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갑신정변의 배경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왜 일본이었나?
2) 차관교섭 - 개화파의 위기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가린것이 심히 뜨거우니 깨뜨려야 한다’
2. 갑신정변의 전개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2) 갑신정변의 준비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2) 정변 단행의 결정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5) 국왕의 밀칙 획득
3. 갑신정변의 경과
1) 개화정권의 수립
2) 개화파의 개혁내용
4.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원인
1) 갑신정변의 실패
2)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5. 갑신정변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1) 갑신정변의 영향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3) 조선․일본의 교섭과 漢城條約의 체결
(4) 청국․일본의 교섭과 텐진조약의 체결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1) 역사적 의의
(2) 한계
6. 갑신정변에 대한 여러 평가
1) 일제시기
2) 북한
3) 일본
4) 남한
5)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정리
Ⅲ. 맺음말
Ⅱ. 본론
1. 갑신정변의 배경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왜 일본이었나?
2) 차관교섭 - 개화파의 위기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가린것이 심히 뜨거우니 깨뜨려야 한다’
2. 갑신정변의 전개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2) 갑신정변의 준비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2) 정변 단행의 결정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5) 국왕의 밀칙 획득
3. 갑신정변의 경과
1) 개화정권의 수립
2) 개화파의 개혁내용
4.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원인
1) 갑신정변의 실패
2)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5. 갑신정변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1) 갑신정변의 영향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3) 조선․일본의 교섭과 漢城條約의 체결
(4) 청국․일본의 교섭과 텐진조약의 체결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1) 역사적 의의
(2) 한계
6. 갑신정변에 대한 여러 평가
1) 일제시기
2) 북한
3) 일본
4) 남한
5)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정리
Ⅲ. 맺음말
본문내용
국강병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선각자로 인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지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수 <중앙일보 2003, 03, 04 中에서...>
5)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정리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북한, 일본 뿐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상반되는 견해가 있다. 갑신정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릴 때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외세를 끌어 들였다는 점이다. 즉, 정변의 주체들이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목적의식은 뚜렷하였지만 침략세력인 일본에 의지하여 쿠데타를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김옥균 등 운동주체들이 가졌던 근대화론도 '근대화=서구화=일본화'라는 인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反침략 의식도 反청에 불과하여 또 다른 침략세력인 일본을 간과하였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갑신정변 참가자들의 한계를 단순히 시대적 한계라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는 이후 일제 식민지시기에 정변의 주체들이 대부분 충실한 식민통치의 하수인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정변 참가자들인 박영효, 이규완 ,유혁로, 신응희 등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합리화하면서 식민지 하에서 반민족적인 행각을 일삼았다. 또한, 갑신정변은 확고한 근대 사상의 정립이 없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시도되었고, 방법적 측면에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와 일본과의 결탁, 정변과정에서의 반대파에 대한 살육, 결과적 측면에서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여 개화 운동의 맥을 단절하게 하고, 외세의 지배를 촉진하게 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개화파가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궁을 피로 물들게 함으로써 개화파에 우호적이었던 왕으로부터, 그리고 일반 국민들로부터 막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을 왜곡하고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결과 개화운동, 근대화운동의 발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점은 갑신정변이 가지는 치명적 약점이자 한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인정한다 해도, 갑신정변은 우리 역사상 국민 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 운동이었고, 부르주아적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었다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방법상 위로부터의 개혁과 일본과의 결탁이라는 치명적 한계점이 당시 역사적 조건하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갑신정변이 근대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시도되었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근대화 운동의 선구로서, 역사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Ⅲ. 맺음말
갑신정변의 주도 세력이었던 개화당의 개혁 사상은 본질적으로 근대화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법을 평화적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폭력적인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당시 일반인에게 경원의 대상이었던 일본과의 결탁이 오히려 민중의 불신과 외면의 요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개화당의 근대적 개혁 추구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음은 물론, 한국의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에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와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혁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한 근대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 개화파들은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 재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고 상공업 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이 정변실패의 근본적 원인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이는 급진개화파의 대다수가 봉건 대지주에 기반을 둔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아가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는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여 구미열강의 침략성에 철저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곧 정권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그들의 주관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를 원조자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결국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을 실패로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단계적으로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즉, 개화파의 개혁안 중 정치면에 있어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 국왕의 전제와 척족의 국정간섭을 막고 내각제도에 의한 국정운영을 모색하였다는 점, 사회경제 부분에 있어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지조법개정과 탐관오리와 국가기관의 정비, 국가재정기반의 확립 등을 제시한 점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높이 평가 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그 어떤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이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으로서 ‘위로부터의 부르주아개혁’의 시발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진보성과 선진성에 기인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참고문헌>
한국사 38권/ 국사편찬위원회/ 1999
신용하/ 한국근대사회변동사강의/ 지식산업사/ 2000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 1997
한국사 11권/ 한길사/ 1999
이광린/ 한국사 강좌-근대편/ 일조각/ 1997
허동편박노자/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지식산업사/ 2000
최영호/ 갑신정변론/ 한국사시민강좌7/ 일조각/ 1990
허원호/ 갑신정변, 근대변혁운동의 서막인가/ 통일시론/ 2000
한국근대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한국근현대사 연구회/ 신서원/ 1998
주진오/ 김옥균/ 역사비평사/1990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수 <중앙일보 2003, 03, 04 中에서...>
5)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정리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북한, 일본 뿐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상반되는 견해가 있다. 갑신정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릴 때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외세를 끌어 들였다는 점이다. 즉, 정변의 주체들이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목적의식은 뚜렷하였지만 침략세력인 일본에 의지하여 쿠데타를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김옥균 등 운동주체들이 가졌던 근대화론도 '근대화=서구화=일본화'라는 인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反침략 의식도 反청에 불과하여 또 다른 침략세력인 일본을 간과하였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갑신정변 참가자들의 한계를 단순히 시대적 한계라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는 이후 일제 식민지시기에 정변의 주체들이 대부분 충실한 식민통치의 하수인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정변 참가자들인 박영효, 이규완 ,유혁로, 신응희 등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합리화하면서 식민지 하에서 반민족적인 행각을 일삼았다. 또한, 갑신정변은 확고한 근대 사상의 정립이 없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시도되었고, 방법적 측면에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와 일본과의 결탁, 정변과정에서의 반대파에 대한 살육, 결과적 측면에서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여 개화 운동의 맥을 단절하게 하고, 외세의 지배를 촉진하게 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개화파가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궁을 피로 물들게 함으로써 개화파에 우호적이었던 왕으로부터, 그리고 일반 국민들로부터 막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을 왜곡하고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결과 개화운동, 근대화운동의 발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점은 갑신정변이 가지는 치명적 약점이자 한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인정한다 해도, 갑신정변은 우리 역사상 국민 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 운동이었고, 부르주아적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었다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방법상 위로부터의 개혁과 일본과의 결탁이라는 치명적 한계점이 당시 역사적 조건하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갑신정변이 근대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시도되었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근대화 운동의 선구로서, 역사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Ⅲ. 맺음말
갑신정변의 주도 세력이었던 개화당의 개혁 사상은 본질적으로 근대화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법을 평화적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폭력적인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당시 일반인에게 경원의 대상이었던 일본과의 결탁이 오히려 민중의 불신과 외면의 요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개화당의 근대적 개혁 추구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음은 물론, 한국의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에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와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혁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한 근대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 개화파들은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 재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고 상공업 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이 정변실패의 근본적 원인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이는 급진개화파의 대다수가 봉건 대지주에 기반을 둔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아가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는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여 구미열강의 침략성에 철저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곧 정권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그들의 주관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를 원조자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결국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을 실패로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단계적으로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즉, 개화파의 개혁안 중 정치면에 있어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 국왕의 전제와 척족의 국정간섭을 막고 내각제도에 의한 국정운영을 모색하였다는 점, 사회경제 부분에 있어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지조법개정과 탐관오리와 국가기관의 정비, 국가재정기반의 확립 등을 제시한 점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높이 평가 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그 어떤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이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으로서 ‘위로부터의 부르주아개혁’의 시발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진보성과 선진성에 기인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참고문헌>
한국사 38권/ 국사편찬위원회/ 1999
신용하/ 한국근대사회변동사강의/ 지식산업사/ 2000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 1997
한국사 11권/ 한길사/ 1999
이광린/ 한국사 강좌-근대편/ 일조각/ 1997
허동편박노자/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지식산업사/ 2000
최영호/ 갑신정변론/ 한국사시민강좌7/ 일조각/ 1990
허원호/ 갑신정변, 근대변혁운동의 서막인가/ 통일시론/ 2000
한국근대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한국근현대사 연구회/ 신서원/ 1998
주진오/ 김옥균/ 역사비평사/1990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