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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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대외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1. 漢族과의 관계
2. 北方 民族과의 관계
3. 기타(일본, 아리비아) 민족과의 관계

Ⅱ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1. 元과의 관계
2. 明과의 관계
3. 紅巾賊倭寇와의 관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동시에 이와 인접해 있으며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있는 거란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고려와의 연계를 환영하였다. 곧 麗宋 양국이 외교적으로 우호교섭관계를 맺게 된 것은 송의 “聯夷以制夷”라는 기본 외교 방침 하에 거란의 팽창을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후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는 거란의 세력이 고려의 판도 내로 미쳐 온 성종 12년(993)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초기 단계의 麗宋간의 우호적인 관계 정립은 기본적으로 거란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실제 양국의 정치외교적인 입장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한 예로 송은 성종 4년(985) 연운 지방의 회복을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동원하면서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자국에 실리가 없는 이 전쟁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고려도 성종 13년(994)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여 송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이로 인해 양측 모두 상대를 불신하게 되어, 양국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이어서 거란이 고려에게 송과의 관계 청산을 요구함에 고려가 이를 쉽사리 승낙하게 되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13년(994)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수립하게 됨으로서 麗宋의 관계는 일시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6년 후 고려가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양국의 통교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거란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음을 역설하고 재개의 뜻을 표명하였고, 당시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송 또한 고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일면 전쟁, 일면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송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그들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활발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麗宋 양국은 모두 거란에 대해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서로가 필요할 때에 상대방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다.
거란의 압박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麗宋의 국교는 문종 25년(1071) 소강상태를 해소하고 우호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매우 정례적이고 체계적으로 유지되어, 문화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계속되던 宋과의 친선관계는 북방의 정세 변동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북방에서 거란을 대신하여 여진족이 패자로 등장하게 되자, 송은 聯麗制金策을 구사하여 金에 대항하려 하였다. 당시의 미묘한 정세 속에서 양국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 것은 송이 고려에 요구해 온 인종 6년(1128)의 假道문제였다. 이는 그 1년 전 금에 의해 포로로 잡힌 휘종흠종을 구출하기 위한 통로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양국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이로 인해 송은 고려가 금에 밀착되었다고 보아 고려 사신단의 입국 및 상인의 내왕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양국의 외교관계는 불신의 관계로 발전되어 공식적인 통교는 끊어지고,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간헐적인 사신단의 왕래만이 유지되다가 그마저 의종 18년(1164) 이후에는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양국 간의 통로는 商人을 매개로 하게 되어, 상인들이 양국의 중요 사안을 해결하는 공적 연결 장치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편 하에서도 양국의 우의는 유지되어 전쟁포로 및 표류민의 쇄환에서 양국이 외교문서를 갖추어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도 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종 45년(1258)의 고려 표류민, 다음해의 몽고에 피로된 송인의 쇄환 등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麗宋 사이의 국교는 間歇的 斷續的이었다. 그러나 우호적인 관계는 시종 유지되었으며, 그간에 공식적인 조공제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경제적문화적인적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 여기에서 麗宋간의 조공관계는 臣屬을 전제로 年號나 曆法의 채용을 통해 상징적으로는 고려가 宋에 대한 종속관계를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정간섭이 크게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對漢族 외교는 실리주의에 입각하여 대륙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한 예로 五代十國 및 宋代의 수많은 문물이 使臣團의 왕래를 통해 수입된 것을 들 수 있다.
2. 北方 民族과의 관계
1) 遼(거란)와의 항쟁
가. 遼의 1차 침입
거란은 고려가 건국하기 전인 907년 강력한 통일 국가를 형성하여 태조 9년(926) 발해를 멸망시킨 후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후 거란은 남쪽으로 중원 및 한반도로의 진출을 도모하여 송 및 고려에게 압박감을 주어, 양국으로 하여금 우호교섭의 관계를 맺게 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하여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했기에 거란의 팽창정책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족의 나라로 인식하던 발해가 거란에 멸망함으로서 북방의 방파제를 상실하게 된 고려는 “거란은 짐승의 나라”로 규정하고 태조 25년(942)에 거란이 보낸 사신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를 萬夫橋에서 굶어 죽게 하는 등 거란을 배격하였다.
경종 1년(976) 이래 송이 북방의 실지 회복을 위해 본격적 군사작전에 들어가자, 거란은 이에 대응하여 발해 유민의 국가인 정안국,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 송과 우호관계인 고려를 차례로 정벌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성종 12년(993)에는 고려를 공격하였다.(제1차 침입)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 기본 입장은 麗宋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나아가 고려를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 전쟁은 큰 피해 없이 양국의 사령관인 徐熙와 蕭遜寧의 외교적 담판으로 마무리 되었다. 여기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ⅰ)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신들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침식하고 있으며, ⅱ)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었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朝聘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ⅰ)고려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하여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이며, 만일 地界를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모두 고려의 경내에 있는 셈이다 ⅱ) 압록강 안팎 역시 고려 영토 내에 있는데, 여진이 盜據하고 있어 조빙하지 못하므로 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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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22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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