문제, 무순, 연대 탄광 채굴권 문제, 안봉철도 연선의 광무문제, 간도귀속문제를 청에 제시함으로써 일본의 종래 입장을 변경하였다. 결국 일본은 1909년 9월 4일 일본은 간도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청은 동3성 5안건을 일본에 양보하기로 하여 간도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때 한·중의 국경선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결국 이와 같은 간도분쟁의 쟁점들은 일본의 책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12년 목극등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만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르며, 봉금지역인 무주지에 대한 영유권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하튼 백두산정계비가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도지역의 역사
1. 이 지역에 최초로 환국(桓國)이 존재하였음이 나타난다(삼국유사 정덕본의 檀君古記에는 昔有桓國이라 하였다)
2.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 - 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 - 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3. 우리 민족은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이 나타난다. 단군고기의 “백산흑수(白山黑水)” 지역은 백두산과 흑룡강이다(환단고기)
4. B.C. 3천년에 숙신(肅愼), 이(夷)이라 불렸으며, 산해경에는 ‘불함산이 있는 나라가 숙신국이며 동북지역의 국가원수들이 모두 숙신 출신이라 하였다. 주(周) 시기에는 이적(夷狄), 험윤이라 하였고, 춘추(春秋), 한 (漢) 시기에는 호(胡), 맥맥, 흉노(匈奴)라 하였으며, 이후의 위진(魏晋) 시대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하였다.
5. 동이(東夷)에는 아홉 겨레(九夷)가 있는데, 황하 이북과 몽골 사막 이동의 만주지역과 흑룡강 일대 및 연해주 지역에, 황, 백, 현, 적, 남, 양, 우, 방, 견이라는 종족이 살았다.
6. B.C.2333년에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을 건립하였으며 북만주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대능하, 요하지역인 발해 연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7. 고조선은 하-은-주시대에 하르빈-농안-장춘-봉천지역과 요하 및 압록강 부근의 진(眞)조선과 대능하와 요하 사이 지방에 존재했던 번(番)조선으로 발전하였다.
8. 고조선시기의 발전된 문화는 창힐(蒼?)의 문자(漢字) 발명과 더불어 홍범(洪範)의 창제 및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발전하였다.
9. 고조선 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대부터 발견되어진 대·소능하 유역의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 발견으로 입증되었으며, 중국의 황화문화 보다도 2천년 내지 천오백년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10. 중국이 부르는 청구국(靑邱國)은 황제시대 이전에 산해관 북방지역인 번조선지역에 존재한 국가였으며, 동이문화를 심화 발전시킨 국가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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