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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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사회과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용어는 사라져야 하고, 사회사의 실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전해 줄 다른 용어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다. 코반과 테일러의 견해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수정주의는 다같이 프랑스 혁명이 부르조아 혁명이었다는 정통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출발점은 르페브르와 같은 정통적 혁명사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좁은 산업혁명 후의 산업사회에서 통용되는 ‘부르조아’내지 ‘부르조아지’ 개념이다. 즉 테일러에게 부르조아는 ‘생산관계에서 자본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고 코반에게서도 부르조아지는 ‘상업, 공업 그리고 금융업을 지배하는 계급’이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영·미 수정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시작하거나 그것을 주도한 사람의 계급이 부르조아가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미 계통의 수정주의자들이 지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함은 그들이 한결같이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 즉 구체제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케플러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 당시에 이미 명확히 귀족적이며 봉건적인 관계와 부르조아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그것과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의미는 바로 이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하면 출생과 특권과 명예에 입각한 귀족지향적인 사회와 재능과 지성 그리고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부르조아 사회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혁명은 후자를 택한 혁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것이 케플러의 결론이다. 영·미의 수정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거기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 잡았던 것이다.
II. 프랑스 내의 수정주의
가. Richet
1969년에 리쉐는 혁명의 주체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인 귀족을 중심으로 부유한 제 3 신분 즉 부르조아지 상층을 포함한 엘리트가 형성되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들을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결속시킨 것은 계몽사상과 자유주의였다. 그들은 바로 이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구체제를 공격하고 전제주의를 타도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라 ‘계몽주의 혁명’ 이었다는 것이다.
보벨은 이러한 리쉐의 견해에 대하여 귀족의 자유주의는 미래지향적이라기 보다 향수에 젖은 과거지향적이었으며 이해관계의 진정한 공동체가 없는 곳에 동질적인 엘리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 Chaussinand - Nogaret
1975년 쇼시낭 - 노가레는 구체적인 증거 - ex) 3부회의 진정서 - 를 제시하면서 좀 더 여러각도에서 귀족과 부르조아지의 엘리트론을 전개하였다.
쇼시낭 - 노가레는 1968년에 워싱턴 대학에 학위논문으로 제출된 웨이트맨의 『관료제, 민주주의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의 진정서 검토와 약간의 자신의 연구를 중심으로, 귀족과 부르조아지 두 신분이 다같이 절대왕정과 계몽전제주의에 적대적이고 신분사회의 유지나 전통적 사회구조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권력의 분립에 입각한 헌정체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문화적 유대와 진정서 내용의 유사성을 근거로 부르조아지의 동질적인 엘리트 형성을 논한 쇼시낭 - 노가레는 나아가 귀족들의 자본주의적인 활동을 논함으로써 경제면에서의 동질성도 주장한다. 귀족은 부르조아지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자유 즉 경제발전의 모든 동력의 해방과 그것을 억제하고 있는 장애물의 제거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낡은 사회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의 혁신에 반대하였다는 주장은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구체제 말기에 엘리트를 형성한 귀족과 부르조아지는 다같이 위기에 대처함에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상이한 해결책으로 맞서지 않고 동일한 헌정적 해결을 제시하였으며, 따라서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효과적이고 온건한 혁명을 주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힘이 등장함으로써 사태는 달라지게 되었고, 부르조아지는 스스로의 존립을 확보하고 귀족이라는 유능한 경쟁상대를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쇼시낭 - 노가레가 그의 엘리트론에서 도출한 결론이다.
다. 1973년 퓌레와 리쉐는 1965년에 출판한 혁명사의 수정판을 내놓았다.
퓌레는 『혁명사』에서 1789년의 혁명은 결코 단일혁명이 아니라 동질적이고 자율적인 ‘3개 혁명의 상충(telescopage de trois revolutions)’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하나는 국민의회의 혁명, 둘째는 파리와 기타 도시들의 혁명이고 세째는 농민혁명이다. 사실, 르페르브와 같은 정통사가들도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이를 성취하였다.’는 샤토브리앙의 말을 인용하면서 1789년 혁명을 귀족혁명에서 촉발된 부르조아 혁명, 도시의 대중혁명, 농촌의 농민혁명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정통파 혁명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은 큰 테두리에서 기본적으로 부르조아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에 비해 퓌레와 리쉐는 정통파 혁명사가들이 이미 실증적으로 밝힌 내용의 꼬투리를 잡아 프랑스 혁명을 3개의 혁명으로 분해하려 한다.
퓌레와 리쉐의 수정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이른바 ‘일탈설(derapage)’이다. 퓌레는 1789 - 91년 사이에 의미 부르조아 혁명이 성취되었으나 1791년 7월의 샹-드-마르스(champ-de-mars)의 학살 이후 민중이 개입되면서 혁명이 빗나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 일탈설은 프랑스 혁명의 객관적인 역사적 전개와 그 과정의 구체적 사실들에 입각할 때 잘못된 것이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이러한 판단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작업이 필요하므로, 현 단계로서는 다음과 같은 소불의 결론이 전체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 1789년에 세 개의 혁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중, 특히 농민의 지지를 받은 단 하나의 자유주의적인 부르조아 혁며이 있었다. 1792년에 혁명의 일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혁명적 부르조아지는 민중적 대중과의 동맹을 통하여 제 3 신분의 단결을 유지하려 하였고, 민중의 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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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9
  • 저작시기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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