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의 토지구조 중세도시자치문제 (상업의 부활관련) 동방무역특징, 과정 지리혁명과정 한자도시 인클로저 지리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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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원의 토지구조 중세도시자치문제 (상업의 부활관련) 동방무역특징, 과정 지리혁명과정 한자도시 인클로저 지리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프랑스의 경우는 통치권의 분산화가 극복되면서, 즉 왕권이 강화되면서, 도시의 자치는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성기 이후 도시의 자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왕권과 도시의 관계를 살펴보자.
중세 프랑스 왕권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자로 흔히 필립 2세(1180-1223)를 든다. 한편 그의 치세인 12세기말과 13세기초는 프랑스 도시들의 여러 면에서 발전하던 시기에 해당되기도 한다.35) 따라서 프랑스 도시는 그 발전기에 이미 자치가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 2세는 자신의 왕권강화 정책에 도시가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즉 도시는 국왕이 의존할 수 있는 인적 경제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더구나 도시는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아서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었고 일부 도시들에서는 도시민들이 자체의 군사 조직을 구성하고 있기도 해서 당시 도시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36) 더구나 이 시기의 가장 명확한 적대 관계는 국왕과 봉건영주 사이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은 봉건영주들에 대항해서 도시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의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도시들은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필립 2세의 치세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유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가 자발적으로 자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37)
그러나 전통적으로 “도시의 보호자요 동맹자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국왕”38)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필립 2세의 도시 정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역시 도시의 자치가 발전하는 것은 왕권 강화에 저해가 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치를 부여하였던 도시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자신에 적대적인 영주들의 영역에 있는 도시들과 국경 지역에 있는 도시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지역의 도시들에 대해서는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부득하게 일부 도시에 자치를 부여하면서도 가능하면 도시를 왕권에 복속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39)
그 이후 루이 성왕(1226-1270)에 이르면 도시에 대한 국왕의 권한이 증가하였다. 그는 코뮌도시에도 국왕의 관리인 프레보(prevot)를 파견하는 등 도시의 자치를 축소하고 국가와 도시의 관계를 재조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이제 도시들을 법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도시들(코뮌도시, ‘자유’도시, 콘술도시)로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40) 그래서 등장한 것이 ‘좋은 도시’(bonne ville)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도시는 기존의 도시들과 다른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아니라, 기존의 구분을 무시한 새로운 유형의 도시다. 즉 국왕의 입자에서 볼 때, 부유하여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요새화되어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도시는 ‘좋은’ 도시였다.41) 그 이후 필립 4세(1285-1314)는 더욱 조직적으로 도시를 국왕의 통치 기구에 종속시키려고 하였고 도시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도시 정책을 관철시켰다.42)
필립 4세가 도시들에 대한 그의 권한을 증가시켰고, 그의 치세에 ‘좋은 도시’라는 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도시의 자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직 국왕이 도시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관료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가능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도시가 어는 정도 자치를 발휘하는 것은 국왕의 통치에 유용한 측면도 있었다. 예컨대 도시민들 사이의 문제를 어느 선까지는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하게 함으로써 행정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고, 세금을 직접 국왕 관리가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별로 일정 금액을 할당하고 자체적으로 징수토록 함으로써 국왕의 세금에 대한 반발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도시들도 일정한 자치를 유지하였지만, 그 자치란 블로크가 오래 전에 지적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보면 도시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하는 아주 한정된 행정상의 자치에 불과했다”.43)
1) 상업의 부활
2세기와 3세기의 빈번한 내란으로
시작된 게르만의 침입으로 더욱 심각해진 서유럽에서의 전반적인 교역 쇠퇴는 9세기에 정점에 달했다. 로마 제국에서 상업의 주요동맥을
이루었던 지중해의 여러 해로는 대부분 아프리카 및 스페인의 해안 지대와 서지중해의 섬들을 장악한 회교도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회교도지역이 기독교도와의 무역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유럽이 회교도 지역에 수출할 만한 상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회교도 해적들 때문에 바다여행은 매우 위험하였다. 비잔틴 해군이 베네치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의 해로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실제로 몇몇 유대 상인들은 회교도 지역과 기독교도 지역사이에서 교역활동을 벌였으나, 대규모 교역은 사라졌다.
북방에서는 유럽의 해안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몇 안되는 상인 거주자마저 바이킹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바이킹들 자신이
약탈행위와 함께 어느 정도 교역활동도 하였으나 북유럽에서의 상업활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게 되었다.
서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상업의 부활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0세기말, 베네치아는
곡물과 포도주 그리고 목재를 콘스탄티노플로 수출하고 그곳에서 고급 비단천을 싣고 돌아와 그 비단을 북 이탈리아의 이웃 도시들에게 팔고
있었다. 한편 그 당시에 아말피의 상인들도 카이로와 광범위한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이탈리아의 내륙 도시들은 독자적으로 산업 특히
모직물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이 모직물에 대한 시장은 처음에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새로운 시장에로의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한 것은 대개 서이탈리아 해안도시들의 업적이었다. 10세기에 제노바와 삐사의 상인들은 회교도 해적떼들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과감하게 해안을 따라 프랑스로향해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 초까지도 제노바와 삐사는 이따금 회교도의
해적떼에 게 약탈을 당했으나 1061년에는 그들의 연합함대가 회교도들을 사르디니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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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12
  • 저작시기20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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